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31화
태화가 권지윤에게 말을 걸었다.
“미안해요.”
“아, 아니에요.”
권지윤은 용기를 내서 남자에게 고백했지만 어쨌든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마음속에 창피함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 이게 뭐야. 쪽팔려.’
그녀는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안녕히 계세요.”
권지윤은 재빨리 카페 문을 열고서 밖으로 나갔다. 그동안 여성 손님 중 몇 명은 권지윤처럼 태화에게 대시했었다. 하지만 태화는 정중하게 거절의 뜻을 전했고 그녀들은 그 이후 다시 ‘민들레’ 카페에 오지 않았다.
권지윤의 모습을 본 장소영이 태화를 향해 말했다.
“저 손님도 이제 안 오겠네.”
“그러겠죠.”
“크게 신경 쓰지 마. 몇몇은 카페에 발길을 끊었지만, 아직 떠난 사람보다 새로 유입된 사람이 더 많으니까.”
“아직까진 제가 마케팅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군요.”
“그런 셈이지.”
#.
며칠 후, 주말 오후.
예식장.
‘늦었다. 서두르자.’
태화는 카메라를 들고서 신부대기실로 뛰어갔다. 예식 전 신부대기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내기 위해서였다.
태화는 카페 알바 시작과 동시에 결혼식 동영상 촬영을 주말마다 하고 있었다. 카페 알바만으로는 제작비를 모으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태화가 뛰어가는 이유는 앞에 있었던 예식이 약간 밀렸기 때문이었다. 태화는 현재 2개의 예식을 연속으로 찍는 중이었다. 신부대기실은 결혼식 장면 다음으로 중요한 장소이다.
결혼식의 주인공이 신부인 데다가 가장 많은 하객이 찾아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식장 안은 이미 하객들로 붐벼서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냥 지나가는 게 쉽지 않겠는걸.’
태화 큰소리로 외치며 뛰어갔다.
“잠시만요!”
태화가 소리치자 사람들이 살짝 자리를 내주었다.
“고맙습니다.”
이곳 아르바이트 근무 수칙상 동영상 촬영을 하는 사람은 정장을 입어야 했다. 태화가 정장을 차려입고 카메라를 들고 뛰는 모습은 꽤 근사했다.
몇몇 젊은 여성들은 태화의 모습을 한참이나 쳐다보기도 했다.
보통 동영상팀은 외부 업체에 외주를 주는데 특이하게 이곳은 예식장 내에 사진과 동영상팀을 두고 있었다.
보통 예식 촬영에 바로 투입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몇 번 촬영 훈련을 하고 투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태화는 한 번 정도 촬영 교육을 받고 바로 투입됐다.
이게 가능했던 건 태화가 이전에 노량진에서 동영상 강의를 촬영했었던 경험이 있었고 그동안 연출 공부를 꾸준히 해왔기 때문이었다. 태화가 처음부터 능숙한 모습을 보이자 동영상 팀장도 태화에게 신뢰를 보냈고 촬영도 태화를 우선 배정했다.
태화가 신부대기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하객들이 입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예식장은 촬영 일보다 사람에 치이는 일이 더 많다.
그중 신부의 친구로 보이는 여성 한 명이 신부대기실 입구 한가운데 서 있었다. 태화가 신부대기실로 들어가려면 이 여성의 양해를 얻어야 했다.
“저기. 죄송합니다.”
여성이 짜증 나는 말투로 말했다.
“뭐예요?”
순간 여성이 고개를 돌려 태화와 눈이 마주쳤다. 이 여성은 태화를 보자 순간적으로 표정으로 바뀌었다.
짜증 나는 표정에서 살짝 미소를 짓는 표정으로 바뀌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역대급 표정 변화였다.
훤칠한 외모. 그리고 태화 정장에 넥타이를 매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옷깃 사이로 살짝 쇄골이 보였다.
이 모습은 젊은 여성에게 호감을 주기에 충분했고 이 여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머 멋지다.’
이 여성은 순간 자신의 표정에 맞게 친절한 말투로 말했다.
“왜 그러시죠?”
“신부님 촬영 때문에 그런데 잠시 만 비켜주시겠어요?”
태화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이 여성은 거부할 수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지금까지 신부대기실 입구를 막았다는 사실에 미안함마저 느꼈다.
“어머. 당연히 비켜드려야죠.”
“고맙습니다.”
길을 막고 있던 여성이 몸을 움직여 공간을 만들었다.
[태화 군. 인생 참 편하게 사는구먼.]
[영감님. 지금 이 시점에서 할 소립니까? 빡세게 살고 있는데.]
[뭐, 사실이지 않은가? 아마 자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으면 컴플레인이 들어왔을지도 모르지.]
[하긴.]
예식장엔 다양한 컴플레인이 접수된다. 특히 예식장 직원들에 관한 컴플레인이 많은데 동영상 촬영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일단 여성의 태도로 보아 컴플레인을 걸지 않을 게 분명했다.
태화가 신부대기실로 들어가자 사진사가 이미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사진사가 태화를 보더니, 인사를 건넸다.
“태화 씨. 좀 늦었네?”
“죄송해요. 앞의 식이 좀 지연돼서.”
“그럴 수도 있지 뭐.”
“네.”
태화도 사진사 옆에서 재빨리 촬영하기 시작했다.
#.
태화는 신랑 신부의 폐백 촬영까지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보통 결혼식 촬영은 대략 한 시간 삼십 분 정도에서 두 시간 정도가 소요된다.(일반적으로 예식 삼십 분 전에 촬영을 시작해서 폐백까지 시간)
태화 현재 촬영을 마치고 진이 빠졌다. 결혼식은 NG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 장면이 한 번 지나가 버리면 다시 찍을 수가 없다.
-그 장면 못 찍었는데 다시 해주시겠습니까?
애초에 이런 말이 통하지 않는다. 괜히 했다가 미친놈 소리나 들을 뿐이다.
동영상 촬영자들이 가끔 사고를 치는 것도 촬영해야 할 걸 하지 못한 경우다. 이땐 고객들의 컴플레인을 감수해야 하고 심한 경우 보상까지 해야 한다.
그래서 촬영 내내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예식의 진행 상황을 놓치면 눈 깜짝할 사이에 사고를 치기 때문이다.
태화가 사무실을 가는 길에 같이 본식을 촬영했던 사진기사가 태화의 어깨를 툭 쳤다. 사진기사는 30대 후반으로 키가 작고 깐깐한 스타일로 사진팀에서는 박 과장으로 불린다.
박 과장은 동영상 촬영을 하는 사람들한텐 요주의 인물이었다.
“오늘 수고 많았어요.”
“박 과장님도요.”
“그쪽이랑 같이 촬영하면 편하다니까.”
“그렇습니까?”
“정말이라니까. 내가 본식 촬영하면서 짜증이 나지 않은 건 그쪽이 유일해요.”
동영상 촬영자와 사진기사는 합이 잘 맞아야 한다. 사진기사가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동영상 촬영자가 프레임에 들어오면 성질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항상 본식 촬영에 들어가게 되면 사진기사의 동선을 확인하면서 촬영에 임해야 한다.
태화는 박 과장과 간단히 인사를 하고 나서 화장실로 향했다. 태화는 화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변기 쪽이 아닌 세면대로 향했다.
태화는 몇 시간 전부터 입안에서 비린내가 느껴졌다. 태화는 입에 고여 있었던 침을 뱉었다.
“퉤!”
태화가 뱉은 침에는 빨간색이 섞여 있었다. 침에 피가 섞인 것이다.
태화는 입을 벌려 거울로 자신의 잇몸을 보았다.
[태화 군. 자네 피곤해서 잇몸이 다 부었구먼.]
[아무래도 그런 듯하네요.]
태화는 따듯한 물로 입안을 몇 번 헹구었다. 박도봉 감독은 태화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조금만 더 견디세. 얼마 남지 않았네.]
[네. 그나저나 저예산 영화 지원 사업 1차 합격 발표가 다음 주예요.]
[벌써 그렇게 됐구먼. 마음 편하게 갖게나.]
[네. 전 마음 비웠어요. 되면 좋지만 안 돼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제작비는 마련되어가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되면 좋지. 안 그런가?]
[그렇긴 하죠. 뭐 보너스 같은 거 아니겠습니까?]
태화가 목표로 한 돈은 천만 원 정도였고 이미 금액의 상당 부분이 채워진 상태였다.
누군가는 천만 원으로 어떻게 장편영화를 제작하냐고 말하지만 그건 어떻게 만드느냐에 달렸다. 영화의 제작비는 상당 부분 연기자 출연료를 비롯한 인건비다.
이 부분을 줄이면 천만 원의 예산으로 장편영화를 만드는 게 불가능한 게 아니다. 카메라는 DSLR을 쓰면 되고 영상 편집은 시중에 나와 있는 편집 프로그램을 쓰면 된다. 촬영과 편집에 그리 많은 예산이 들어가지 않는다.
태화는 화장실을 나와 영상팀이 있는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로 가는 길에 안내 데스크가 있다.
안내 데스크의 직원이 태화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머, 태화 씨.”
“안녕하세요.”
“고생 많았어요.”
“저보다는 민영 씨가 더 고생이죠.”
태화에게 인사말을 건넨 황민영은 태화와 나이가 동갑으로 외모가 괜찮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남자친구가 지극정성이었다.
이 예식장은 전반적으로 직원들의 외모가 괜찮은 편이었다. 사람을 대하는 업종에선 외모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한마디로 뭐가 없어도 뭔가 있어 보인다.
태화의 눈에 사무실 간판이 보였다. 태화는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 두 손으로 자신의 뺨을 가볍게 쳤다.
‘밝게 가자. 굳이 피곤한 모습을 보일 필요는 없지.’
#.
태화는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큰소리로 외쳤다.
“촬영 마치고 왔습니다!”
태화가 복귀하자 동영상 팀장인 유진호가 반겼다.
“오. 그래. 태화야.”
유진호는 태화를 편하게 이름으로 불렀다. 태화도 그게 편했다.
유진호는 직책이 팀장이지만 사실 대표다. 유진호는 자신을 대표라기보다는 팀장으로 불러주는 걸 원했다. 남들이 자신을 대표라고 부르면 왠지 나이 들어 보이는 느낌 때문이었다.
“수고했어.”
“팀장님도요.”
“별다른 일은 없었지?”
“네. 별일 없었습니다.”
태화는 자신이 촬영에 썼던 카메라 장비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태화야.”
“네.”
유진호가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태화는 유진호가 방금 지은 표정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보통의 경우 저런 표정은 상대방에게 짜증이 났을 때 짓는다. 하지만 유진호는 상대방에게 장난을 칠 때 저런 표정을 짓는다.
“내가 말이야 함부로 흘리지 말라고 그랬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함부로 웃고 다니지 말라고 그랬잖아.”
“…….”
“아까 어떤 여자가 찾아와서 너 연락처 좀 알 수 없냐고 물어보더라 이 말이지.”
“그래서 알려주었습니까?”
“아니. 나는 남이 잘되는 꼴은 못 본다 이 말이지. 그냥 내 번호 알려주면 안 되냐고 하니까 그냥 가버리더군.”
유진호가 여성의 말투를 흉내 내며 말했다.
“어머, 별꼴이야!”
어찌 보면 유진호의 행동은 기분 나쁜 행동일 수 있었다.
-자기가 뭔데 남의 연애 사업에 끼어드나?
하지만 태화는 유진호의 이런 행동이 전혀 밉지 않았다.
‘참 재미있는 분이야.’
태화도 장난스럽게 인상을 쓰며 말했다.
“팀장님. 그럼 앞으로 인상 쓸까요?”
“아냐. 그것도 아냐.”
태화의 모습을 본 유진호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러면 멋있잖아.”
“앞으로는 아예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겠군요.”
“아니다. 됐다. 그러다 컴플레인 들어온다.”
“그럼. 그냥 현상 유지하는 거로 하겠습니다.”
“나도 한때는 괜찮았는데 말이야.”
유진호의 말처럼 그는 남자다운 외모에 호감형이었다. 유진호는 특히 수염을 길렀는데 동양인치곤 수염이 멋있게 난 편이었다.
“팀장님은 조금 나이가 있으신 분들한테 인기 있지 않나요?”
“뭐? 나이가 있으신 분들?”
“나이가 있으신 분들이라는 말에 좀 오해의 소지가 있었습니다. 성숙하신 분들이라고 정정하겠습니다.”
“조금 성숙하신 분들이라고 해라.”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조금 성숙하신 분 중 저에게 팀장님 번호 알려달라고 하신 분이 몇 명 있었습니다만…….저도 팀장님 번호 알려드리지는 않았습니다.”
“너, 지금 나 디스하냐?”
“그건 아니고……. 아직 팀장님이 먹힌다 그런 의미였죠.”
유진호는 서른아홉 살로 한때 영화감독이 되는 꿈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현실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어느 정도 성공한 위치에 가지 않으면 영화만을 해서는 생계가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유진호는 배운 게 영화라고 영상과 관련이 없는 일을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유진호는 태화를 좋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태화가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못다 한 꿈을 이루어 주기 바라는 마음.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에 태화도 큰 무리 없이 촬영해내니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고생 많았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