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30화
심사에 아무리 공정성을 가한다지만 그 결과엔 여러 가지 변수가 많이 있다. 그래서 박도봉 감독은 이제부터 심사 결과가 좋지 않게 나왔을 때를 대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예전에 내가 만든 작품이 개봉할 때 사람들이 나한테 이번 영화 흥행할 것 같냐고 물었었지. 그때 내 대답은 자네에게 했던 대답과 똑같았네.]
[반반으로 본다고 했었나요?]
[그렇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네. 영화가 흥행이 되고 말고는 확률의 문제가 아니네. 영화 흥행 80%에 실패 20% 확률. 이런 수치가 의미가 없어. 단지 흥행에 성공하든지 아니면 실패하든지만 있을 뿐이네.]
[그렇군요. 대감독과 스타 배우가 만나서 작품을 만들어도 흥행하지 못한 경우를 종종 보니까요.]
[심사 결과도 마찬가지네.]
[통과되든가 아니면 탈락하든가. 예측이 의미가 없는 거군요.]
[예측이란 항상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네. 그래서 불확실한 것에 막연히 기대해서는 안 되네. 이제부터 자네가 취해야 할 태도는 만약 심사 결과가 좋게 나오지 않았을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네.]
[…….]
[태화 군. 다시 한번 묻겠네. 혹시라도 자네의 시나리오가 심사에서 탈락하게 된다면 어쩔 건가? 그땐 자넨 자네의 첫 번째 장편영화 제작을 포기할 건가?]
[당연히 아니죠.]
[자네가 왜 그런 생각을 한다고 생각하지?]
[어떻게든 만들고 싶으니까요.]
[바로 그거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자네의 그 의지일세.]
[저의 의지요?]
[그렇네. 심사에서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자네의 첫 장편영화를 만들겠다는 그 의지 말일세.]
태화는 박도봉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챘다.
[결국 심사에서 통과되지 못하더라도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돈을 마련하는 게 핵심이군요.]
[냉정하지만 그게 현실이니까.]
[그럼. 영감님은 왜 저예산 영화 지원 사업에 지원하라고 한 겁니까?]
[동기부여네. 자네가 그냥 막연하게 시나리오를 쓰는 것보다 그게 더 자네에게 의욕을 주는 게 사실이니까. 그리고 실제로 자넨 잘해주었네.]
[그때 틈새를 공략한다는 둥 그런 건 뭡니까?]
[난 심사에 탈락하는 걸 대비해야 한다고 했지 절대 통과되지 않는다고 안 했네. 만약 심사에 통과된다면 그건 그 틈을 파고들었기 때문일세.]
[이번엔 제가 영감님을 못 당하겠네요.]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태화는 실제로 훨씬 더 집중력을 가지고 시나리오 작업에 임할 수 있었다. 그건 저예산 영화 지원 사업에 자신의 시나리오를 제출해야 하는 것 때문이었다. 그 결과 시나리오의 완성도도 높아졌다.
[제가 <엘 마리아치> 작품을 보게 한 것도 결국 지금과 같은 상황이 생길 걸 예측하고 한 거였군요. 마음만 먹는다면 적은 예산으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저에게 준 거잖아요.]
[자네 생각대로일세. 태화 군. 기분이 나빴나? 그랬다면 사과하겠네.]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계획이 꽤 치밀했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영감님 계획은 성공입니다.]
[성공이라?]
[제 욕망에 불을 지폈으니까요.]
[허허허. 그랬는가?]
[네. 저는 어떻게든 <내 복권 내놔!>를 만들 겁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포기할 순 없습니다.]
[역시. 자네일세.]
[이젠 총알을 만들어야겠군요.]
[태화 군. 현재 제작 환경은 <엘 마리아치>가 나왔던 시기보다 저예산 영화를 제작하기 좋은 여건일세. 과거에는 필름 때문에 그 비용 부담스러웠지만, 현재는 없지 않은가.]
[네. 디지털 방식으로 전환됐으니까요. DSLR 카메라 한 대만 있으면 촬영할 수 있으니까요.]
영화 촬영에 필름을 사용하던 시기엔 필름으로 인한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필름값도 부담이지만 그에 따른 현상료와 텔레시네(초당 24프레임인 영화 필름 영상을 초당 30프레임인 비디오 신호로 전환시키는 것), 키네코(텔레시네의 반대 개념.) 같은 후반 작업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까짓거. 제가 몇 달 열심히 알바 하면 영화 제작비 나오지 않겠습니까?]
[항상 처음이 어려운 걸세. 첫 작품. 이것만 잘 넘기면 그다음은 좀 나을 걸세.]
#.
다음 날.
태화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알바 검색부터 시작했다.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 결정된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현재 가장 빨리 구할 수 있는 일은 서비스 업종. 그중에서도 카페 알바였다.
태화는 발 빠르게 행동했다. 알바를 구하는 해당 카페에 바로 전화했고 오후에 면접을 보기로 시간을 잡았다.
카페 이름은 ‘민들레’.
태화는 알바 면접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태화 군. 내가 미처 하지 못한 말이 있네.]
[뭡니까?]
[자네가 제작비를 마련하는 것 외에도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네.]
[영감님이 말하지 않아도 어떤 건지 알고 있어요.]
[그런가?]
[네. 콘티 작업하라는 거 아닙니까?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콘티는 실제 영화를 촬영할 때 이미지를 사전에 구상하는 과정으로 영화감독이 기본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영화의 스태프와 연기자는 콘티를 토대로 촬영을 준비한다. 시나리오가 영화의 설계도라면 콘티는 촬영의 설계도라고 할 수 있다.
[허허허. 점점 감독이 되어가고 있구먼.]
[미리미리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맞는 말일세.]
태화가 면접을 보기로 한 카페 ‘민들레’는 번화가 중심에서 한 블록 떨어져 있었다. 테이블은 10석 정도로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카페였다.
태화는 카페 안으로 들어가 카운터로 향했다. 카운터에는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성이 서 있었다.
“주문하시겠어요?”
“아르바이트 면접 때문에 왔습니다. 혹시 사장님 계시나요?”
“아. 그래요? 이름이?”
“서태화입니다.”
“아. 맞다. 서태화.”
“혹시 사장님이십니까?”
“맞아요.”
그때였다. 카페로 손님이 새로 들어왔다.
“저기 빈 자리에서 잠깐 기다릴래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
카페 사장이 태화가 있는 테이블로 왔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내 소개부터 하죠. 정소영이에요.”
“네.”
정소영은 이름을 밝히고 나서 아무 말 없이 태화의 얼굴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태화는 정소영의 이런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왜 그렇게 쳐다보십니까?”
“합격!”
“네?”
“뭘 그렇게 놀라요? 합격이라고요.”
“놀란 게 아니라 뭐라도 물어보셔야 하는 게 아닌가 해서요. 저한테 궁금한 거라든지.”
“태화 씨. 무슨 범죄 저질렀어요?”
“아뇨.”
“성격에 무슨 문제 있어요? 분노 조절 장애라든가?”
“아뇨.”
“그럼 됐네.”
태화는 알바를 빨리 구한 건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좀 황당했다.
“저를 좋게 봐주신 건 고맙긴 한데요.”
“왜요? 합격 취소할까요?”
“그건 아닙니다. 그래도 합격 이유라도 알았으면 하는데요.”
“이유라…….”
“제가 생각했던 면접 분위기가 아니라서요.”
다른 사람 같았으면 알바 채용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그걸로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태화는 장소영이라는 캐릭터를 보고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녀는 개성이 강했고 태화는 장소영의 생각을 알고 싶었다. 이건 태화가 그동안 계속해온 캐릭터 연구의 연장선에 있었다.
“저의 한 면만 보고 채용을 너무 쉽게 결정하신 건 아니신지.”
“쉽게?”
“아. 기분이 상하셨으면 죄송합니다.”
“나, 태화 씨 채용. 쉽게 결정한 거 아니에요. 난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마케팅 업무를 했던 사람이에요. 회사 규모는 작았지만.”
“네?”
“이 카페. 은근히 여자 손님이 많아요. 게다가 젊은 여성이요. 카페에 외모가 괜찮은 남자가 일하고 있는 거. 매출에 당연히 도움이 돼요.”
“…….”
“이 정도면 태화 씨의 합격 이유가 설명되지 않나요?”
태화는 장소연이 자신을 채용한 이유가 나름 합리적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네. 이해했습니다.”
“그럼 언제부터 근무 가능해요?”
“내일부터 가능합니다.”
“좋아요. 그럼 내일은 첫날이니까 30분 일찍 나와요. 오리엔테이션을 해야 하니까.”
“네.”
“근무 시간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후 2시부터 11시까지예요. 카페는 오후 2시 30분에 열어서 10시 30에 문 닫아요. 카페 오픈 30분 전 출근. 카페 문 닫고 이후 30분 정도는 정리 시간. 식사 한 끼 제공하고요.”
“알겠습니다.”
장소영은 자신이 전할 말을 다 하고 나서 태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잘해봐요.”
태화는 장소영이 내민 손을 맞잡았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
몇 개월 후.
태화는 카페 알바를 비교적 쉽게 적응해 나갔다. 과거 대학생 시절에 카페 알바를 해봤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태화는 카페에서 일할 때 가장 중요한 커피 머신도 어느 정도 다룰 줄 알았고 그 점이 첫날부터 빛을 발했다.
장소영도 태화의 이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태화 씨. 아주 마음에 들어.”
“저도 나름 경력자입니다.”
“오케이. 인정.”
태화가 ‘민들레’ 카페에서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성 고객의 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장소영의 예측대로였다.
새로 유입된 여성 고객은 우연히 ‘민들레’ 카페에 들렀다가 태화를 보려고 다시 찾아오는 게 대부분이었다.
퇴근 시간 무렵 한 여성이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한 달 전부터 ‘민들레’ 카페에 오기 시작했다.
“주문하시겠어요?”
“네. 아이스 라테 한 잔이요.”
“테이크아웃이신가요?”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태화는 능숙하게 아이스 라테를 만들어서 그 여성에게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태화에게서 아이스 라테를 건네받은 여성은 바로 그 자리를 뜨지 않고 태화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잠깐만요.”
“네?”
“여기 주말에는 영업 안 하죠?”
“네. 그렇습니다.”
여성이 얼굴에 살짝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럼 주말에 쉬는 거예요?”
태화는 이 여성의 말투와 표정을 보고 감이 왔다. 이 여성은 지금 태화에게 대시하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성함이?”
“권지윤이에요.”
“지윤 씨. 혹시 저한테 데이트 신청하시는 거라면 죄송합니다.”
“네?”
“오해하지 마세요. 지윤 씨가 싫어서가 아닙니다.”
태화가 권지윤에게 한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권지윤은 하얀 피부에 귀여운 외모를 지니고 있어서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근데 왜요?”
“제가 지윤 씨를 만날 시간이 없습니다.”
“시간이 없다고요?”
“네. 제가 주말엔 다른 데서 알바를 뛰거든요.”
“…….”
“제가 목돈이 좀 필요해서요.”
“목돈이요?”
태화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저예산 영화라지만 영화 제작비를 마련하는 것 자체가 목돈이다. 하지만 권지윤은 태화의 말에 쉽게 수긍하지 않은 듯했다.
권지윤은 여전히 태화가 튕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옆에서 태화와 권지윤의 모습을 지켜보던 장소영이 슬쩍 나섰다.
“저기. 손님.”
“네?”
“태화. 이 친구 주말에 따로 일한다는 거 사실이에요. 그래서 시간이 없는 것도 사실이고요.”
권지윤은 태화와 장소영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두 명 모두 자신에게 거짓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