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29화
최수빈이 태화와 송윤주의 대화에 슬쩍 끼어들었다.
“차라리 잘된 거 아닌가?”
최수빈이 이렇게 말한 건 방금 해변에서 있었던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태화는 최수빈의 발언에 순간 발끈했다.
“뭐? 잘 돼?”
“그렇잖아. 해도 안 되는 게 있는 거 아냐? 다른 길 찾는 게 나은 거 아니냐고?”
“그래. 너 말 잘했다. 넌 그렇게 연기 잘해서 어디 출연했냐?”
“뭐?”
“너 대표작이 뭔데? 눈 씻고 찾아봐도 잘 안 보이더라?”
최수빈은 몇몇 단편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지만, 그 작품들은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최수빈은 잘 알려지지도 않은 작품을 대표작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최수빈은 상업적 영화나 드라마엔 주로 단역으로 출연하고 있었다. 태화는 바로 이 사실을 가지고 최수빈에게 반격한 것이다.
“아유. 진짜 유치하게.”
“넌 할 말 없으면 유치하다고 하더라.”
“유치한 걸 유치하다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하니?”
태화와 최수빈의 싸움을 지켜보던 송윤주는 소리를 질렀다.
“그만!”
송윤주는 연기를 했던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목소리가 꽤 크게 나왔다. 송윤주의 외침에 태화와 최수빈은 입을 다물었다.
송윤주가 태화와 최수빈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야, 너희 둘 아무 말도 하지 마!”
태화와 최수빈은 입을 꼭 닫았다.
“어떻게 너희 둘은 8년 전이랑 변한 게 하나도 없냐?”
송윤주가 태화를 보며 말했다.
“태화. 먼저 말해.”
“누나. 쟤가 먼저 시비를 걸었잖아요.”
“오케이. 인정. 이번엔 수빈이가 잘못했어.”
최수빈이 살짝 토라진 말투로 말했다.
“시비는 무슨. 현실을 얘기했을 뿐인데.”
“수빈아. 그만해.”
송윤주가 최수빈을 타이르듯 말했지만, 왠지 모를 포스가 느껴졌다.
최수빈도 더는 송윤주에게 토를 달지 않았다.
“알았어요. 언니.”
“그리고 태화도 마찬가지야. 너까지 그렇게 하면 어떡하니? 싸움이 될 걸 알면서.”
“미안해요. 누나.”
송윤주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테이블의 가운데에 섰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태화와 최수빈의 손을 각각 잡았다.
“너희 둘 인제 그만 좀 으르렁대고 화해해라.”
말을 마친 송윤주는 자신의 손으로 잡은 태화와 최수빈의 손을 살며시 포갰다. 송윤주는 태화와 최수빈의 화해를 기대했지만, 실제 그 반응은 달랐다.
태화와 최수빈은 손을 포개자마자 재빨리 자신들의 손을 거둬들이며 상대방에게 한마디씩 던졌다.
최수빈이 먼저 말했다.
“이거 빨리 손 씻어야겠네.”
“손 씻는 거로 되겠냐? 알코올로 소독해야지.”
태화와 최수빈의 모습을 본 송윤주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너희 둘 답 없다. 답 없어.”
잠시 후.
태화와 최수빈 그리고 송윤주, 세 사람은 카페를 나섰다. 송윤주와 최수빈은 송윤주의 차에 올라탔다.
송윤주가 운전석의 창문을 내려 태화에게 인사를 건넸다.
“태화야. 어쨌든 반가웠다.”
“네. 누나.”
“그래.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보자. 누나한테 연락 좀 하고. 너 너무 보기 힘들어.”
“네.”
“누나 연락처 안 바뀌었다.”
송윤주는 말을 마치고 태화를 계속 바라보았다. 태화는 송윤주가 자신을 왜 그렇게 쳐다보는지 그 의미를 알았다.
송윤주가 자신의 전화번호가 태화의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있는지 확인하려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아차.’
태화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서 송윤주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이 번호 맞죠?”
송윤주는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나서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래. 내 번호 있구나.”
“그럼요.”
“기특하다. 태화야. 네 번호는 안 바뀌었지?”
“네. 누나.”
“하여튼 만나서 너무 반갑다. 다음에 볼 땐 맥주라도 한잔하자.”
“그래요. 누나.”
태화와 송윤주가 인사를 건네는 동안 최수빈은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하지만 태화는 최수빈의 태도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태화야. 누나 간다.”
“운전 조심해서 해요. 누나.”
“알았어.”
최수빈과 송윤주가 탄 차는 태화를 뒤로하고 출발했다. 태화는 두 사람이 탄 차를 바라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아무 말 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박도봉 감독이 태화에게 말을 걸었다.
[태화 군. 고생이 많았네.]
[그러게요. 좀 쉬어야겠어요.]
[아무래도 그게 좋겠네. 근데 자네는 좀 팔자가 좀 기이한 거 같네.]
[무슨 팔자요?]
[내가 볼 땐 자넨 여난이야.]
[여난이요? 그거 너무 성급한 결론 아닙니까?]
[가끔 인물이 좋아서 여자들이 꼬이기는 하는데, 그것 때문에 힘든 인생을 사는 남자가 있긴 하지. 내가 볼 땐 자네가 그렇단 말이지.]
[그런 말씀 마세요. 아직 제 인생 창창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다행이고. 허허허.]
태화는 예약해 두었던 숙소로 이동했다.
#.
저녁 시간.
숙소에서 한숨 자고 나온 태화는 맥주 한 캔을 들고 백사장에 앉았다.
[영감님. 밤바다가 운치가 있네요.]
[그렇네. 지금처럼 밤바다 보면서 술 한잔하면 그 맛이 기가 막히네. 근데 태화 군.]
[말씀하세요.]
[수빈 양을 앞으로 혹시 만나더라도 오늘처럼 반응하지 않았으면 하네.]
[왜요?]
[자네와 수빈 양은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도 있네.]
[그럴 수 있겠죠. 제가 연출 일을 하고 수빈이가 연기를 계속한다면.]
[영화감독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선 적을 만들지 않는 게 좋네. 그게 정 힘들다면 겉으로라도 싫은 내색을 하면 안 되네. 그래 줄 수 있나?]
[영감님이 한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아요. 평판에 관해서 얘기하신 거잖아요?]
[맞네. 평판은 중요하네.]
[왜 그렇죠?]
[매력으로 이어지네.]
[매력이요?]
[그렇네. 평판이 좋으면 그 사람의 호감도가 올라가네. 호감도가 올라가면 그 사람에 관해서 매력도 올라가게 되네.]
연예인이 이미지를 관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호감도가 올라가면 매력이 올라가고 인기가 상승한다. 이건 결과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준다.
[영화감독 혼자 영화를 만들 수 없네. 수많은 스태프와 연기자들의 참여로 만들어지네. 그들의 능력을 끌어올리려면 매력적인 감독이 되어야 하네.]
[매력적인 감독이라……. 좋네요. 앞으로 수빈이와 마주치더라도 공과 사는 구분할 겁니다. 오늘은 제가 좀 흥분했어요. 갑자기 벌어진 일이기도 하고요.]
[그거면 됐네. 이제 조금 안심이 되는구먼.]
[제가 오늘 본의 아니게 영감님께 걱정을 끼쳤군요.]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할 수 있네. 그래서 가르침이 필요한 거 아닌가?]
[근데 영감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뭔가?]
[영감님 사모님하고 자제분 말인데요. 묘가 어디 있습니까?]
[아내와 아들의 묘는 없네.]
[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내와 아들. 두 사람 모두 화장했네. 그리고 두 사람의 유골은 바다에 뿌렸네.]
[왜 그렇게 하셨나요?]
[내가 죽으면 아내와 아들의 묘는 누가 돌보겠는가? 두 사람은 내 가슴에 묻었네.]
박도봉 감독이 자신의 아내와 아들의 묘를 부탁할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자신이 수양딸로 삼은 이선영에게 부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박도봉 감독은 그런 일을 부탁할 사람이 아니었다.
박도봉 감독은 자신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시기에도 이선영의 도움을 받지 않았었다.
[아.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죄송합니다.]
[자네한텐 아무 잘못이 없네. 난 자네의 선의를 이해하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고향에 온 김에 그의 아내와 아들의 묘를 들르려고 했었다. 태화는 당연히 두 사람의 묘가 있을 거로 생각했었다.
이 순간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진한 슬픔이 밀려왔다. 태화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고 그 눈물이 백사장의 모래를 적셨다.
“흑흑.”
태화의 입에서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박도봉 감독은 태화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태화 군. 너무 슬퍼하지 말게.]
[정말 한 사람한테 너무 가혹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네. 하지만 난 지금 슬프지 않네.]
[왜요?]
[자네가 있기 때문일세. 자네가 성장하는 모습은 내 기쁨이기도 하네.]
[고마워요. 영감님.]
[자. 그만 울고 인제 해변의 낭만을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크크크. 그놈의 낭만. 낭만이 뭐 별겁니까? 이렇게 해변에서 파도 소리 들으면서 우는 것도 낭만 아닙니까?]
[허허허. 자네 말을 들으니 그런 것도 같구먼.]
점점 더 깊어가는 저녁. 주문진 해변에서 태화와 박도봉 감독은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더해가고 있었다.
#.
며칠 후.
태화는 강릉에 다녀온 후에 며칠간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 이 기간에 박도봉 감독도 태화에게 영화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태화는 잠자리에 들기 위해서 침대에 누웠다.
[영감님. 저한테 무슨 할 말이 있지 않아요?]
[그걸 어떻게 알았나?]
[그냥 느낌으로요. 영감님 요즘 영화 이야기는 하지 않았잖아요. 조만간 무슨 말을 할 것 같았습니다.]
[자네 느낌이 맞네. 이 시점에서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네.]
[그게 뭡니까?]
[어쨌든 저예산 영화 지원 사업 1차 심사 통과 발표까지는 기간이 좀 있네. 공백기가 있는 거지. 그래서 말인데 태화 군.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정확하게 뭘 해야 할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내 경험으로 볼 때 이번에 생긴 공백기를 잘 활용해야 하네.]
[영감님 경험상 이 공백기의 의미는 뭡니까?]
[사람의 인생에서 특정 시기의 몇 달은 그냥 몇 달이 아니라 몇 년의 의미가 있을 수도 있네. 난 이번에 생긴 공백기가 그런 의미가 있다고 보네.]
[그만큼 중요한 시기라는 말이군요. 그럼 어떻게 활용해야 하죠?]
[이번 공백기는 저예산 영화 지원 사업 발표 이후를 준비하는 시간이 되어야 하네.]
[이후를 준비하는 시간이라.]
[태화 군. 결과가 나오고 나서 뭔가를 해서는 안 되네.]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군요.]
[그렇네.]
[그럼. 영감님은 어떻게 예측하고 계십니까? 심사에 통과된다고 판단하십니까?]
[통과 아니면 탈락. 난 그냥 반반으로 보고 있네.]
[그게 뭡니까? 그냥 모르겠다는 말 아닙니까?]
[허허. 태화 군. 나는 점쟁이가 아닐세. 자네에게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자네가 제출했던 시나리오가 만약 심사에서 탈락한다면 자넨 어떻게 할 텐가?]
태화는 순간 침대에서 벌떡 일어섰다.
[영감님. 그래도 벌써 심사에 탈락할 걸 가정하는 건.]
태화는 순간 당황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태화는 자신이 제출한 시나리오가 탈락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태화는 현재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막연히 잘될 거라는 생각.
태화가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그만큼 자신이 고생했고 그에 대한 반대급부가 있을 거란 기대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박도봉 감독은 태화의 이런 심리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야. 태화 군은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태화 군의 이런 기대감을 빨리 끊어 내야 한다.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고 시간을 보내다가 심사에서 탈락했을 땐……. 자칫 심한 내상을 입을 수도 있다.’
박도봉 감독이 보기에도 태화의 시나리오는 괜찮았다. 하지만 박도봉 감독은 심사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확신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