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28화
태화가 재빨리 진화에 나섰다.
“아닙니다. 선배님. 단지 의견 교환을 했을 뿐입니다.”
박기영이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태화와 최수빈을 쳐다보았다. 분위기를 눈치챈 최수빈은 내키지는 않았지만, 태화와 분위기를 맞추기로 했다.
여기서 분위기가 더 나빠지면 촬영장은 완전히 콩가루가 된다.
“맞아요. 오빠. 우리 둘이 싸운 거 아니에요. 의견 교환한 거예요.”
박기영도 더는 캐묻지 않기로 했다. 현실적으로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아오. 진짜. 내가 참아야지.’
어떻게든 빨리 촬영을 진행해야 했다.
“알았어.”
순간 태화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잠시 후.
촬영장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수습이 되었다. 그러자 박기영이 다시 스태프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 다 잊자. 지금부터 새로 시작하자. 알았지?”
“네!”
“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으니 빨리 가자. 조금만 힘내자.”
“알겠습니다!”
박기영이 스태프들에게 말하는 사이 촬영감독을 맡은 이한철이 태화에게 다가왔다.
이한철은 학부 내에서 촬영 실력은 최고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이한철이 이 작품에 참여한 것도 박기영이 삼고초려를 했기 때문이었다.
“서태화!”
“네. 선배님.”
대답한 태화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한철은 태화의 이런 모습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서태화, 너 카메라가 무서우냐?”
“네? 그게 무슨…….”
“굳이 부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다 봤으니까.”
이한철은 촬영 때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통해서 태화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었다. 그리고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태화가 볼 때 넌 카메라 울렁증이다.”
이한철의 말에 태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말입니까?”
“너도 잘 몰랐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난 네가 고의로 숨겼다고 생각하지 않아. 갑자기 어느 순간에 발현될 수도 있는 거니까.”
태화는 이한철의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맞아. 그렇다면 설명이 된다. 오늘 내가 했던 행동들이…….’
태화 순간 눈물이 나올 뻔했다. 지금 이 촬영 현장에서 유일하게 태화의 심정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이한철이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너, 책임감 있는 놈이지?”
“네?”
“어쨌든 네가 사고를 쳐서 지금 이런 거잖아. 안 그래?”
“맞습니다.”
“그럼. 책임진다고 생각하고 뭐든 할 수 있지?”
지금 태화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네. 뭐든지……. 하겠습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이한철이 태화의 어깨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런 정신이면 됐다.”
이한철은 태화를 박기영에게 데리고 갔다. 박기영이 태화를 보며 말했다.
“태화, 너 대사 치지 말고 시늉만 해!”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너, 이 새끼 짜증 나게 말대꾸할래!”
“…….”
“그냥 시키는 대로 해! 너 때문에 아주 돌아버리기 직전이니까!”
#.
드디어 박기영의 힘찬 외침과 함께 중단되었던 촬영이 재개되었다.
“레디, 액션!”
몇 초간의 적막감이 흐른 뒤 고개를 숙이고 감정을 잡던 최수빈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화가 난 표정으로 태화를 쳐다보았다.
-오빠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내가 그 계집애 싫어하는 거 알면서도 어떻게 걔랑 웃으면서 이야길 할 수 있는 거지?”
대사를 마친 수빈이 눈을 감았다. 그러자 눈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앞서 두 번의 NG로 수빈의 얼굴이 약간 초췌해졌는데 오히려 이게 감정적으로는 더 좋았다.
연기를 지켜보는 박기영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좋았어.’
이제 카메라가 서서히 움직여 태화에게로 옮겨갔다. 태화의 얼굴에서 카메라의 움직임이 멈춰졌다. 비장한 표정의 태화가 입을 열었다.
“…….”
정상적이라면 태화의 입에서 이 대사가 튀어나와야 했다.
-너의 그 집착이 날 힘들게 해.
하지만 태화 붕어처럼 단지 입만 뻐끔거리기만 할 뿐 실제로 목소리가 내지 않았다. 순간 스태프 대부분은 민망함에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대사 립싱크였다.
이한철은 태화의 카메라 울렁증을 눈치챘고 박기영에게 그 대안으로 립싱크를 제안했다.
태화는 대사 립싱크를 하면서도 쪽팔림에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태화가 무엇보다 참기 힘들었던 건 상대역이었던 최수빈의 눈빛이었다.
최수빈 그녀는 태화를 냉소적인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빛으로 그 의미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내가 왜 너랑 엮여서 이 고생을 해야 해!
태화는 어떻게든 다시 제대로 대사를 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짓밟힌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다. 하지만 태화의 이런 속마음은 박기영에 의해 여지없이 깨졌다.
“오케이! 컷! 좋았어. 더는 안 나와. 다음!”
박기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현장 스태프들의 환호성과 박수가 터졌다.
“와~우!”
짝짝짝.
스태프들이 기뻐하는 모습은 마치 크랭크업(촬영 종료)하는 모습 같았다.
#.
박도봉 감독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태화 군. 지금 이 상황이 뭔가? 자네 앞에 있는 여성과 아는 사이 같은데?]
[해변의 낭만이고 뭐고 망한 겁니다.]
[망해? 그게 무슨 소리인가?]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자. 저하고 악연입니다.]
[뭐라?]
태화는 이 순간 할 수 있다면 시간을 오 분 전으로 돌리고 싶었다.
“최수빈. 네가 왜 여기 있냐?”
태화는 자신이 말한 걸 증명이라도 하듯 말투에 날이 서 있었다.
“여기 왜 있긴? 너한테 허락받고 와야 하니? 여기가 다 네 땅이냐?”
“아. 망했어. 내 해변의 낭만…….”
“뭐, 망해? 서태화! 그건 내가 할 소리야!”
“아. 몰라.”
말을 마친 태화는 최수빈에게서 등을 돌렸다. 태화의 모습을 본 최수빈은 오기가 발동했다.
“야. 너!”
최수빈은 태화를 돌려세웠다.
“너 지금 나한테 작업 걸려고 했었지?”
“내가 미쳤냐? 너한테 작업은 무슨 작업!”
“너 방금 작업 걸려고 했던 거 맞잖아! 혼자 왔냐고 물어보고 느끼하게 웃고 그랬잖아!”
“뭐? 느끼하게 웃어? 너 말 함부로 하지 마!”
최수빈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넌 그게 느끼하지 않고 멋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왜? 다들 깜빡 죽던데? 너만 빼고.”
“아오. 유치해서 정말.”
말을 마친 최수빈은 손으로 자신의 두 귀를 막았다. 이번에 최수빈의 행동을 본 태화의 오기가 발동했다.
‘아유. 저게 진짜. 귀를 막아?’
태화는 귀를 막고 있는 최수빈의 손을 당겼다.
“야! 이거 안 놔!”
최수빈은 저항했지만 남자인 태화를 힘으로 이길 수는 없었다.
“최수빈. 말은 똑바로 하자. 내가 너라는 걸 알았으면 작업했겠니? 그리고 너, 내가 말 걸어주니까 속으로 좋았지? 아니야?”
“좋다 말았다. 왜?”
“그러니까 좋았다는 거 아냐?”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뭐, 어이가 없어?”
“너 그거 아니?”
“뭘?”
“좋다가 만 게 더 기분이 거지 같은 거.”
“그렇게 따지면 나도 마찬가지다! 아까 내 표정 변화 못 봤어?”
“표정 변화?”
“나 미소 짓다가 완전히 썩은 표정으로 바뀌었잖아. 기분 거지 같아서.”
보통 이 정도 말이 나갔으면 말문이 막히거나 싸움을 피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최수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너야말로 내 표정 못 봤구나. 나 완전 썩은 표정이었는데.”
말을 마친 최수빈은 태화에게 자신이 말한 표정을 지어 보이려 했다.
“내가 너 썩은 표정을 왜 보냐?”
“뭐?”
태화는 말을 마치자마자 최수빈에게서 몸을 돌렸다. 최수빈은 태화의 행동에 약이 올랐다.
“야. 서태화! 고개 돌려! 야!”
“내가 미쳤냐? 네 썩은 표정 보려고 고개를 돌리게.”
태화는 이제 최수빈과의 이 싸움도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빈이. 쟤하고 말 섞어 봐야 좋을 게 없다. 피곤하기만 할 뿐이지.’
태화는 여전히 몸을 최수빈에게서 돌린 채 말했다.
“그냥 네 갈 길가라. 나 여기서 만난 거 기억에서 지우고……. 나도 그렇게 할 거니까.”
태화의 발언 후 최수빈에게서 말이 없었다. 태화는 자신의 말대로 최수빈이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 그게 최선이다.’
태화가 현재 자리를 떠나기 위해서 한 걸음 뗀 순간이었다.
“너 지금 연기 연습하니?”
태화는 순간 짜증이 확 올라왔다. 목소리가 분명 최수빈과 달랐지만, 태화는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이 진짜!”
말을 마친 태화는 최수진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태화는 최수진 외에 한 명이 더 있는 걸 발견했다.
“윤주 누나?”
송윤주. 태화의 학부 선배로 2년 선배다. 송윤주는 짧은 커트 머리에 중성적인 외모가 매력인 여성이다. 송윤주는 학부 시절 중성적인 외모 때문에 남자 후배뿐 아니라 여자 후배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송윤주는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녀는 학부에서 연기를 전공했지만, 졸업 후 연기자로 진출하지 않고 메이크업 분야로 진출했다.
“태화야. 너 좀 간만이다.”
“누나가 여기 웬일로?”
태화는 최수빈과 송윤주를 번갈아 보았다.
“혹시 둘이 같이 온 거예요?”
“응. 뭐가 잘못됐어?”
“아뇨. 그런 거 없어요.”
태화는 이제야 최수빈과 송윤주가 친한 사이였다는 게 기억났다. 어쨌든 태화는 이 자리를 빨리 뜨고 싶었다.
“누나. 그럼 잘 놀다 가세요.”
“잠깐. 태화야. 오랜만에 만났는데 커피라도 한잔해야지.”
“하하. 커피는 둘이 마시는 게.”
“바쁘니?”
“네?”
여태까지 태화와 송윤주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최수빈이 슬쩍 입을 열었다.
“해변의 낭만을 만드느라 바쁜 모양이네.”
최수빈의 말을 송윤주가 받았다.
“뭐? 해변의 낭만? 태화야, 너 바쁘다는 게 혹시 여자 꼬시러 가야 해서야?”
송윤주는 ‘여자 꼬시러’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아이 누나. 해변의 낭만이 그것만 있겠어요? 파란 하늘도 있고 넓은 백사장도 있고.”
“태화야. 내 말이 그 말이야. 오랜만에 만난 여자 선배하고 커피 마시는 거 낭만적이지 않니?”
“…….”
“난 널 만나서 반가운데 넌 그렇지 않은가 보네?”
송윤주의 말투에는 살짝 날이 서 있었다. 태화도 더는 송윤주의 청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럴 리가요. 누나 빨리 커피 마시러 가요.”
#.
태화와 최수빈 그리고 송윤주는 해변과 바로 맞닿아 있는 카페로 이동했다.
세 사람은 각자 주문한 커피를 들고서 야외 테라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최수빈과 송윤주가 같은 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그 건너편에 태화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리를 잡고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태화와 최수빈이 서로 대화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윤주가 피식 웃더니 태화에게 말을 걸었다.
“태화야. 네 얘기 좀 해봐. 너 아직 연기하니?”
“이제 안 해요.”
태화의 대답에 송윤주가 살짝 놀란 듯 되물었다.
“안 해?”
송윤주는 태화의 연기에 관한 열정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태화의 대답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요즘 뭐 하면서 지내니?”
태화는 영화감독을 하려 한다는 사실을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지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