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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27화 (27/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27화

태화가 쳐야 할 대사는 간단했다.

-(차분한 톤으로) 너의 그 집착이 날 힘들게 해.

태화가 대사를 치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태화의 시선에 시뻘건 불빛이 들어왔다.

바로 카메라가 녹화될 때 나오는 빨간색 레코딩 불빛.

그 순간 태화는 생각했다.

‘저 빨간 불빛은 마치 악마의 눈 같다. 나를 잡아먹을 것 같은…….’

그 빨간 불빛을 본 태화는 불안감에 시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화는 점점 마치 블랙홀에 빨려들 듯 불안감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태화는 대사를 치기 전 크게 한숨을 쉬었다.

“휴~”

다시 한번 긴장을 풀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효과도 나쁘지 않았다.

‘그나마 이게 입술에 침을 바르는 것보다는 조금 낫다.’

태화가 한숨을 쉬는 건 시나리오의 지문 상 표현되지 않았지만, 연기의 감정선 상 맞을 수도 있었다.

이건 전혀 의도하지 않을 결과였다.

태화의 이 행동을 본 감독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좋아. 나쁘지 않아.’

긴장감 속에 태화가 대사를 치기 시작했다.

-너의 그 집착이…….

여기까지는 좋았다. 태화도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운이든 뭐든 좋다. 일단 시작은 좋다. 이대로 끌고 가자.’

태화는 신중하게 다음에 이어지는 대사를 쳤다.

“날 힘들게 혀.”

태화의 대사는 마지막 순간 입에서 씹혔다.

‘이런 제길……. 힘들게 혀라니…….’

만약 지금 대사가 씹히지 않았다면?

태화의 인생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태화의 대사가 끝나자 연기를 지켜보던 감독이 큰소리로 외쳤다.

“컷! NG!”

감독이 NG를 외치자 카메라 감독이 재빨리 카메라의 레코딩 버튼을 껐다.

이와 함께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연기를 지켜보던 현장 스태프들도 맥이 풀리듯 동시에 한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휴…….”

스태프들의 한숨 소리에 뒤이어 감독이 분노의 일갈을 터뜨렸다.

“야. 서태화! 너 대사 한번 구수하다. 힘들게 혀? 지금 농촌 멜로 찍냐?”

감독의 말에 촬영 현장에 있던 스태프들에게서 웃음이 하나둘씩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큭.”

“풋.”

#.

감독.

이름 박기영.

서천대학교 연극 영화학부 4학년. 졸업학점 3점이 부족해 9학기째. 실질적 5학년.

박기영의 외모는 독특했다. 170㎝를 살짝 넘기는 키에 약간 통통한 몸매.

머리는 장발로 길러서 뒤로 묶었고 콧수염을 길렀다.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덕후의 모습이기도 했다.

웃음소리가 터지자 박기영이 매서운 눈초리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일부 스태프는 계속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막기 위해서 자신의 손으로 팔을 꼬집었다.

-이 상황에선 무조건 참아야 한다!

이 모습을 본 박기영이 매섭게 스태프들을 노려보았다.

“이 자식들이!”

박기영의 매서운 눈초리에 스태프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박기영은 화가 났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당장 시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야, 서태화!”

“네. 선배님.”

태화는 대답하고 나서 박기영 앞으로 갔다. 박기영이 태화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너 똑바로 해라?”

“알겠습니다.”

“대답만 하지 말고 잘하란 말이야!”

“알겠습니다.”

박기영은 태화를 호되게 야단쳤다. 그러고 나서 최수빈에게 고개를 돌렸다.

박기영의 말투와 태도는 태화를 대할 때와는 180도 달라졌다.

“수빈아, 준비하자.”

“네. 오빠.”

그 모습을 본 태화는 짜증이 났다.

‘저럴 거면 영화를 찍지 말고 차라리 연애하지?’

#.

2차 시도

“레디, 액션!”

박기영의 외침이 떨어지자 최수빈의 연기가 이어졌다.

-오빠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내가 그 계집애 싫어하는 거 알면서도 어떻게 걔랑 웃으면서 이야길 할 수 있는 거지?

최수빈은 자신이 맡은 대사를 훌륭하게 처리했다. 최수빈의 연기를 지켜본 박기영은 앞서 했던 연기보다 만족스러웠다.

‘좋았어. 수빈이의 눈물 연기가 더 자연스러워.’

이제 태화가 연기할 차례였다.

태화의 긴장감은 앞서 실패 때문에 더 배가된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태화의 표정은 더 굳어 있었다.

태화의 연기를 지켜보던 한재영은 순간 소리를 지를 뻔했다.

“헉! 읍…….”

한재영은 연출부 스태프로 참여한 상태다.

‘큰일 났다. 저 녀석 더 긴장했어.’

태화는 크게 한숨을 쉬고 나서 태화의 대사를 내뱉었다.

-너의 그

긴장한 태화는 침을 살짝 삼켰다.

꿀꺽.

여기까지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바로 다음에 터졌다.

-접착이…….

태화의 대사를 들은 박기영이 소리쳤다.

“NG, 아오, 시발!”

박기영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욕이 바로 터졌다.

“서태화, 너 이 새끼! 나 물 먹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박기영은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를 집어 들었다. 당장에라도 태화에게 던질 기세였다.

“접속을 접촉이라고 하는 건 들어봤어도 집착을 접착이라고 하는 놈은 네놈이 처음이다!”

접속을 접촉이라고 한 말에 스태프들은 일제히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웃음을 참기 위해서였다.

이는 한때 한국 영화의 풍토와 관련이 있었다. 흥행 영화가 있으면 에로영화에서 그 제목만 패러디 비슷하게 따왔던 시절이 있었다.

<접속>을 <접촉>으로 <나쁜 영화>를 <저질 영화>로 바꾸는 식이었다.

분위기는 심각한데 박기영이 내뱉는 말들은 웃음 폭탄 그 자체였다. 현재 스태프들의 머릿속은 참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여기서 절대 웃으면 안 된다. 웃는 순간 뭐 된다.

박기영은 스태프들의 이런 반응에 더 화가 났다. 불난 데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이 새끼들이 진짜!”

그때였다. 조감독 김한솔이 재빨리 박기영의 몸을 잡았다.

김한솔은 3학년으로 애초에 이 작품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었다.

바로 박기영 때문이었다.

박기영은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다. 김한솔도 다른 작품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이미 다른 곳은 인원이 다 찬 상태였다.

“안 돼요! 선배!”

“이거 안 놔!”

키는 김한솔이 좀 더 컸지만, 몸무게는 박기영이 더 나갔다. 박기영은 마치 화가 잔뜩 난 멧돼지 같았다.

김한솔은 힘에 부치자 재빨리 스태프들에게 소리쳤다.

“야! 빨리 안 와!”

몇 명의 스태프가 박기영에게 달라붙자 그제야 박기영을 상대할 수 있었다.

김한솔과 스태프들은 화가 난 박기영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

태화는 촬영장 한쪽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러지? 아무리 긴장을 한다고 해도 오늘은 유달리 심하잖아.’

특히 태화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카메라의 빨간 불빛이었다.

‘단순한 긴장감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카메라의 빨간 불빛이 마치 괴물의 눈 같았어.’

그때였다.

태화는 태화에게 다가오는 하이힐 소리를 들었다.

또각또각.

굳이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지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최수빈, 저게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탁.

발걸음 소리가 멈췄다.

“사람이 왔으면 아는 척 좀 하지?”

태화가 고개를 들자 최수빈이 팔짱을 끼고서 도도하게 태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잘 좀 하지?”

최수빈 그녀의 말투는 비아냥거리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최수빈의 이 말투 때문에 시비라도 걸었을 것이다.

-너, 말 다 했어!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 내가 죄인이다.’

태화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래……. 미안하다.”

“그런 건 필요 없고 잘하라고.”

“뭐?”

태화의 사과에도 최수빈은 냉랭하게 대답했다.

최수빈이 이처럼 태화에게 냉랭하게 대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학년 초 최수빈은 태화에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했었다.

태화는 남자 동기 중에 가장 빼어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더욱 정확하게 말한다면, 동기들뿐 아니라 학교 전체를 통틀어서 제일 빼어났다는 게 맞았다.

최수빈도 자신이 여자 동기 중에서 자신의 외모가 제일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이 부분은 의견이 갈릴 수 있지만…….

이 때문에 최수빈은 자신이 나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태화야. 네가 나와 사귄다면 캠퍼스 최고의 비주얼 커플이 되지 않을까?

최수빈은 마음속으로 결심이 서자 망설이지 않고 나에게 바로 돌직구를 날렸었다.

“태화야. 나 너 좋아해…….”

최수빈의 고백에 태화 한동안 최수빈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그래?”

태화의 말에 최수빈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응.”

대답한 최수빈은 나의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했다.

‘태화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나쁘지 않았어.’

하지만 최수빈의 기대와 달리 태화의 대답은 너무나 차가웠다.

“난 너한테 관심 없는데?”

“뭐. 뭐라고?”

태화의 대답에 최수빈은 그 당시 자존심이 완전히 구겨졌다. 이때 이후로 나와 최수빈은 껄끄러운 사이가 되었다.

태화는 최수빈이 지금 자신에게 냉랭하게 구는 태도는 그때의 감정이 남아 있어서 그런 거라고 판단했다.

“너 지금 나한테 복수하는 거냐?”

태화의 말을 들은 최수빈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너 아주 착각도 자유다.”

“뭐, 이게 진짜!”

태화가 소리치자 촬영장에 남아 있던 스태프들의 시선이 우리 두 사람에게 쏠렸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 행동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지켜보자는 의미였다.

방금까지 박기영 때문에 스태프들은 지친 상태였다.

-설마……. 1학년이 정말 싸우기야 하겠어? 이렇게 선배들이 있는데?

하지만 이 기대는 불과 1초 만에 깨졌다.

최수빈이 태화를 향해 소리쳤다.

“너, 우는 연기가 얼마나 힘 빠지는 줄 알아? 한 번 할 때마다 진이 다 빠진다고!”

“뭐?”

“너의 그 어이없이 대사 치는 실력에 죽겠다고! 내가!”

최수빈은 특히 ‘어이없이 대사 치는’ 부분을 힘주어 말했다. 다분히 의도가 있는 발언이었다. 최수빈의 말을 들은 태화는 순간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너 그렇게 말 함부로 할 거야!”

“뭐가 함부로? 사실이잖아!”

태화와 최수빈의 감정이 격해지자 스태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움직인 건 동기 한재영이었다.

한재영이 먼저 움직인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이 상황에서도 선배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선배 중 누군가가 한재영의 몸을 툭 하고 쳤다. 한재영 네가 가보라는 의미였다.

한재영은 재빨리 태화와 최수빈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해라. 가뜩이나 분위기도 안 좋은데…….”

하지만 태화와 최수빈은 한재영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전히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대고 있었다.

그때였다.

잠시 촬영장 밖으로 나갔던 박기영과 김한솔 그리고 촬영을 맡은 이한철이 돌아왔다. 그러자 바닥에 싸움 구경하듯이 앉아 있던 스태프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

박기영은 촬영장으로 다시 복귀했을 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박기영이 태화와 최수빈을 보며 말했다.

“뭐야? 거기 두 사람.”

“…….”

“혹시 나 없을 때 싸운 거냐?”

“…….”

“이것들이 진짜!”

박기영은 순간 간신히 진정했던 화가 솟구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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