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26화
태화는 계단을 다 올라가자마자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영감님. 의외로 힘드네요.]
[수고했네. 저기 등대 쪽으로 가세.]
태화는 주문진 등대가 있는 곳에 도착하자 반사적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우!]
주문진 등대가 있는 곳에서 내려다본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파란 하늘과 그 색을 그대로 닮은 파란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영감님. 정말 멋있네요.]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네. 눈에 넣어두게.]
[눈에 넣어두는 정도가 아니라 가슴에 새겨야겠어요.]
[좋은 생각일세. 멋진 풍경은 영화감독에게 많은 영감을 주네.]
[기왕 여기에 왔으니 영감님 어린 시절 이야기 좀 해보세요.]
[어린 시절이라…….]
박도봉 감독은 운만 떼고 잠깐 말이 없었다. 하지만 태화는 박도봉 감독을 재촉하지 않았다.
대신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표정을 상상해 보았다.
‘아마도 살짝 미소를 짓고 있지 않을까? 나도 그렇지만 어린 시절은 그런 거니까.’
잠시 후, 박도봉 감독이 입을 열었다.
[어린 시절에 난 여기서 재밌는 상상을 했었네.]
[어떤 상상이요?]
[나는 여기서 밤바다를 보며 어두운 바다가 마치 스크린 같다고 상상했었네. 그땐 달빛이 마치 영사기의 불빛 같았네.]
[영감님. 참 당돌했었네요. 어떻게 그런 상상을 했었나요?]
[어느 날인가 어머니를 따라 시내에 갔다가 극장에 갔었네. 그때 경험한 극장은 어린 나로서는 엄청난 충격이었네. 영화가 커다란 스크린에 영사되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네.]
[그럼 그때부터 영화 키드가 된 겁니까?]
[그건 아니네. 그땐 영화가 신기했을 뿐이었네. 마냥 영화를 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지.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았던 집안 형편상 극장을 자주 갈 수는 없었으니까. 내가 영화를 업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한 건 내 인생에 아주 중요한 사람을 만났기 때문일세.]
[중요한 사람이요?]
[그렇네. 내가 영화 일을 꿈꾸게 해준 사람일세.]
[누굽니까?]
[한종도라는 분이네. 나는 영화를 좋아했지만, 집안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네. 돈을 내고 극장에서 영화를 볼 수 없었던 거지. 영화는 보고 싶은데 돈은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뻔했네.]
[몰래 들어가는 거 아닙니까?]
[그렇네. 하지만 매번 실패했네. 그날도 난 영화관에 들어가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나서 낙담에 빠졌었지. 그때 그분을 만난 거네.]
[영감님한테 구세주 같은 분이셨겠군요.]
[그렇네. 그분은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말했네.]
-너구나. 영화 공짜로 보려고 매번 시도하다 쫓겨나는 녀석이.
[그리고 그분은 나를 데리고 어디론가 데려갔네.]
[어디로 간 겁니까?]
[극장 영사실이네. 그분이 영사 기사였거든.]
[이거 완전 <시네마 천국> 아닙니까? 토토와 알프레도.]
[누군가에겐 영화 속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 걸세. 나도 그 영화 보고서 눈물을 많이 흘렸었네.]
#.
태화는 주문진 등대 마을을 내려와 다시 주문진 해변으로 향했다. 주문진 해변은 주문진 등대에서 도보로 삼십여 분 정도 걸린다.
태화는 주문진 해변에 도착하자 아름다운 백사장이 우선 눈에 띄었다.
[영감님. 멋지군요.]
[강릉에 많은 해변이 있지만 난 주문진 해변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네.]
[영감님이 살았던 곳이라 그렇습니까?]
[아닐세. 이곳은 경치도 아름답지만, 백사장의 모래가 아주 좋네. 한 번 맨발로 밟아보게.]
[그러죠.]
태화는 신발과 양말을 벗고서 주문진 백사장을 밟았다. 그러자 발바닥을 타고 짜릿한 감각이 전해졌다.
[아. 시원하다.]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 들지 않은가?]
[그러네요. 시원하면서도 짜릿한 게 피로가 풀립니다.]
태화는 백사장 모래를 밟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발바닥이 간지러워요. 영감님 말대로 정말 모래가 좋네요.]
[주문진 해변의 모래는 곱기로 유명하네.]
태화는 한동안 백사장을 걷다가 자리에 털썩 앉았다. 모래는 푹신했다.
자리에 앉은 태화는 손가락으로 프레임을 만들어 주문진 해변을 쭉 훑었다.
[영감님. 나중에 바다를 소재로 영화를 한번 만들어 봐야겠어요.]
[좋은 생각일세. 아직 한국 영화에선 흥행에 성공한 해양 영화가 없네.]
[만약 제가 성공한 해양 영화를 만든다면 역사가 되겠군요.]
[그렇게 되겠지. 자네가 가는 길이 역사가 될 수 있는 걸세.]
주문진 해변의 아름다운 풍경이 태화의 시각을 만족시켰다면 백사장에서 노는 사람들의 소리는 태화의 귀를 즐겁게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연인, 친구,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해변에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만약 사람들이 많았다면 소음이었겠지만 오늘은 평일이라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노는 소리가 청량하게 들렸다.
태화는 자신이 메고 온 백팩을 베개 삼아 백사장에 누웠다. 따가운 햇빛 때문에 태화는 눈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태화는 자신이 쓰고 온 모자로 시야를 슬쩍 가렸다. 그러자 따가운 햇빛도 태화가 해변의 여유를 즐기는 데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태화 군. 이렇게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니 현역 때 생각이 나는구먼.]
[현역 때요?]
[그렇네. 난 항상 촬영 전 스태프들과 이곳으로 M.T를 왔었네. 백사장에 쭉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였었네.]
[안주는 어떻게 했습니까?]
[안주는 주문진항에서 회를 사 와서 해결했네.]
[백사장, 술, 그리고 회라……. 정말 낭만의 끝판이었겠군요.]
[그랬네. 때때로 스태프 중 남녀가 M.T 중에 눈이 맞기도 했네. 나중에 촬영장에서 낌새가 이상하다 싶어서 물어보면 사귀고 있더군. 허허허.]
[사랑의 해변이군요.]
[꼭 남녀 간의 역사가 꼭 어두컴컴한 클럽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세.]
[크크크. 그렇네요.]
[어떤가? 자네도 오늘 한번 낭만을 만들어 보겠는가? 아까 보니까 커플로 오지 않은 사람도 꽤 있던데 말일세.]
[그 말 책임질 수 있으세요? 저 한다면 합니다.]
[내가 굳이 책임질 일이 있는가? 나는 자네가 연애 때문에 할 일을 못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네.]
[낭만을 만들라는 겁니까 만들지 말라는 겁니까?]
[다 자네 하기 달린 거 아니겠는가?]
[영감님. 콜!]
태화는 헌팅을 하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난 후 옷에 묻은 모래를 털어냈다. 그런 후 태화는 헌팅 상대를 찾기 위해 자신의 시야를 풀로 가동한 채 해변을 탐색했다.
‘오케이. 저기다.’
태화는 상대를 발견하고 나서 바로 움직였다.
[태화 군. 상대를 발견한 모양일세. 누군가?]
[저기 모자챙이 큰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이요.]
[제대로 골랐네. 마침 혼자 온 모양이구먼.]
태화가 지목한 여성은 하늘색 원피스에 작은 백팩을 등에 메고 있었는데 패션 감각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태화가 지목한 여성은 태화를 등진 채 걷고 있었고 태화는 조심스럽게 여성의 뒤를 따라갔다.
태화는 그 여성에게 다가갈수록 자신도 모르게 설레는 감정이 올라왔다.
‘하하. 이거 은근히 떨리네. 해변이라는 낭만적인 공간 때문인가?’
태화의 이런 생각은 조금 전 박도봉 감독이 해변의 낭만에 대해서 말하면서 한껏 분위기를 올려놓은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태화는 조심스럽게 여성의 뒤로 갔다. 그리고 태화는 자신의 손으로 여성의 어깨를 살짝 툭 치며 말을 걸었다.
“저기…….”
태화는 여성이 뒤돌아보기 직전 얼굴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태화가 이렇게 미소를 지은 건 자신의 미소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태화의 이 미소를 마성의 미소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만큼 태화의 미소는 매력적이었다.
‘지금껏 내 미소가 싫다고 한 여자는 못 봤으니까.’
짧은 시간 태화는 한껏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여성이 고개를 돌려 태화를 보았다.
“혼자 왔나 봐…….”
태화는 자신이 하려던 말을 다 끝맺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지었던 미소마저 바로 거둬들였다.
“최수빈?”
“서태화?”
태화는 허탈함을 넘어서 화가 났다. 자신이 해변의 낭만을 함께 할 사람이라고 지목했던 상대가 하필 최수빈이라니.
이건 태화에게 해변의 낭만이 아니라 해변의 악몽이었다.
태화와 최수빈. 이 두 사람의 악연은 8년 전으로 거슬러 간다.
#.
진지한 분위기의 영화 촬영장, 카페.
“조명!”
감독의 외침에 촬영장의 조명이 일제히 켜졌다.
텅. 텅. 텅.
“카메라!”
카메라 감독이 감독의 외침에 녹화 버튼을 누르며 소리쳤다.
“롤!”
이어서 여자 스크립터가 슬레이트를(일명 딱딱이)가지고 카메라 앞에 선다.
“씬 3에 하나!”
탁!
슬레이트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자 감독이 큰소리로 외쳤다.
“레디. 액션!”
감독의 외침에 촬영장은 깊은 적막감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적막감은 긴장감을 불러왔다.
꿀꺽.
누군가가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얼마나 고요했는지 침 넘어가는 소리가 다 들릴 정도였다. 침을 삼킨 사람은 신입생으로 실제 촬영장은 오늘 처음이었다.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침을 삼킨 신입생에게로 향했다.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야, 너 분위기 파악 못 해!
침을 삼켰던 신입생은 재빨리 시선을 내리깔며 자신의 손으로 입을 막았다.
“흡…….”
공기마저 긴장한 바로 그 순간……. 화면에 여주(여자 주인공)의 얼굴이 잡혔다.
여자 주인공.
이름 최수빈.
서천대학교 연극 영화학부 1학년
인상 전형적인 미인상이 아닌 고양이상에 새침한 느낌.
최수빈이 먼저 대사를 치는 장면이다.
-오빠가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내가 그 계집애 싫어하는 거 알면서도 어떻게 걔랑 웃으면서 이야길 할 수 있는 거지?
최수빈은 감정이 실린 대사를 무난하게 소화했다. 이어서 그녀는 자신의 울분을 표현하기 위해서 두 눈을 감았다.
주르륵…….
최수빈의 감은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최수빈의 연기를 지켜본 감독은 모니터를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감정 좋고! 이대로만 가자.’
최수빈의 대사가 끝내자 카메라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면에 남주(남자 주인공)의 모습이 잡혔다.
남자 주인공
이름 서태화.
서천대학교 연극 영화학부 1학년.
인상 182㎝ 훤칠한 키와 잘생긴 외모.
남주와 여주 모두 1학년.
1학년이 남녀주인공을 맡은 경우는 학부 역사에서 아주 드문 경우였다.
꿀꺽.
태화는 긴장감에 침을 삼켰지만, 오히려 긴장감은 삼킨 침과 함께 태화의 온 신경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제 내 순서다.’
쿵. 쾅.
태화의 심장이 심하게 뛰기 시작했다.
‘아, 오늘따라 왜 이러지? 심장이 터질 것 같아.’
태화는 도저히 긴장감이 진정이 안 되었다. 태화 입술을 혀로 살짝 적셔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쿵쾅쿵쾅!
‘이런 제길! 심장이 더 빨리 뛰기 시작하잖아!’
태화는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뒤로한 채 시선을 최수빈에게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