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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25화 (25/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25화

태화는 막힌 곳이 뚫리자 여러 가지 생각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고 박도봉 감독은 그 생각들을 받아주었다.

[태화 군. 자네 판단이 맞네. 관객은 박성욱에게 두 개의 감정을 갖게 될 걸세. 쌤통이라는 통쾌함과 동시에 인생의 커다란 기회를 허무하게 놓쳐 버린 것에 관한 동정심을 갖게 되는 거지.]

[저는 관객들이 박성욱에 대해서 통쾌함과 동정심, 이 상반된 감정을 갖게 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자네 말이 맞네. 주인공에게 하나의 감정만을 느낀다면 재미없지.]

[관객들은 통쾌함과 동정심 중 어떤 감정을 더 많이 갖게 될까요?]

[난 그 두 가지 감정이 팽팽할 거로 생각하네. 겉으로는 자신이 노력해서 성공하는 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의 목소리는 다르네. 노력을 통한 성공. 현실에선 그게 쉽지 않거든. 많은 사람이 당첨 확률이 지극히 낮은 복권을 사는 이유는 행운이라는 걸 통해서도 성공하고 싶어서네.]

[저도 영감님 의견과 일치합니다.]

[태화 군. 개략적이지만 스토리가 흥미롭네. 마음에 들어.]

#.

다음 날 태화는 본격적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다. 태화는 일단 작업 공간을 도서관이 아닌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오늘은 도서관이 아니라 카페인가?]

[오늘 시나리오 쓰는 첫날인데 분위기도 좀 바꿔보려고요.]

[동의하네. 도서관은 좀 답답하지.]

[네. 조용하긴 한데 그래서 졸리더라고요. 또 제가 도서관 친화적인 인간은 아니잖아요.]

[이해하네. 창작자는 사람들의 모습을 잘 관찰해야 하네. 그 모습을 통해서 뭔가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니 말일세. 하지만 도서관은 그러기에 적합하지 않지.]

[네. 카페는 유리창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잖아요. 풍경도 볼 수 있고요.]

태화는 카페로 들어가자마자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자신이 예약했던 좌석으로 이동했다.

태화가 예약한 좌석 근처엔 노트북을 놓고서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태화 군.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꽤 많네.]

[코피스족입니다.]

[코피스족?]

[네. coffee와 office의 합성어입니다. 카페에서 노트북이나 스마트폰으로 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요즘은 창작하는 사람들이 코피스족으로 많이 활동합니다.]

[음. 그런가. 내가 한참 충무로에서 영화 일할 때도 그랬었네.]

[정말요?]

[그렇네. 그때는 이런 카페가 아니라 다방에서 그렇게 했네.]

박도봉 감독이 한참 활약하던 시기 충무로에는 영화인들이 많이 모이던 유명한 다방이 꽤 있었다.

‘스타 다방’은 주로 조역, 단역, 엑스트라 연기자들이 모여 있던 곳이었고 ‘청맥 다방’은 시나리오 작가들이 원고를 썼던 곳이었다.

이 외에 ‘벤허 다방’은 영화감독이 주로 이용했으며 ‘초원 다방’은 제작자와 감독들이 자주 이용했던 다방들이었다. 그래서 영화 스태프는 자신이 만나야 할 사람을 각각의 다방을 찾아가서 만나기도 했다.

[영감님. 이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해 볼까요?]

[그렇게 하게. 시놉시스가 좋아서 그런지 나도 기대가 크구먼. 허허허.]

[네. 저도 기대가 큽니다.]

첫날이었지만 태화가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은 순조로웠다. 여기엔 박도봉 감독의 도움이 컸다.

박도봉 감독은 태화가 시놉시스를 쓰는 과정에선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지만,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선 달랐다.

박도봉 감독이 이렇게 했던 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시놉시스는 영화의 기본적인 방향성, 주요 캐릭터, 그리고 개략적인 스토리를 구상하는 단계다.

이 단계에 태화의 생각이 아닌 누군가의 생각이 섞이게 된다면 아직 경험이 미숙한 태화는 혼란을 겪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쓰는 단계에선 박도봉 감독이 태화에게 도움을 주는 게 오히려 나을 수 있다.

박도봉 감독의 이런 생각은 옳았다.

태화는 처음 장편 시나리오를 쓰다 보니 재능을 떠나 미숙할 수밖에 없었고 박도봉 감독은 태화가 씬을 써나갈 때 부족한 부분을 바로 지적해주었다.

[영감님의 조언이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역시 연륜입니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조언을 충실하게 받아들였다.

[허허허. 그걸 이제야 알았나? 하지만 자네도 만만치 않아.]

[그게 무슨 소립니까?]

[창작자는 보통 조언을 듣더라도 자기 고집이 있네. 그래서 조언을 해줘도 잘 듣지 않는 경우가 많네.]

[그게 저의 장점 아닙니까? 쓸데없는 고집이 없는 거.]

[그렇네. 그게 자네 장점이지.]

[하지만 제가 영감님의 조언을 따른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에요.]

[그럼 뭔가?]

[저야 영감님을 믿으니까요.]

박도봉 감독은 순간 짠한 감정이 올라왔다.

[음. 그랬나?]

[네. 영감님과 저는 한배를 탄 사이 아닙니까? 운명 공동체. 그러니까 믿어야죠. 영감님이 설마 저 잘못되라고 그러겠습니까?]

[고맙네.]

[하지만 앞으로 제가 머리가 커지면 모르죠. 영감님 말을 안 들을지. 크크크.]

[허허.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겠네.]

태화와 박도봉 감독. 두 사람의 생각이 하나로 모이면서 시나리오 작업은 점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영감님. 오늘 첫날이지만 제법 진도가 나가겠는데요?]

[자네 아주 신났구먼.]

[최대한 빨리 초고를 뽑아보겠습니다.]

[좋은 생각일세. 초고는 빨리 나올수록 좋네.]

#.

몇 달 후.

오늘은 저예산 영화 제작 지원 사업 접수 마지막 날이다. 태화는 첫날 예상했던 것처럼 초고를 비교적 빨리 뽑았다. 이후 여러 번의 탈고를 거쳐 최종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영화 제목은 <내 복권 내놔!>

[태화 군. 제목부터 아이러니일세.]

[그렇죠. 주인공이 자기 돈으로 산 것도 아닌데 말이죠.]

[영화 제목도 좋고 시나리오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네. 좋은 결과가 있을 거네.]

[그래야죠.]

태화는 영화협 저예산 영화 지원 사업에 온라인으로 지원서를 제출했다. 잠시 후 화면이 바뀌면서 ‘접수가 정상적으로 되었습니다.’라고 메시지가 떴다.

태화는 화면에 뜬 메시지를 보자마자 한숨을 푹 쉬었다.

[와. 힘드네요. 진이 다 빠지는 느낌이에요.]

[그럴 만하지. 시나리오를 쓴다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니까. 그래도 느낀 점이 많았을 걸세.]

[무엇보다 한번 해봤으니까요. 그래서 감이 잡혔습니다.]

[실제로 뭔가 성과를 냈다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네. 그 성과가 쌓이면 실력이 되는 거고.]

태화는 지난 몇 개월을 떠올려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까지 정말 미친 듯이 달려왔네요.]

[그래서 말인데.]

[또 뭐 할 게 있습니까?]

[뭘 그렇게 놀라는가?]

[영감님 같으면 안 놀라겠습니까? 방금 큰일을 끝마친 사람한테.]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참 독하십니다.]

[지금 자네는 며칠 좀 쉬어야 하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예상치 못한 답변에 깜짝 놀랐다.

[네?]

[자넨 지난 몇 개월 동안 정말 앞만 보고 달려왔네. 그리고 누구보다도 잘해주었어. 그러니 지금은 좀 쉬어야 할 시기일세.]

[잘 됐군요. 충전도 좀 하고……. 어디 바람이나 쐬러 가야겠어요.]

[어디로 말인가?]

[강릉이요.]

강릉이 어딘가? 바로 박도봉 감독의 고향 아니던가? 박도봉 감독은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고맙네.]

[그러실 필요 없네요. 바다가 보고 싶어서 가는 거니까요.]

[바다를 보려면 속초도 있고 다른 곳도 많네. 그래도 강릉을 가는 건 나 때문 아닌가?]

[그렇게 좋으십니까?]

[그럼. 좋고말고.]

[1박 2일로 다녀오죠.]

#.

다음 날

태화는 오전 8시쯤 백팩을 어깨에 메고 집에서 나왔다. 태화는 몸이 다소 피곤했지만 부족한 잠은 버스에서 자면 될 일이었다.

오전 9시에 동서울터미널에서 출발한 태화는 12시쯤 주문진 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태화가 주문진에 온 건 박도봉 감독의 제안 때문이었다.

[태화 군. 주문진으로 먼저 가세]

[혹시 거기로 가야 할 이유가 있나요?]

[주문진은 내가 어릴 적 살던 곳일세.]

[그럼. 그렇게 해요.]

주문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주문진항까지 도보로 이동해도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주문진항 주변엔 횟집 이외에도 맛집들이 꽤 있다.

태화는 주문진항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주문진 해변으로 향했다.

주문진항과 주문진 해변의 거리는 꽤 멀다. 도보로 30분 정도 걸린다.

[영감님. 그냥 걷죠. 소화도 시킬 겸.]

[난 찬성일세. 해안 도로를 걸어가는 기분이 제법 쏠쏠할 걸세.]

[근데 영감님이 살던 곳은 어디예요?]

[주문진 해변으로 가는 길에 있네.]

[어차피 가는 길이었군요.]

[해안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등대가 하나 보일 걸세.]

[등대요?]

[주문진 등대네. 그 등대가 있는 곳에서 살았었네. 주문진 등대 마을이네.]

[가는 길에 잠깐 들렀다 가죠.]

태화가 해안도로로 접어들자 바다에서 짠 내음과 함께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영감님. 바닷바람이 상쾌하네요.]

[바닷바람은 언제나 상쾌하네. 정신을 맑게 하는 데 아주 좋네.]

[그런 것 같네요. 스트레스가 다 날아가는 것 같아요.]

태화의 목소리는 어느새 들떠 있었다. 태화의 분위기를 알아챈 박도봉 감독도 덩달아 기분이 올라가는 것 같았다.

[허허. 태화 군. 즐기게나. 그동안 제법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는가.]

[나중에 자전거 타러 오면 좋겠어요.]

[그것도 좋은 생각일세.]

태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전거를 탄 십여 명의 사람들이 태화의 곁을 지나쳤다. 자전거 동호회에서 온 모양이었다.

[저 모습을 보니 더 타고 싶네요.]

[아쉬워도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오늘만 날은 아니니 말일세.]

태화가 주문진항을 출발해 이십여 분 걸어가자 박도봉 감독이 말한 대로 등대가 보였다.

[영감님. 저 등대, 주문지 등대 맞아요?]

[그렇네. 저 등대도 오랜만에 보는구먼.]

[여기 안 온 지 얼마나 되셨어요?]

[한 십 년도 더 넘은 거 같네.]

[<벌이 날다> 실패하고 나서 그런 건가요?]

[그렇네.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고,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을 땐 여기 오기가 민망했었네.]

[민망했다고요?]

[자격지심일세. 그냥 떳떳할 때 오고 싶었네.]

자격지심.

태화는 이 말에 공감이 갔다. 태화가 연기자로서 살고자 했던 시절. 계속되는 실패에 태화는 집에 들어가는 것도 미안할 때가 많았다.

[전 아직 영감님 같은 커다란 실패를 겪지 않았지만, 그 심정 조금은 이해해요.]

[고맙네. 위로되는구먼.]

어느새 태화는 주문진 등대 마을 입구 계단에 도착했다. 주문진 등대가 위치한 곳은 아주 높은 위치는 아니었지만, 계단은 꽤 경사가 가팔랐다.

[영감님. 올라갑니다.]

[꽤 힘들 걸세. 조심해서 올라가게.]

[네.]

잠시 후

주문진 등대로 올라가는 계단은 박도봉 감독의 말처럼 만만치 않았다. 숨이 금방 차올랐고 종아리와 허벅지도 꽤 뻐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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