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24화
[영감님. 답답하네요.]
[그 심정 내가 알지. 창작이란 고통스러운 과정이니까.]
[제가 제 능력을 너무 과신한 걸까요?]
[전혀 그렇지 않네. 내가 본 자네는 누구보다도 재능이 있는 사람일세.]
[근데 왜 이렇게 어려울까요?]
[내가 볼 때 자네는 아직 뭔가를 발견하지 못했네.]
[발견하지 못했다고요?]
[창작하는 과정에선 가끔 머리를 세게 후려치는 것 같은 뭔가를 발견해야 하네.]
[그건 영감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 영감과는 달라. 영감을 일으키게 하는 존재라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일세.]
[영감을 일으키게 하는 존재요?]
[그렇네. 영감은 어느 날 갑자기 자네의 머릿속에서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오히려 드물지. 대부분 영감은 어떤 존재를 발견하고 머릿속에서 떠오른다네. 자네가 답답해하는 것도 그 존재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일세.]
[그 존재가 어떤 건지 힌트라도 알 수 있다면 좋으련만.]
[태화 군. 힌트 같은 건 없네. 내 경험상 그 존재의 발견은 정말 우연히 그리고 대단하지 않은 것에서 찾아오네.]
[우연히, 대단하지 않은 거요?]
[그렇네. 그 존재는 아주 특별한 게 아닐세. 내가 하나 예를 들도록 하겠네.]
[네.]
[자네가 아무 생각 없이 길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본 어떤 상점의 간판이, 그 존재의 발견이 될 수도 있네. 또한 그 존재는 물건이 아닐 수도 있네.]
[물건이 아닐 수도 있다고요?]
[그렇지. 자네가 커피 한잔 마시기 위해서 카페에 들렀다고 해보겠네. 그 카페에서 흘러나온 어떤 음악의 멜로디 혹은 가사가 또 그 존재가 될 수도 있지.]
[듣고 보니 참 막연하네요.]
[태화 군. 자네가 일상을 보내면서 보게 되는 것들. 거기에 그 존재가 있네. 그리고 그 존재는 다른 사람들에게 특별하지 않아. 바로 자네에게만 특별하다네.]
[무슨 보물찾기 같네요.]
[자네 말이 맞네. 그 존재는 자네가 자신을 찾아주기를 기다리고 있을걸세. 단지 자네가 그 존재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을 뿐일세.]
태화는 일상에서 그 존재가 발견된다는 말에 지난 며칠간을 회상해 보았다. 어떻게든 그 존재의 단서라도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무엇 하나 뚜렷하게 잡히는 게 없었다.
[아. 그게 뭐지? 그게 뭘까?]
[지금 당장 고민한다고 그 존재가 보이는 게 아니네.]
[그럼 어떻게 그 존재를 알아봅니까?]
[그건 자네가 그 존재를 보는 순간 바로 알게 되네.]
[무슨 선문답 같습니다.]
[어찌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네.]
[그럼 그 존재를 발견하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잖아요.]
[당장 몇 분 후에 발견할 수도 있지만 몇 개월이 걸릴 수도 있네.]
[아. 정말 미치겠네요.]
[태화 군. 마음의 평정심을 찾게. 평정심을 잃으면 볼 수 있는 것도 보지 못하게 될 수 있으니.]
[그렇다면 그 존재를 발견할 때까지 글 쓰는 걸 중단해야 합니까?]
[그렇지 않네. 자네는 좀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워야 하네.]
[왜 그래야 합니까? 오히려 안 되는 걸 붙잡고 있는 게 시간 낭비 아닙니까?]
[그걸 논리로 말할 수 없으니 그냥 내 경험으로 말하겠네. 내 삶에서 그 존재는 항상 내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우고 있을 때 나타났네.]
[그럼. 그 존재는 자신을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에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그렇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말이 한편으로 일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더 절실한 사람이 성공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더 절실하다는 건 그만큼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싸운다는 말이기도 했다. 태화는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영감님. 어떻게 하나만 풀리면 될 것 같은데. 그 하나를 풀기가 너무 어렵네요.]
[너무 초조해하지 말게.]
[무슨 방법이 있는 겁니까?]
[내가 전에 욕망이 중요하다고 말한 적이 있을 걸세.]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현실의 벽이란 경제적 문제만이 아닐세. 지금처럼 답답한 상황도 포함되지.]
[그런 것 같습니다. 저도 이렇게 답답함을 느낄 줄은 몰랐습니다. 해야 할 일은 많은데 전혀 앞으로 나가질 못하고 있으니까요.]
박도봉 감독은 태화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사람이 살면서 맞는 첫 고비는 누구에게나 어렵고 답답하다. 그건 박도봉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박도봉 감독의 첫 고비는 바로 감독으로 입봉하는 작품이었다. 그때 작품을 준비하면서 느꼈던 초조함과 답답함 그리고 불안감.
이걸 극복할 수 있게 만든 건 박도봉 감독의 의지였고 그건 바로 감독이 되고자 한 욕망이기도 했다.
[자네에겐 킹의 자리에 앉고 싶은 커다란 욕망이 있어. 현 상황은 그 길을 가기 위한 첫 고비일 뿐일세.]
[…….]
[자넨 힘들어도 버텨낼 걸세. 자네가 품고 있는 욕망이 현 상황에 굴복하게 두지 않을 테니.]
[그 말은……. 제가 품고 있는 욕망이 이 고비를 넘게 할 거란 말입니까?]
[그렇네. 반드시 그렇게 될걸세. 태화 군. 자네의 욕망을 너무 과소평가하지 말게.]
박도봉 감독의 조언은 시의적절했다. 욕망이라는 단어가 태화의 마음속을 자극했다.
[영감님. 이번 프로젝트. 어차피 쉽게 이루어질 거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처음은 누구에게나 힘드네.]
[네. 방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무슨 생각 말인가?]
[전 저의 욕망이 얼마나 큰지 눈으로 볼 수 없으니 그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지금 알 수 없어요. 하지만 제가 품은 그 욕망이 영감님 말처럼 여기서 내가 포기하게 둘 것 같지 않아요.]
[바로 그 걸세.]
[다시 정신을 차려야겠어요. 이 정도에 무너진다면 전 그냥 아무것도 아닌 놈이 되잖아요.]
[그런 정신이면 됐네.]
태화는 캔 커피를 다 마시고 빈 캔을 버리기 위해서 분리수거용 휴지통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태화는 빈 캔을 분리수거용 휴지통에 버리고 도서관으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태화의 눈에 무언가가 잡혔다.
누군가가 바닥에 찢어버린 종이 쪼가리였다.
“에이. 누구야. 쓰레기 좀 잘 버리지.”
태화는 몸을 숙여 종이 쪼가리를 집었다. 그 종이 쪼가리의 정체는 바로 누군가 찢어버린 로또 복권이었다.
복권을 산 누군가가 당첨되지 않자 신경질적으로 찢어 버린 거였다. 태화는 찢어진 복권을 한동안 쳐다보았다.
태화가 한동안 움직이지 않자 박도봉 감독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태화 군. 왜 그러나?]
[영감님.]
[자네 설마?]
[방금 그 존재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뭐? 진짜인가?]
[네. 영감님 말이 맞았어요.]
[어떤 말을 말하는 건가?]
[그 존재는 우연히 발견되고 대단하지 않은 거라는 거. 그리고 그 존재를 발견하면 영감이 떠오른다는 바로 그 말이요.]
[그럼 이 찢어진 복권이 그 존재란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단지 쓰레기에 불과했던 이 복권 쪼가리가 바로 그 존재입니다. 하하. 이제 조금씩 막혔던 곳이 풀리는 느낌입니다.]
[허허허. 다행일세. 다행이야.]
태화는 막혔던 부분이 풀리자 이야기가 술술 풀려감을 느꼈다.
[영감님. 빨리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작업해야겠어요.]
[좋은 생각일세. 뭐든지 분위기 탔을 때 밀어붙이는 거거든.]
#.
태화는 다시 자리로 돌아온 후 노트북의 키보드를 두드렸다. 태화가 키보드를 치는 소리는 아까와 달리 가벼우면서도 경쾌했다.
태화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노트북에 글을 써 내려갔다. 꽉 막혀 있던 곳이 뚫려서 그런지 태화의 작업속도는 상당히 빠르게 진행되었다.
박도봉 감독은 태화가 작업하는 모습을 보며 흐뭇했다.
‘태화 군의 작업속도로 보아 오늘 중으로 시놉시스가 완성될 것 같구먼. 창작이라는 게 꽉 막혀서 사람을 미치게 하더라도 일단 막혔던 곳이 뚫리면 저렇게 미친 듯이 작업을 하게 되니까.’
박도봉 감독은 차분하게 태화가 쓰고 있는 글을 아무 말 없이 지켜보았다.
몇 시간 후.
태화는 마지막 글자로 마침표를 입력했다.
[휴. 다 끝났습니다.]
[수고했네. 자네가 작업하는 동안 나도 자네 글을 읽었네. 읽어보니 스토리가 꽤 흥미로웠네.]
[저도 쓰면서 재미가 있었어요.]
[그게 중요하네. 일단 본인이 쓴 글이 재미가 있어야 하네. 그래야 흥이 나서 작업을 해나가니까.]
[일단 한고비 넘긴 느낌입니다.]
태화가 작성한 스토리는 대략 이렇다.
남자 주인공 박성욱은 30대 중반의 나이로 삶이 꼬인 캐릭터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비정규직을 전전하던 박성욱은 주식에 자신의 거의 전 재산을 몰빵했다가 쪽박을 찬 케이스다. 전에는 그래도 원룸이지만 전세에 살았던 박성욱은 현재 반지하 월세에서 살고 있다.
당장 생계가 급했던 박성욱은 우연한 기회에 노래방 도우미를 실어다 나르는 운전기사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매일 희망 없는 삶을 살아가던 어느 날.
박성욱은 일을 마치고 자신과 사귀는 여성인 심수영과 함께 귀가하던 중 길에 버려져 있던 로또 복권을 줍는다.
심수영은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는 여성으로 서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친해진 사이였다.
박성욱은 처음엔 길에 버려진 복권을 그냥 버리려다 집으로 가져온다. 심수영도 그런 박성욱을 타박한다.
뭐하러 쓰레기를 줍느냐고.
박성욱은 심수영이 씻는 사이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재미로 복권 번호를 맞춰보고 그 결과에 깜짝 놀란다.
1등 당첨.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박성욱은 지난날의 억울함이 눈 녹듯 사라지고 희망찬 내일이 보이기 시작했다.
박성욱은 잠깐 눈을 붙이고 바로 당첨금을 찾으러 갈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당첨금을 찾으러 은행으로 가려고 하는 순간 박성욱은 깜짝 놀란다.
1등으로 당첨된 복권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그 복권을 가져간 사람은 누구인지 뻔했다.
박성욱은 자신의 행운을 빼앗아 간 심수영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심수영의 추적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이 시나리오에 핵심은 남자 주인공인 박성욱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로또 복권을 줍는 겁니다. 그것도 1등 당첨 로또 복권을요.]
[자네가 아까 찢어 버린 복권을 보고서 영감을 얻은 게 바로 이거구먼.]
[저는 찢어 버린 복권을 발견한 거지만 영화 속 주인공은 1등이 당첨된 복권을 줍는 거였죠. 아까 그 복권을 발견한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더라고요.]
[나쁘지 않네. 특히 주인공이 복권을 자신이 돈을 들여서 사는 게 아니라 길에서 줍는다는 설정이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구먼.]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박성욱은 정말 아무 노력 없이 복권을 길에서 줍잖아요. 최소한 자신이 복권을 사는 노력조차도 없어요. 그런데 박성욱이 그걸 잃어버린다면 관객은 묘한 심리를 갖게 될 거라는 판단이 들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