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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23화 (23/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23화

박도봉 감독은 말을 이어갔다.

[태화 군. 자네가 나와 함께했던 지난 시간들을 생각해 보게. 자네는 그동안 내가 내준 과제를 충실히 수행해왔네.]

[알아요. 그 수행 과정은 시나리오를 쓰는 데 필요한 것들이었죠.]

태화는 지난날 자신이 과제를 수행했던 것들을 돌이켜보았다.

영화의 씬을 분석하고 시나리오로 옮기는 작업과 캐릭터 연구, 그리고 프레이밍 훈련은 바로 연출의 기본이기도 하면서도 시나리오를 쓰는 기본이기도 했다.

[태화 군. 이제 자네가 지금껏 갈고닦은 그 실력을 펼쳐 보일 때이네.]

[저도 한번 확인해 보고 싶군요. 제 실력이 어느 정도일지.]

[좋네. 그럼 오늘은 일단 집으로 돌아가서 잠을 푹 자게나. 아침에 일어나면 본격적으로 머리가 아파질 테니까.]

[알겠습니다. 일단 아무 생각 없이 자야겠어요.]

[태화 군. 한동안 웅크려 있었던 자네가 이제 바깥으로 나가야 할 때가 왔네.]

[드디어 그 시기가 왔군요.]

#.

다음 날 태화는 동네 근처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에 들어간 태화는 노트북 지정석으로 이동했다. 대형 도서관이 아니어서 그런지 좌석에는 여유가 있었다.

태화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부팅했다.

[도서관도 참 오랜만에 오네요.]

[도서관에 친화적인 삶을 살지 않았구먼.]

[뭐. 그런 편이었습니다.]

[이 도서관 아주 아늑하고 좋구먼.]

[네. 대형 도서관의 번잡함보다는 나은 것 같아서요.]

[좋은 선택일세. 어차피 자료를 찾기 위해서 도서관에 온 게 아니니까.]

[그럼. 시나리오에 관한 전략을 세워보죠.]

[태화 군. 그전에 참고할 만한 영화가 있네.]

[어떤 영화입니까?]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의 <엘 마리아치>네.]

[잠깐만요. 로드리게즈 감독이면 <황혼에서 새벽까지> 감독 아닙니까?]

[그렇네. 그 감독의 입봉작이네. 그리고 현재 자네가 처한 상황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네.]

[제가 처한 상황과 비슷하다고요?]

[그렇네. 이 영화는 저예산으로 만든 영화일세.]

[얼마에 만들었습니까?]

[놀라지 말게. 단돈 700만 원으로 만든 작품일세.]

[700만 원이요? 영감님. 좀 놀랍군요.]

[뭐가 말인가?]

[그 돈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게.]

[가능하니까 작품이 만들어진 거 아닌가? 특히 로드리게즈 감독은 이 작품으로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되네.]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은 할리우드로 진출한 후 <엘 마리아치> 속편 격인 <데스페라도>를 연출했고 성공적으로 할리우드에 안착한다.

[대단하군요. 어떻게 700만 원으로 만들었는데 그런 성과를 이룰 수 있었는지.]

[영화는 기본적으로 대자본이 투입되어야 하는 게 정석이지. 그런데 <엘 마리아치>는 정말 가난하게 만들었지만 엄청난 성과를 이룬 거네. 역설적이지 않나?]

[바로 그게 제가 공략한 틈이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네. 일단 영화를 보도록 하게. 그런 후에 할 말이 더 있네.]

태화는 인터넷을 검색해서 <엘 마리아치>를 찾아서 다운로드했다.

#.

태화는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숨을 내쉬었다.

[태화 군. 소감이 어떤가?]

[적은 예산으로 만든 영화라 그런지 화면에 촌스러움은 있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재미없지 않았어요. 마치 영감님의 작품을 본 거 같기도 하고요.]

[내 영화나 <엘 마리아치>나 B급 영화의 감성을 가지고 있으니까. 아마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걸세. 하지만 제작과정에선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네.]

[주요한 차이요?]

[그래. 나는 어쨌든 연기자나 스태프를 프로 인력으로 구성할 수 있었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인력이 없었다는 점일세.]

[그게 사실입니까?]

[그렇네. 솔직히 저 영화에 출연한 연기자들의 연기가 자연스럽지는 않지 않았는가? 그 연기자들 사실 프로 배우들이 아니야.]

[저는 그냥 유명하지 않은 배우들이라서 어색한 건 줄 알았는데요. 그게 아니었군요.]

[실제 저기에 출연한 배우들은 로드리게즈 감독의 지인들일세.]

[그래도 저 정도의 영화적 재미를 주었다면 로드리게즈는 능력 있는 감독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할 수 있네. 하지만 무비판적인 추종을 해선 안 되네.]

[그야 당연하죠.]

[자네는 여기서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려야 하네. 그럼 자네에게 묻겠네.]

[네.]

[자네가 취해야 할 건 뭔가?]

태화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 고민의 핵심은 촌스러운 화면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영화를 계속 보게 만드는 요소였다.

[흥미로운 스토리요. 이야기의 전개가 기대되니까 계속해서 보게 됩니다.]

[좋네. 아주 정확한 지적이야. 관객들은 일단 스토리가 흥미로우면 보게 되네. <엘 마리아치>는 촌스러운 화면에도 그 스토리의 힘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야. 태화 군.]

[네.]

[또 취해야 할 점은 없나?]

태화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저는 스토리 부분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다 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지?]

[관객으로서 불편한 점이 있었거든요. 가령 배우들의 어색한 연기는 시종일관 계속 마음에 남았습니다. 감정의 몰입에 방해도 되고요.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었다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었잖아요. 제작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거잖아요.]

[좋네. 괜찮은 분석이군. 나도 자네와 같은 생각일세. 그럼 이제 자네가 앞으로 쓸 시나리오에 관한 전략을 말할 차례군.]

[네.]

[우선 저예산에 맞게 시나리오를 써야 하네. <엘 마리아치>는 장르로 따지자면 액션 영화네. 기본적으로 저예산 영화로 만들기 어려운 장르일세.]

[저예산으로 제작하기엔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말이군요.]

[그렇네. 저예산 영화 지원 사업의 심사위원들은 그 현실성에 많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네.]

[그건 왜 그렇죠?]

[기본적으로 정부에서 하는 사업이고 성과가 나와야 하는 사업이기 때문일세.]

[성과가 나와야 계속 그 사업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네. 소재의 참신성도 본다고 하지만 이 현실성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네.]

[그럼 일단 큰 그림은 나온 거군요. 저예산으로 제작 가능한 재미있는 스토리.]

[바로 그게 핵심일세.]

당연한 결론인 것 같지만 대부분 이 부분을 간과하고 넘어간다. 제출자들의 상당수가 소재의 참신성에 매몰되는 경우가 많다.

[제가 또 고려해야 할 부분이 있나요?]

[전체 씬은 100씬 정도로 맞추게.]

보통 1씬당 1분 정도로 계산한다. 100씬이면 100분 분량이다.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 외에 제가 또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까?]

[가능한 등장인물을 최소화해야 하네. 그리고 실내 장면도 가능하다면 줄여야 하고.]

등장인물을 최소화하고 실내 장면을 줄여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제작비 때문이다.

실외 장면은 태양을 조명으로 촬영하면 되지만 실내 장면을 촬영하려면 조명을 설치해야 한다. 그만큼 장비와 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가 말했던 사항에 너무 집착할 필요는 없네. 어디까지나 고려 사항이지 절대적으로 따라야 할 사항은 아니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런데 소재를 뭐로 할지가 고민이네요.]

[태화 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게 아니네.]

[네?]

[일반적으로는 소재를 먼저 정하고 캐릭터를 구성해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네. 하지만 그 반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도 있네.]

[캐릭터들을 먼저 정하고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이군요. 마치 귀납적 추론처럼요.]

[그렇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이 자신에게 왜 이런 조언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동안 태화는 캐릭터 연구만큼은 착실하게 해왔고 데이터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태화는 그동안 자신이 연구했던 캐릭터들을 정리해 둔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그 정리된 내용을 쭉 훑어보기 시작했다.

태화는 엄청난 집중력을 보였다. 그 증거로 태화는 자리에 앉은 채 몇 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았다.

태화는 수많은 캐릭터 중 몇 개를 골라냈다. 그리고 태화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어떤 걸 써야 하는지 생각났어요.]

[오호.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반응이 빠르구먼. 나는 며칠 걸릴 줄 알았는데……. 자네가 이 캐릭터들을 골라낸 이유가 뭔가?]

[뭔가 삶이 꼬인 캐릭터들입니다. 그리고 당장 미래가 그리 나아 보이지 않는 캐릭터들이기도 하고요.]

[음. 나쁘지 않아. 한번 이야기를 재미있게 엮어보게나.]

#.

요 며칠간 태화는 도서관에서 시나리오의 시놉시스 작업을 해왔다.

시놉시스는 시나리오의 뼈대가 되는 줄거리를 만드는 단계로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가장 어렵다고 할 수 있다.

보통 시놉시스가 완성되면 그다음 과정은 어느 정도 작업이 진행된다. 뼈대가 되는 줄거리에 살을 붙여나가면 시나리오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태화는 그동안 수없이 시놉시스를 썼다가 다시 지우기를 반복했다. 태화는 캐릭터를 골라내는 단계까지는 큰 문제 없이 시나리오를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실제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가자 과정이 만만치가 않았다. 무엇보다 각각의 캐릭터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묶어내야 하는데 이 과정이 태화에겐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다.

탁탁탁탁.

태화가 두드린 자판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태화는 짜증이 난 감정을 자판에 쏟아내고 있었다. 태화에게 며칠간 쌓였던 스트레스가 이제 슬슬 터지고 있었다.

‘아. 왜 이렇게 안 풀리지? 미치겠네. 진짜.’

박도봉 감독은 태화에게 시놉시스와 관련해 조언해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 시점에서 내가 나서면 안 된다. 힘들어도 태화 군은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여기서 태화 군이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이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다. 계획을 바꾸는 건 어렵지 않지만, 문제는 태화 군이다. 지금껏 잘해왔던 태화 군이 좌절감에 심리가 위축될 수도 있다. 현재로선 태화 군이 스스로 극복하는 걸 기대할 수밖에 없다.’

탁탁탁탁.

다시 태화가 신경질적으로 자판을 두드리자 주변 사람들이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하지만 태화는 자신의 감정에 매몰된 나머지 주변 상황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태화 군. 방금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좀 컸네.]

[아.]

태화는 자판을 두드리는 걸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태화를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태화는 재빨리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현했다.

‘확실히 태화 군의 멘탈이 흔들리고 있군.’

박도봉 감독은 태화의 멘탈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태화 군. 잠깐 머리라도 식히는 게 좋을 것 같네. 일단 밖으로 나가세.]

[휴. 아무래도 그래야겠어요.]

#.

도서관 건물 밖으로 나온 태화는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하나 뽑았다.

꿀꺽.

태화는 커피 액이 식도를 넘어가는 순간 자신의 재능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다.

‘역시 공부와 실제는 다르다는 건가? 무난하게 넘어갈 줄 알았는데…….’

이 의문은 태화가 영화감독이 되기로 하고 나서 처음 갖는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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