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22화
촬영을 마친 태화가 윤명준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명준 씨. 수고 많았어요.”
“의외로 힘드네요. 촬영하면서 공부도 같이하려고 했는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은 윤명준처럼 돈도 벌고 공부도 할 목적으로 촬영 알바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윤명준은 일거양득을 노렸지만, 그 기대는 첫날부터 여지없이 깨졌다.
“명준 씨. 아무래도 공부도 같이하는 건 힘들겠죠?”
“네. 그럴 거 같아요.”
태화가 윤명준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이정민이 다가왔다. 태화는 장비를 챙기느라 이정민이 다가오는 걸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정민이 먼저 태화에게 말을 건넸다.
“태화 씨.”
“네. 교수님.”
“오늘까지 하고 관둔다면서요?”
“네. 그렇게 됐습니다.”
“이걸 어째. 태화 씨 덕분에 그동안 온라인 매출도 오르고 좋았는데.”
태화는 그동안 이정민의 예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이정민은 처음엔 태화도 다른 촬영 알바처럼 금방 그만둘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태화는 오랫동안 버텨 왔고 이정민의 강의 동영상을 이전과 다르게 안정감 있게 촬영해 냈다.
태화가 안정적으로 촬영한 이정민의 강의 동영상은 지난 몇 개월간 변화를 만들어냈다. 과거에 이정민은 오프라인 강의에서만 주로 강점을 보이는 강사였다. 하지만 태화가 촬영한 영상이 그 전과 비교해 안정적으로 되면서 온라인에서도 수강생들의 호평이 이어졌다.
-이정민 강의는 이제 온라인도 괜찮다.
그 결과 이정민은 오프라인뿐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강점이 있는 강사가 되었고 온라인 매출도 몇 개월간 상승곡선을 그리게 되었다.
이정민으로선 태화가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이정민이 태화의 이름을 알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이익을 가져다준 사람에게 호의적이게 마련이다.
“교수님. 저도 아쉽네요.”
“태화 씨. 혹시 말만 그렇게 하고 속은 시원하다고 그러는 거 아니죠?”
“하하하. 이거 들켰네요.”
“뭐요?”
태화와 이정민은 잠깐 큰 소리를 내서 웃었다. 다만 그 자리에 있었던 윤명준만 머쓱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태화가 윤명준을 이정민에게 소개해 주었다.
“교수님. 윤명준 씨입니다. 저를 이어서 내일부터 교수님 강의를 촬영해 줄 사람입니다.”
소개를 받은 이정민이 윤명준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부탁해요. 태화 씨만큼만 하면 돼요.”
윤명준에겐 태화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순간이었다.
“네. 교수님.”
“태화 씨. 그동안 고생 많았어요. 나중에 시간 되면 한번 찾아와요. 거하게 식사 한번 살 테니까.”
“네. 고맙습니다. 교수님도 건강하게 지내세요.”
“그래요. 그럼 난 이만 가 볼게요.”
“네. 교수님.”
태화와 마지막 인사를 나눈 이정민은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명준 씨. 장비 다 챙겼죠?”
“네.”
“인제 그만. 퇴근하죠.”
“태화 씨. 이거 부담되네요.”
윤명준의 처지로선 충분히 가질 수 있는 부담감이었다. 선임자가 업무를 너무 잘했을 때 후임자는 그 그림자에 갇힐 수밖에 없다.
“명준 씨. 그렇게 부담 가질 거 없어요. 내가 가르쳐 준 대로 하면 큰 문제 없을 거예요.”
“알겠어요.”
윤명준 처지로선 태화의 말처럼 되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부담감을 느낀다고 해서 촬영을 못 하겠다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윤명준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상황에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태화와 윤명준은 장비를 나눠 들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태화는 강의실 문을 나가기 전 다시 한번 강의실을 보았다.
[태화 군. 아쉬운가?]
[네. 조금요. 그래도 지난 몇 개월간 제 삶의 일부였던 공간이었으니까요.]
[살다 보면 지금처럼 아쉬움이란 게 남는 거네. 하지만 아쉬움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네.]
[어떻게 다릅니까?]
[누군가는 아쉬움 때문에 남아 있고 누군가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떠나는 걸세.]
[그럼. 전 아쉬움을 뒤로하고 떠나는 사람이군요.]
[그렇네.]
[영감님. 저는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솔직히 전 지금 아쉬움보다는 설렘이 더 크거든요.]
#.
태화는 바로 집으로 향하지 않고 한강 공원을 천천히 걸어갔다.
[태화 군. 이제부터 중요한 이야기를 하겠네.]
[제 첫 작품에 관한 이야기군요.]
[맞네. 현재 자네의 수준은 단지 기본기를 닦은 것 이상이네. 이건 내가 확실히 장담할 수 있네.]
[네. 노력했으니까요.]
태화는 이 말을 하면서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지난 몇 개월간 태화는 정말 열심히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난 자네에게 작품 제작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좀 고민스러웠네.]
[뭐가 말입니까?]
[시기 때문일세. 하나의 단계가 끝나자마자 휴식 없이 이렇게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 좋은 일인지. 또한 내가 자네를 너무 밀어붙이는 게 아닌지.]
[체력적인 문제라고 한다면 염려 놓으셔도 됩니다. 저 아직 팔팔합니다.]
[그럼. 좋네. 이제 자네는 장편영화를 만들기 위한 과정을 밟게 될 걸세.]
[장편영화를 만들게 될 거라는 말 정말이었군요.]
[그렇네. 아까 말했듯 자네의 기초는 튼튼하네. 자네의 경험 부족은 내가 메꿔주면 가능하네.]
[하하. 이거 가슴이 벅차오르는군요.]
태화는 장편영화를 만들게 될 거라는 사실에 기뻤다.
[자네의 벅차오르는 감정은 이해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냉정하네. 장편은 만들고 싶다고 다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니 말일세. 단편을 제작할 때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이 고려되어야 하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아채고 있었다.
[영감님. 아무래도 가장 큰 문제는 제작비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네.]
[혹시 어디에 숨겨둔 현금이라도 있는 겁니까?]
[나한테 그런 돈이 있을 턱이 없잖나?]
[하긴. 그런 돈이 있었다면 고시원에서 살지는 않았겠지요. 그럼 영감님은 어떻게 제작비를 마련하겠다는 겁니까?]
[자네도 알겠지만 내가 대책 없이 말하는 성격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죠.]
[분명 제작비를 마련할 방법이 있네. 하지만 이 방법은 한 가지 단점이 있네.]
[단점이요?]
[그렇네. 그래도 할 건가?]
태화로선 단점이 있더라도 한번 도전해 볼 만했다. 단편 영화 제작을 거치지 않고 바로 장편영화를 제작하는 건 그만큼 메리트가 크기 때문이다.
보통 영화계에서 감독으로 입봉하는 길은 크게 세 가지다.
주목받는 단편 영화를 여러 편 만들거나 혹은 영화 현장에서 연출부 생활을 하면서 장편영화에 감독으로 입봉하는 방법 그리고 시나리오를 써서 입봉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시나리오만 잘 썼다고 입봉하는 것도 아니다. 이력에 연출부 생활을 했다거나 하는 영화 제작에 참여한 경험이 있어야 한다.
어쨌든 태화가 가려고 하는 방식은 이 세 가지 길에서도 벗어나 있으면서 영화계 현실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은 수년 혹은 10년 이상 넘게 걸리는 시간을 태화는 단번에 뛰어넘을 수 있다. 그래서인지 태화는 피가 끓어올랐다.
[해봐야죠. 그럴 가치가 충분하잖아요.]
[그렇네. 하지만 단순히 장편을 만드는 데 그쳐서는 안 되네. 작품을 만들어도 극장에서 개봉하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네.]
누구든 돈이 있다면 장편영화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 작품이 극장 개봉작이 된다는 건 만들 수 있는 것과 완전히 수준의 다른 이야기다. 만들어진 작품이 수준 미달이라면 그 작품은 극장에 개봉할 수 없다.
[태화 군. 자네가 만들 작품은 반드시 극장에 개봉이 되어야 하네. 자네가 만든 작품이 극장 개봉작이 되어야 소위 영화계에서 정식 감독으로 인정받게 되네.]
[그게 진입장벽이군요.]
[그렇네.]
비교적 많은 자본이 들어간 작품은 극장 개봉이 되지만 저예산 영화는 다르다. 저예산의 영화는 대부분 극장에서 개봉되지도 못하고 빛을 보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영감님. 근데 어디를 털거나 그런 건 아니죠?]
[허허. 당연히 아니네. 내가 설마 내 제자를 범법자로 만들 수 있는 일을 시키겠는가?]
[그럼. 제작비를 마련할 방법이 뭡니까?]
[지원을 받는 거네.]
[지원이요? 누가 자선 사업이라도 한답니까?]
[자선 사업은 아니어도 지원해 주는 곳이 있네.]
[거기가 어딥니까?]
[영진협이네.]
[영화진흥협회를 말하는 겁니까?]
[그렇네. 영화진흥협회에선 매년 저예산 영화를 몇 편 선정해서 지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네. 거기에 지원하는 걸세.]
[나쁘지 않은 방법이군요. 하지만 경쟁률이 엄청날 텐데요? 영감님. 잠깐만요. 그렇다면 혹시……?]
[그렇네. 경쟁률이 높다는 것. 바로 그게 단점일세.]
[네?]
[어떤가? 그 단점 자네가 한번 극복해 보고 싶지 않은가?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서 지원금을 확보한다면 바로 장편영화 감독으로 입봉하는 걸세.]
[당연히 극복해야지요. 하지만 뭔가 전략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할 걸세.]
[좋습니다.]
[태화 군. 가장 중요한 게 뭐일 것 같은가?]
[당연히 시나리오 아닙니까?]
[그렇네. 그건 몇 번이고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네. 특히 자네는 핸디캡을 안고 가야 해서 더 그렇네.]
[핸디캡이요?]
[그래. 그 지원 사업에는 제출자의 영화 이력도 보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뭔가요?]
[실제 제작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는지 가늠하기 위해서네. 영화 이력이 전혀 없는 사람은 제작비를 지원해 준들 실제 제작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거든.]
[그럼 저 같은 경우는 불가능한 거 아닙니까?]
[아니네. 세상일이라는 게 완전 100% 혹은 완전 0%라는 건 없거든.]
[그 말은…… 제가 들어갈 틈이 있다는 말이군요.]
[역시 자네는 말귀를 잘 알아들어. 어느 분야든 성공한 사람은 작은 틈을 찾아내지.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에게 기회를 만드는 법일세.]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연륜에서 나오는 전략에 신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만약 박도봉 감독이 아닌 다른 사람이 태화에게 조언했다면 이 상황에서 대부분 포기하라고 했을 게 뻔했다.
어차피 안 될 거 뭐 하러 하느냐?
시간 낭비다.
[좋습니다. 영감님. 그럼 어떻게 틈새를 공략합니까?]
[이미 답은 나왔네. 자네의 시나리오가 경쟁력이 있다면 가능성이 있네. 다른 제출자들보다 자네의 시나리오가 심사위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가능한 일이네.]
[결국 시나리오군요.]
[혹시 자신감이 떨어진 건가? 자네가 힘들다고 여긴다면 단편 영화 제작으로 방향을 틀 수도 있네. 난 선택을 강요하고 싶은 생각은 없네. 자네가 정식 루트의 과정으로 간다면 난 그에 맞춰 자네를 도울 걸세.]
[아뇨. 그럴 필요 없습니다. 제가 하겠다고 했으니 끝을 봐야죠.]
[좋았어. 난 자네가 그렇게 판단할 줄 알았네. 자네에겐 다소 힘들 수도 있지만 이번에 시도해 보는 게 자네에겐 결코 마이너스가 아니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안 될 걸 먼저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결심이 섰으면 가야죠.]
[아주 좋은 마음가짐일세. 이제는 자네에게 힘이 되는 이야기를 해주겠네.]
[말씀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