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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21화 (21/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21화

박도봉 감독의 설명이 이어졌다.

[<벌이 날다>와 <우아한 녀석들>을 개봉하는 극장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네. 개봉 당일 큰 줄이 서 있었네. 줄 서는 관객이 대로변으로 이어질 정도로 엄청난 인파였네. 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벌이 날다> 개봉관으로 뛰어갔네. 하지만 혹시나 했던 내 기대는 완전히 무너졌네. <벌이 날다>를 개봉하는 극장 매표소에는 아무도 없었네.]

박도봉 감독이 그 당시 느꼈던 감정은 처참함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승부수를 던졌지만, 그 결과는 너무 초라했다.

태화는 순간 박도봉 감독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태화는 <우아한 녀석들>을 개봉 일에 가서 작품을 관람했기 때문이었다.

[영감님. 미안해요.]

[뭐가 말인가?]

[저도 <우아한 녀석들> 개봉 일에 극장 가서 봤어요.]

[괜히 미안할 필요 없네. 자넨 아무 잘못도 없네. 그땐 자네도 평범한 관객이었을 테니 말일세.]

[이해해 주셔서 고맙네요. 근데 영감님이 전에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어떤 말?]

[이영진이 저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제가 적격이라는 말이요.]

[그렇네. 내 경험에서 나온 말이지 않은가.]

박도봉 감독은 울분을 토할 상황인데도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기에 태화는 더 가슴이 아팠다.

‘영감님은 저렇게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감내했을까?’

고통 속에서 보낸 시간이 얼마던가.

[영감님.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뭔가?]

[이영진은 <우아한 녀석들>이란 작품이 두 번째 작품에 불과합니다. 이영진 그가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해도, 그렇게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지원받은 게 이해가 되지 않네요.]

[태화 군. 잘 봤네. 킹은 혼자 잘났다고 되는 게 아니네.]

[네?]

[킹은 자신을 지원해 주는 세력이 있어야 하는 걸세.]

[그럼 이영진을 뒤에서 밀어주는 세력이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다고 할 수 있네.]

[그들은 왜 이영진을 선택했을까요? 이익 때문인가요?]

[나도 구체적인 이유는 모르네. 어쨌든 그들은 이영진을 선택했고 성공했네. 단지 현재로선 이익이 가장 큰 이유일 거로 추정할 뿐이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견해에 동의했다. 실제 이영진이 영화계에서 행사하는 영향력은 영화의 투자, 제작, 배급에서 막강했고 그에 따른 이익도 상당했다.

[영화판이 정치판과 다를 게 없군요.]

[단지 영상을 잘 만든다고 영화감독으로 성공하는 건 아니네. 성공하기 위해선 반드시 정무적 감각이 필요하네. 자네의 위치가 점점 위로 올라갈수록 정무적 감각이 더 필요해질 걸세.]

[영감님. 그럼 저도 정무적 감각을 키워서 저를 지원해 줄 세력을 만들어야겠군요.]

[그렇네. 하지만 벌써 그런 걱정할 필요 없네.]

[아직 갈 길이 멀다고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네. 자네가 본인의 능력을 증명할수록 자네에게 딜을 걸 사람이 나타날 걸세.]

[뭐 당장은 영감님만으로 충분합니다.]

[허허허. 그런가? 어쨌든 일 단계는 이로써 마무리하겠네. 그리고 점수는 따로 말하지 않겠네.]

[그건 왜 그렇습니까?]

[굳이 점수를 매기지 않아도 성공적이었네. 그럼 된 거 아닌가?]

[그렇군요.]

#.

저녁 시간.

태화는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노량진 공탑으로 향했다. 공탑 이주성과 저녁 식사 약속을 잡았기 때문이다.

태화가 공탑에 도착하자 입구에 이주성의 모습이 보였다. 오늘은 태화가 마지막으로 국어 강사 이정민 강의를 마지막으로 촬영하는 날이다.

[오늘로서 노량진 학원도 마지막입니다.]

[아쉽겠지만 어쩔 수 없네. 여기서 이제 자네가 얻을 건 없네.]

[알고 있어요.]

동영상 강의 촬영은 영상에서 가장 기초적인 부분만 활용한다. 태화는 이제 그 단계를 벗어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주성이 오늘 저녁 식사 약속을 잡은 것도 태화와 헤어지는 게 못내 아쉬워서다. 이주성은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서 와요. 태화 씨.”

태화가 강의 촬영하는 동안 작은 변화도 있었다. 이주성이 한 달 전 대리로 승진한 것이다.

“이 대리님, 혹시 오래 기다린 건 아니죠?.”

“아뇨. 나도 금방 왔어요.”

“그럼 식사하러 가요.”

“태화 씨. 잠깐만요.”

“혹시 누가 오기로 한 건가요?”

“네. 팀장님이 올 거예요.”

“이거 판이 커진 거 아닌가요?”

“그렇지도 않아요. 팀장님만 오실 거예요.”

태화와 이주성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팀장이 등장했다. 팀장의 이름은 김재승으로 30대 후반에 푸근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김재승이 태화를 보자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태화 씨. 관둔다니 이거 아쉽네.”

“팀장님. 저도 좀 더 하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태화의 이 말은 단순히 형식적으로 한 말이 아니었다. 태화는 공탑 영상팀 직원들 사이에선 일명 ‘해결사’로 불렸다.

태화가 촬영을 맡은 이후 골머리를 앓던 이정민 강의 동영상 컴플레인이 단번에 해결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재승을 포함한 공탑 영상팀은 태화에게 잘 대해줄 수밖에 없었다.

김재승은 지난 몇 달간 태화를 유심히 보아왔다. 그리고 태화를 눈여겨보던 김재승은 실제 태화에게 직원이 될 걸 권유하기도 했었다.

“태화 씨. 혹시 여기 직원 할 생각 없어요?”

하지만 태화는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팀장님이 제게 주신 제안 고맙지만, 못 할 거 같습니다.”

김재승은 태화의 거절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만큼 김재승은 태화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요. 직원으로 그 일과 병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김재승은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태화와 김재승 그리고 이주성, 세 사람은 저녁 식사를 위해 공탑 근처 한정식집으로 향했다.

[태화 군. 좋은 사람들이네.]

[네. 잔정이 많은 사람들이에요.]

[자네도 좀 아쉬운 모양이구먼.]

[네. 아쉬워요. 사람들도 좋지만, 저를 인정해 준 사람들이잖아요.]

#.

저녁 식사를 마친 태화는 장비를 들고 촬영 준비를 위해 강의실로 향했다. 강의실엔 태화만 온 게 아니었다. 이주성과 함께 또 한 명의 사람이 있었다.

바로 태화에 이어서 촬영을 할 알바였다. 촬영 알바는 남자고 이름이 윤명준이다. 윤명준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이주성이 태화를 보며 말했다.

“태화 씨. 명준 씨에게 장비 세팅하는 것부터 알려줘요.”

“그러죠.”

태화는 자신이 그만두고 이어서 할 촬영 알바에게 촬영 세팅에 관해 설명했다. 태화는 설명을 끝내고 촬영 알바가 직접 촬영 세팅을 하도록 했다.

“명준 씨. 직접 한번 해보세요.”

“네.”

윤명준은 직접 장비 세팅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능숙하게 했던 태화와 달리 윤명준은 다소 버벅댔다.

태화는 윤명준이 버벅대자 다시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게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요…….”

태화의 설명은 간결하면서도 깔끔했다. 그래서인지 윤명준은 큰 무리 없이 장비를 세팅해갔다.

[태화 군. 일취월장일세. 자네도 이제 제자를 두는 건가?]

[영감님. 제자라뇨? 놀리십니까?]

[허허. 자네도 부끄러워할 때가 다 있구먼.]

[뭐 그냥 사수, 부사수 관계라고 하죠.]

촬영 세팅이 끝나자 이주성이 태화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태화 씨. 잠깐만요.”

“네. 이 대리님.”

태화와 이주성은 강의실 밖으로 나왔다.

“태화 씨.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네. 저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이주성이 태화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영화감독 된다고 하셨죠?”

태화는 이주성이 내민 손을 잡았다.

“네.”

“꼭 영화감독으로 성공해요. 응원할게요.”

“고마워요. 꼭 응원에 보답하겠습니다.”

“이거 미리 사인받아 놔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하하.”

이주성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정이 많은 성격 때문이다.

“이 대리님은 꼭 사인해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고마워요.”

이주성은 태화와 맞잡은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 손등으로 자신의 눈가를 훔쳤다.

“저 좀 웃기죠? 이해해 줘요.”

“아뇨. 하나도 안 웃깁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졌으면 좋겠지만 태화와 이주성에게 더 이상의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태화의 시야에 이정민의 모습이 들어왔다.

“교수님 오시네요. 전 그만 들어가 볼게요.”

“네. 그래요.”

태화는 이주성과 작별하고 강의실로 돌아왔다. 태화는 이주성을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영감님. 참 웃겨요.]

[뭐가 말인가?]

[이주성 대리. 처음 봤을 땐 참 무능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저렇게 정이 많고 좋은 사람인 줄 몰랐네요.]

[그래서 사람은 겪어봐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네. 그런 거 같아요.]

태화가 촬영 지정석으로 돌아오고 나서 몇 초 후 강사 이정민이 들어왔다. 태화는 카메라 레코드 버튼을 누른 후 윤명준에게 말했다.

“교수님이 들어오시면 바로 레코드 버튼을 눌러요. 어차피 필요 없는 부분은 편집팀에서 잘라내니까요. 알겠죠?”

“네.”

“그리고 교수님은 알다시피 많이 움직이니까 카메라로 잘 따라가야 합니다.”

“네.”

“내가 하는 거 잘 봐요.”

“네.”

이정민은 늘 하던 대로 마이크를 켜자마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화는 자신이 터득한 방법으로 이정민을 잘 따라다녔다. 태화의 촬영 테크닉에 윤명준은 놀랐다.

“저기. 태화 씨. 그냥 눈으로 교수님 따라가도 정신이 없는데 어떻게 한 거예요?”

“이제부터 설명할 테니 잘 들어요.”

태화는 자신이 터득한 노하우를 윤명준에게 알려주었다.

[태화 군. 자네가 터득한 노하우를 이렇게 알려주는 게 아깝지 않은가?]

태화가 터득했던 노하우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쉽지 않은 노하우다. 쉬운 노하우였다면 진즉에 해결됐을 테니 말이다.

[글쎄요. 왠지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네요.]

[왜 그런 생각이 드는가? 혹시 자네에게 잘 대해주었던 이주성 대리나 김재승 팀장에 대한 보답인가?]

[뭐 그것도 있지만 이렇게 하는 게 나 자신에게 떳떳하잖아요.]

[허허. 멋진 대답일세.]

태화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윤명준에게 시선을 돌렸다.

“명준 씨. 할 수 있겠어요?”

“할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

“한번 해봐요. 내가 옆에서 봐줄 테니까요.”

“네.”

태화는 카메라 삼각대 손잡이를 윤명준에게 넘기고 자신은 옆으로 살짝 빠졌다. 그 상태에서 윤명준은 카메라 삼각대를 잡고서 촬영을 이어갔다.

윤명준은 촬영하면서 이정민을 프레임에서 몇 번 놓칠 뻔한 실수를 범했다. 하지만 태화가 옆에서 적절히 조처하면서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몇 시간 후.

“자, 오늘 강의 여기서 마칩니다. 수고했어요.”

이정민이 마무리 인사를 하고 마이크를 껐다. 태화는 마지막 촬영을 기념하듯 자신이 카메라의 레코딩을 정지시켰다.

이제 마지막 촬영이 끝났다. 태화는 시원섭섭함을 느꼈다.

‘끝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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