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20화
태화는 서둘러 나선 정민석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했다.
[민석이 형. 저한테 잘해준 선배였는데.]
[내가 보기에도 사람이 좋아 보였네.]
[솔직히 저 학부 때 졸작 말아먹고 친한 선배 별로 없었거든요. 그때 다가와 준 사람이 민석이 형이었는데……. 왜 저 형한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네요.]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게. 언젠가 다시 만날 수도 있으니 말일세.]
[네? 다시 만나요?]
[태화 군. 자네가 나중에 감독이 되어서 저 선배한테 조명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줄 수도 있네. 그때도 저 선배가 영화를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말일세.]
[저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
몇 달 후.
태화는 오전에 외출하기 전 거울을 보았다.
[영감님. 이제 머리가 많이 자랐네요.]
[지금 보니 자네 분위기가 많이 바뀐 듯하네.]
[뭐가 말입니까?]
[처음엔 소년의 이미지가 강했는데 지금은 턱선도 더 날카로워지고……. 전반적으로 남자다운 인상이네.]
태화는 손으로 자신의 턱을 슬쩍 매만졌다. 확실히 몇 달 전과 비교해 얼굴 살이 빠지면서 턱선이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태화 군. 지금 그 턱으로 종이를 베어도 될 것 같네.]
[영감님. 그런 식으로 책임회피 하지 마세요.]
[책임회피라고?]
[네. 그동안 절 얼마나 많이 굴렸습니까?]
[그건 인정하겠네. 하지만 자네 탓도 있네.]
[내 탓이요?]
[태화 군. 자네의 그 미친 소화력 탓이네.]
박도봉 감독은 그동안 끊임없이 태화에게 새로운 과제를 제시해가면서 태화를 강하게 몰아붙였다. 하지만 태화는 그때마다 왕성한 소화력을 보이며 박도봉 감독이 제시한 과제들을 수행해 냈다.
특히 박도봉 감독의 과제 중 태화를 힘들게 한 건 캐릭터 창조에 관한 부분이었다. 박도봉 감독은 창조할 캐릭터의 수를 늘리는 방법으로 태화를 괴롭히지 않았다.
박도봉 감독은 태화에게 캐릭터의 깊이감을 요구했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요구에 미칠 것만 같았다.
태화가 여태껏 지니고 있었던 상상력엔 한계가 있었다. 28년 인생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뿐이었다.
태화가 박도봉 감독의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선 지식이 필요했다. 태화는 닥치는 대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태화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다양한 자료를 수집했고 활용했다. 그러자 캐릭터 창조 작업도 점점 양과 질적인 측면에서 올라가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할 때 A4용지 한 장도 채우기 버거웠지만, 현재는 A4 네다섯 장 정도는 충분히 채울 수 있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캐릭터에 스토리를 입힐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태화는 현재 단순히 캐릭터의 창작을 넘어서 캐릭터에 스토리를 엮을 수 있는 능력까지 향상된 상태였다.
이건 시나리오로 재조합하는 훈련과 캐릭터를 창조하는 훈련이 시너지를 일으키며 나타난 결과였다.
[영감님. 단지 제 미친 소화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무슨 소린가?]
[영감님이 도와주셨잖아요.]
태화의 말처럼 박도봉 감독은 태화가 벽을 느낄 때마다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박도봉 감독이 제시한 해결책은 절묘했다.
언제나 문제 해결의 입구까지만 다다르게 하는 해결책이었다. 박도봉 감독이 완전한 해결책을 제시한다면 그건 박도봉 감독의 실력이지 태화의 실력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의도대로 문제를 해결해 왔고 현 수준에 이르렀다.
[태화 군. 자네 많이 겸손해졌구먼. 전 같았으면 자기 능력이 뛰어나서 그랬다고 했을 텐데. 안 그런가?]
[크크크. 아마도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알겠더라고요. 영감님의 의도가 뭔지.]
[허허허. 나도 자네가 하루가 성장하는 걸 보며 기뻤네.]
[이제 오늘로 1단계가 마무리되는군요.]
[그러게 말일세. 어느새 오늘이 왔네.]
태화는 자신의 방문을 열고 나왔다. 태화는 몇 개월간 교복처럼 착용했던 모자를 벗은 상태였다. 이젠 굳이 모자를 쓰지 않더라도 땜빵이 보이지 않았다.
“엄마. 다녀올게요.”
거실에 있던 전미경이 태화에게 다가왔다.
“태화야. 이제 나가니.”
“네.”
전미경은 자신의 손으로 태화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머리카락이 좀 자라니까 이제 좀 사람 같다.”
“엄마. 언제는 내가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땐 사람이 아니라 밤톨 같았다. 아주 미운 밤톨.”
전미경은 이렇게 말하면서도 얼굴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전미경은 남편 서준상이 태화가 하자는 대로 하자고 했을 때 불만의 목소리를 냈었다.
“당신 너무 무책임한 거 아냐? 아빠로서 태화를 당연히 말려야 하는 거 아냐?”
전미경은 맏며느리인 이수경에게서도 이번에는 태화가 다를 거라는 말을 들었지만 반신반의했었다.
하지만 전미경의 이런 생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전미경 본인이 태화의 달라진 모습을 직접 보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태화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태화는 바쁜 일상을 소화하느라 그동안 코피도 몇 번을 쏟았었다.
진심은 통한다고 했던가?
태화의 달라진 모습에 전미경도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태화야. 엄마는 지금 네 모습이 보기 좋다. 즐겁니?”
“네. 즐거워요.”
“그래. 힘내 아들.”
“하하. 그럼 밤톨에서 사람으로 변한 저는 나갔다 오겠습니다.”
#.
태화는 영상자료원 데스크에서 교재로 쓸 작품을 대여한 후 일인 감상실로 이동했다. 태화가 대여한 작품은 박도봉 감독의 마지막 작품인 <벌이 날다>였다.
<벌이 날다>의 개략적인 스토리는 이렇다.
남자 주인공 유인호는 미들급 복서로 유망주다. 그러던 어느 날 인호는 코치로부터 승부 조작할 걸 강요받는다.
인호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현실적으로 돈이 급했다. 암에 걸린 여동생의 병원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인호는 승부 조작에 응하기로 하고 링에 선다. 인호의 상대는 자신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선수였다. 잘 진행되던 시합은 한순간 꼬이고 만다.
코너에 몰리던 인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뻗었는데 그게 그만 카운터 펀치가 되고 상대 선수는 KO가 되고 만다.
이 시합의 결과로 인호는 목숨을 위협받는 상태가 되고 쫓기는 신세가 된다. 절체절명의 순간 인호를 위험에서 구해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경찰관 박윤재. 그는 승부 조작 관련 수사를 담당하던 경찰관이다.
인호와 윤재 두 사람은 위험을 헤쳐나가며 승부 조작에 정치 권력의 돈이 개입되었다는 걸 밝혀 나간다.
태화는 <벌이 날다>를 마지막으로 박도봉 감독이 만든 모든 작품을 다 보았다. 박도봉 감독이 만든 100편의 영화들은 장르가 다양했다.
액션 영화가 절반 정도로 가장 많은 편수를 차지했지만 멜로, 코미디, 아동영화, 그리고 당시엔 잘 만들어지지 않았던 스릴러나 추리물도 만들었다.
한마디로 박도봉 감독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연출한 보기 드문 감독이었다.
태화는 <벌이 날다>는 작품을 보면서 꽤 잘 만든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이전에 만들어진 작품과는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영감님. 이 작품은 제작비가 제법 들어간 듯하네요.]
[그렇네. 대충 20억 정도 들었으니까.]
[20억이요?]
태화는 박도봉 감독이 <벌이 날다>를 제작하면서 파산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제작비가 생각보다 많네요.]
[내가 평생 모은 돈을 끌어모은 거네.]
[영혼까지 끌어모으신 거군요.]
[맞네. 내가 살던 집까지 저당 잡히고 제작비를 마련했네.]
<벌이 날다>가 만들어진 시기는 2005년. 이 시기에 20억이면 적은 예산으로 만든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이 만들어진 시기가 2005년이고 내가 환갑인 해였네. 흥행에 성공해서 거하게 환갑잔치나 하려고 했더니……. 환갑잔치는커녕 쫄딱 망했으니. 허허.]
[영감님. 지금 그런 농담이 나오십니까?]
[예전 같으면 이런 농담이 안 나왔겠지만, 지금은 할 수 있네.]
[시간이 많이 지나서 그런 겁니까?]
[아니. 자네가 있기 때문일세. 과거의 나는 실패했지만, 앞으로 자네는 성공적으로 영화감독의 길을 갈 거로 생각하네. 자네가 있는데 이런 농담, 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영감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따로 반박할 말은 없네요.]
[그래. 그럼 본론으로 돌아가겠네. 영화는 잘 봤는가?]
[네. 재밌게 봤어요.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보게.]
[전 <벌이 날다> 작품이 일주일 만에 극장에서 간판을 내릴 작품이란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렇네. <벌이 날다>는 대중들이 그렇게까지 외면할 작품은 아니었네.]
박도봉 감독의 말은 <벌이 날다> 흥행 실패가 작품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작품 외적인 부분이 작동되었다는 의미였다.
[그러니까요. 영감님. 뭔가 있는 거죠?]
태화의 머릿속엔 한 사람이 떠올랐다.
[혹시 이영진이 개입한 겁니까?]
[그렇네.]
[정말입니까?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이영진은 내 존재가 껄끄러웠을 수도 있네. 혹시라도 <벌이 날다>가 흥행에 성공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수익을 낸다면 장차 후환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이영진은 어떻게 개입한 겁니까?]
[자네 <우아한 녀석들>이란 작품 알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영화 모르면 간첩 아닙니까?]
<우아한 녀석들>은 이영진의 두 번째 작품으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새로운 형태를 제시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당시 제작비로는 천문학적인 80억에 이르는 제작비와 화려한 캐스팅 그리고 한반도 핵을 둘러싼 첩보 액션은 당시 화제를 이루었고 천이백만 관객이라는 엄청난 흥행성적을 올린다.
이영진은 <우아한 녀석들>이라는 작품으로 단번에 영화계의 왕좌에 올라선 것이다.
[원래 <벌이 날다>와 <우아한 녀석들>은 개봉 시기가 달랐네. <우아한 녀석들>이 <벌이 날다>보다 개봉 시기가 한 달 정도 뒤였네. 그래서 난 예상보다 많은 스크린 수를 확보할 수 있었네.]
[<벌이 날다> 작품이 나름 괜찮으니까요. 배우 라인 업도 나쁘지 않았고요.]
<벌이 날다>의 출연진은 아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탄탄한 편이었다. 인호의 역할을 맡았던 유재훈은 당시 인기가 상승하고 있었던 신예 20대 연기자였고 윤재 역할을 맡았던 중년 연기자 정민기는 중후하고 안정적인 연기로 극의 중심을 잡았었다.
[그런데 개봉을 얼마 안 남겨두고 갑자기 <우아한 녀석들> 개봉 시기가 앞당겨졌네. <벌이 날다>와 같은 날 개봉하기로 한 거네. 그 결과 내가 확보했던 스크린 수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네. 만약 <우아한 녀석들>과 같은 날 개봉하지 않았다면 <벌이 날다>는 최소한 제작비 정도는 무난히 회수했을 걸세.]
[얼마나 줄었습니까?]
[애초에 <벌이 날다>는 백 개 이상의 스크린 수를 확보했었네. 하지만 <우아한 녀석들> 때문에 <벌이 날다>가 확보했던 스크린 수는 이십여 개로 줄어들었네. 한마디로 망한 거네.]
[극장주들 너무한 거 아닙니까? 의리 없이…….]
[태화 군. 극장주들을 탓할 거 없네. 그들은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네. 그래도 <벌이 날다>를 개봉하게 해준 그 극장주들이 고마울 뿐이네.]
[참 마음도 너그러우십니다.]
[지금도 개봉 당일이 생각나네.]
[어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