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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9화 (19/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9화

전철 안.

태화는 동영상 강의 촬영을 마치고 귀가하기 위해 전철을 타고 있었다.

[태화 군. 이제부터 새로운 과제를 주겠네.]

태화는 순간 가슴속에서 전의가 불타올랐다.

[좋습니다. 뭡니까? 그 과제가.]

[매일 한 명의 캐릭터를 창작할 것.]

[매일 한 명이요?]

태화는 캐릭터를 창작해야 한다는 데에는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매일 한 명의 캐릭터를 창작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선 쉽게 동의할 수 없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나중을 위해서네.]

[나중이요?]

[앞으로 시나리오를 쓸 때를 대비해서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이 이런 말을 하는 의도를 알아챘다.

[이제부터 시나리오를 쓴다고 해서 캐릭터가 자동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으니까요.]

[그렇네. 이제부터 자네는 매일 연구한 캐릭터를 저축해 둔다고 생각하게.]

[영감님도 그렇게 하셨나요?]

[나도 당연히 그렇게 했네. 자, 이제 새로운 과제를 위한 조건을 걸겠네.]

[조건이요?]

[무조건 캐릭터를 연구하라는 건 막연하지 않은가?]

[그렇긴 하죠.]

[조건은 자네가 매일 현실에서 눈으로 보게 되는 사람 중 한 명을 모델로 삼을 것. 제대로 하려면 인터뷰도 해야겠지만 그 정도까지 요구하지 않겠네.]

[왜 현실에서 눈으로 보는 사람으로 한정합니까?]

[그냥 하라고 하면 막연하지 않은가?]

우문현답이었다. 매일 하나씩 캐릭터를 연구해야 하는데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버틸 수는 없다.

[그럼 단순히 첫인상만으로 해도 된다는 겁니까?]

[그렇네. 첫인상으로 꽤 많은 걸 얻을 수 있네. 태화 군.]

[네.]

[저쪽 끝에 서 있는 여성을 보게.]

[저기 검은색 정장을 입고 머리를 묶은 여성 말인가요?]

[그렇네. 어떤 것 같나?]

[벌써 과제 시작입니까?]

[한번 첫인상으로 캐릭터를 만들어 보게.]

사람이 첫인상으로 얻는 정보는 의외로 많다. 성별, 개략적인 나이, 인상, 피부 톤, 표정, 헤어와 패션 스타일 등. 이러한 정보를 하나로 묶으면 하나의 캐릭터가 형성된다.

[저 여성은 일단 30대 초반으로 보이는군요. 차분한 머리 스타일과 진하지 않은 화장, 그리고 어두운색 정장을 입고 있습니다. 그녀는 보수적인 분위기의 직장에 다닐 가능성이 큽니다.]

[태화 군. 좋은 분석이었네.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미지로 표현하게 마련이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네. 캐릭터 창작을 위해선 첫인상으로 얻은 것에 살을 붙여야 하네.]

[영감님은 제가 사람의 첫인상으로 얻은 정보에 제 상상력을 덧붙이라는 말이군요.]

[맞네. 자네는 그 과정을 통해서 한 명의 캐릭터를 창작하는 훈련을 하게 되는 걸세. 30대 초반의 보수적인 분위기의 직장에 다니는 여성에 새로운 상상력을 더해보게. 그녀가 다니는 직장이 선망하는 대기업인지 아니면 중소기업인지, 그녀가 좋은 대학을 나왔는지 아니면 지방대학을 나왔는지, 성격은 보이는 것처럼 차분한지, 아니면 덤벙대는지, 애인은 있는지 없는지, 결혼은 했는지. 혹시 결혼했다면 아이는 있는지, 연봉은 얼마이고 차는 소유하고 있는지 등 수많은 상상력이 결합 될 수 있고 그에 따라 캐릭터가 새롭게 창조될 수 있네.]

[결코, 쉬운 작업은 아니겠군요.]

[태화 군. 설마 재능과 욕망이 넘치는 자네가 이걸 못한다고 하지 않을 거로 믿네.]

박도봉 감독은 태화의 승부 욕을 은근히 자극하고 있었다.

[영감님은 재능과 욕망이 넘치는 제가 그걸 못 할 거로 생각하시는 겁니까?]

[난 그런 생각을 일도 한 적이 없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걱정하지 마세요. 해낼 테니까요.]

#.

한 달 후.

태화가 노량진에 오고 나서 가장 어려웠던 건 식사 문제였다. 처음 며칠 동안은 분식집만 갔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험생들에게 어느 정도 근처 식당 정보를 취합한 상태였다. 그 결과 현재 태화는 싸고 맛있는 식당도 몇 군데 알고 있다.

태화가 그중 자주 이용하는 곳은 고시 식당으로 불리는 곳이다. 가격이 싸고 뷔페식이라 가성비가 괜찮은 편이었다.

태화는 학원 근처 고시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밖으로 나왔다. 태화는 오늘 고시 식당의 메뉴가 만족스러웠다.

[영감님. 이제 이곳 생활도 익숙해지는군요.]

[태화 군. 한 가지 명심할 게 있네.]

[네. 말씀하시죠.]

[이곳의 의미는 자네의 영상입문이네.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되네.]

[알고 있습니다. 조만간 다음 단계를 위해서 이곳을 떠나야 하겠죠.]

[그렇네. 자네는 장차 영화감독이 되어야 하네. 안타깝게도 이곳에서 영화계로 진출할 수는 없네.]

[그냥 이곳에 있는 동안 제가 맡은 일에 충실할 뿐입니다.]

태화는 도로를 건너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서태화!”

태화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야, 혹시나 했는데 태화 맞네.”

“민석이 형?”

“그래, 나다. 너를 여기서 볼 줄은 몰랐다. 난 네가 모자 쓰고 머리가 짧아서 아닌 줄 알았다.”

정민석은 태화의 학부 선배로 학번으로 3학번 위였다.

“그건 내가 물어볼 말이에요. 형이 여기 어쩐 일이에요?”

“여기 왜 있겠냐?”

말을 마친 정민석이 몸을 살짝 돌려 자신의 가방을 보여주었다. 정민석은 체격이 좋은 편이었다. 180이 넘는 키에 몸무게도 90㎏ 정도 나갔다.

게다가 짧은 머리 스타일은 단단한 이미지를 주었다. 이런 걸 고려해도 정민석의 가방은 꽤 컸다.

역시 노량진 수험생은 두꺼운 수험서를 가지고 다니기 위해 큰 가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른바 필수 아이템이다.

“형, 공무원 시험 준비하러 왔어요?”

정민석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뭐. 그나저나 반갑다. 근데 너도 공시 준비하러 온 거야?”

“그건 아니고.”

“그럼?”

“촬영 알바해요.”

“촬영 알바?”

“네. 저도 언제까지 집에 손 벌릴 순 없잖아요.”

“그렇긴 하지.”

태화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5시 30분이었다.

아직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형, 몇 년 만에 만났는데, 어디 가서 커피나 한잔해요. 시간 되죠?”

정민석도 태화를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반가움에 대답도 빨랐다.

“그럴까?”

#.

태화와 정민석은 대로변 사이 골목길로 들어갔다. 한 5분 정도 걸어 들어가자 작은 카페가 보였다.

카페 앞에는 테이크 아웃을 해가려고 몇몇 수험생들이 줄 서 있었다.

수험생들이 테이크 아웃을 하기 위해서 줄을 선 것과 다르게 카페 안은 테이블이 비어 있었다. 저녁 강의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커피값은 태화가 지불하려고 했지만, 정민석이 먼저 계산했다.

“형, 잘 마실게요. 안에 들어가서 마실까요?”

“그렇게 하자.”

태화와 정민석은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크 아웃을 전문적으로 하는 카페라서 그런지, 안의 공간은 비좁았지만 그렇다고 크게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태화와 정민석이 마주 보고 앉았다.

“민석이 형. 저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뭐가 궁금한데?”

“내가 알기론 형, 영화판에서 일하는 거로 알고 있었는데…….”

“…….”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 아니죠?”

정민석은 다소 씁쓸한 표정을 지은 채 대답했다.

“그래. 일하고 있었지.”

“무슨 일 있었어요?”

정민석은 태화의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바지 왼쪽 다리 부분을 걷어 올렸다. 정민석의 왼쪽 무릎에 길게 상처가 나 있었다. 바로 수술 자국이었다.

정민석의 수술 자국을 보자 태화가 깜짝 놀랐다.

“형! 이게 뭐예요?”

“뭐긴 뭐겠냐? 영광의 상처지.”

“영광의 상처라뇨?”

대답하기 전 정민석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정민석의 미소는 왠지 서글펐다.

“조명 발판에서 떨어졌다. 떨어지면서 왼쪽 무릎이 바닥에 부딪혔고…….”

“네? 정말요?”

정민석이 참여했던 작품은 <사랑의 사기꾼>이라는 작품으로 로맨틱 코미디 장르였다. 정민석은 이 작품에 조명팀으로 참여했었다.

잠시 뜸을 들인 정민석의 설명이 이어졌다.

“사고당한 게 야간에 공원 촬영이었어. 나는 발판을 쌓은 곳에 올라가서 조명을 컨트롤하던 중이었어.”

“…….”

“근데 갑자기 발판 이음새가 풀린 거야. 난 중심을 잃고서 바닥에 떨어졌고……. 결국, 이렇게 된 거지.”

태화는 당시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추락하고 나서 고통스러워하는 정민석의 모습에 진저리가 쳐졌다.

“형,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되긴 병원에 실려 갔지. 수술받고…….”

“보상은 받았어요?”

정민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작사에서 병원비도 부담하고 산재 인정도 받았어.”

“다행이네요.”

정민석이 병원비와 산재 인정을 받은 건 그나마 <사랑의 사기꾼>이라는 작품이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제작사에서 제작했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제작사는 스태프들에게 4대 보험에 가입해 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대우를 받는 건 일부에 불과하다.

영세한 제작사는 4대 보험은커녕 촬영 현장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숨기기 급급한 곳이 많다.

영화 스태프들은 저임금에 다쳐도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영화 스태프들을 가리켜 복지의 사각지대라고 말하곤 한다.

“형,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어요? 학부 때 형은 조명이 빛의 예술이라고 좋아했었잖아요.”

“…….”

“승부를 내고 싶다고.”

태화의 말을 들은 정민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태화야. 무릎에 철심 몇 개 박히고 나니까 생각이 바뀌더라. 그래도 치료가 잘 돼서 움직이는 데 큰 문제가 없지만.”

“…….”

“비가 오려고 하면 젊은 놈이 벌써 무릎이 시큰거린다. 다시 또 다친다고 생각하면…….”

정민석의 눈에 살짝 물기가 서렸다. 시간이 지났어도 그때의 고통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젠 솔직히 두렵다.”

“몰랐어요. 형한테 그런 일이 있었는지……. 솔직히 제가 좀 아싸잖아요.”

태화는 자신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졸작 주연 이후 학부에서 아싸의 길을 걸었다. 자신의 흑역사를 두고서 수군대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학원 다닌 지 얼마나 된 거예요?”

“얼마 안 됐어. 나도 앞으로 먹고는 살아야지. 내가 솔직히 무슨 스펙으로 기업체에 취업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나마 이 길이지.”

“근데, 형. 혹시 다시 조명 일할 기회가 오면 할 거예요?”

“글쎄다.”

정민석은 대답을 얼버무렸지만 딱 잘라 아니라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만큼 영화를 사랑했고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정민석은 대답 대신 시간을 확인했다.

“태화야 시간 됐다. 가자.”

“알았어요. 형.”

태화와 정민석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페에 나선 후 태화와 정민석은 바로 헤어졌다.

정민석이 강의실 자리를 맡아야 한다고 먼저 서둘러 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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