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8화
노량진역을 나온 태화는 공탑으로 향했다. 공탑은 10층 건물인데 태화가 가야 할 층은 5층이다.
엘리베이터를 탄 태화는 5층에서 내린 후 복도 끝으로 이동했다. 태화가 복도 가장 구석진 곳으로 이동하자 공탑 영상팀 사무실이 나타났다.
태화가 노크하자 바로 안에서 반응이 왔다.
“네. 들어오세요.”
태화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몇몇 직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들 중 태화가 만나야 할 이주성도 있었다.
이주성은 태화를 보자마자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서며 먼저 반가움을 표했다.
“아, 태화 씨. 일찍 왔네요.”
태화도 이주성이 반갑기는 마찬가지였다.
“네. 잘 지내셨어요?”
태화의 현실적인 고민을 해결해 준 사람이 바로 이주성이지 않은가.
[영감님. 사람 모른다더니.]
[왜 그러나?]
[이주성 저 사람 처음엔 참 무능한 인상이었는데요.]
[허허. 그렇네. 지금도 그때 헤매던 모습이 선한데 말일세.]
[그러게요.]
이주성은 태화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불렀다.
“태화 씨. 이쪽으로 잠시 오시겠어요?”
“네.”
이주성은 태화와 함께 사무실 구석으로 갔다. 사무실 구석에는 카메라와 삼각대 그리고 기타 촬영 장비가 구비되어 있었다.
“태화 씨. 저녁반은 6시 40분에 시작해서 10시 30분에 끝납니다. 태화 씨는 수업 시작 30분 전까지 이곳으로 오면 됩니다.”
“알겠어요.”
“이곳에 와서 촬영 장비를 가지고 해당 강의실로 가서 촬영 세팅을 하면 됩니다.”
“네.”
“그럼 장비를 가지고 갈까요?”
태화는 촬영 장비를 챙겨서 이주성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
#.
태화와 이주성은 803호 강의실로 들어섰다.
“태화 씨가 이 강의실에서 촬영할 과목은 국어입니다.”
“이곳 강의실이 꽤 크네요?”
“큰 편이죠. 과목 담당인 이정민 교수님도 인기가 있는 편이에요.”
“이 강의실은 몇 명이나 들어올 수 있죠?”
“꽉 채우면 한 400명 정도 될 겁니다.”
강의실을 한번 훑어본 태화는 바로 카메라 포지션을 생각했다.
“촬영 세팅할 곳은 어딥니까?”
이주성은 태화의 질문을 받고서 피식 웃었다. 태화가 적극적으로 임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와요.”
이주성은 강의실 뒤쪽으로 이동했다. 강의실 길이를 전체로 봤을 때 칠판으로부터 5분의 3 정도 되는 위치였다.
“여기에요.”
이주성이 안내한 곳엔 빈 책상 위에 ‘촬영 지정석’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태화 군. 촬영 지정석 위치가 좋구먼.]
박도봉 감독의 말처럼 촬영석의 위치는 약간 뒤쪽이면서 가운데에 있었다.
[아무래도 강의를 촬영해야 하니까요.]
[그래도 이건 아무 생각 없이 결정하지 않은 것 같네.]
[설마 이 정도도 못 하겠습니까?]
태화는 우선 삼각대를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꺼냈다. 태화의 모습을 본 이주성이 툭 던지듯 말했다.
“세팅하시게요?”
“네. 하다가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말해주세요.”
“그래요.”
이주성은 딱히 태화를 말리지 않았다. 저번 일로 이주성은 태화를 어느 정도 신뢰하고 있었다.
태화는 삼각대의 세 개의 다리 중 한 개의 다리만 길게 늘였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카메라를 책상 위에 거치를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태화는 길이를 늘이지 않은 두 개의 다리를 책상 위에 두고 길게 늘인 한 개의 다리는 바닥에 닿게 세팅했다.
태화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건 며칠 전 화면 문제를 해결하러 갔을 때 카메라가 세팅되었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박도봉 감독이 상황에 맞게 적절히 코치해 주면서 태화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장비를 세팅해 갔다.
이 모습을 본 이주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화 씨. 역시. 잘하시네요.”
“문제는 없는 건가요?”
“네. 문제없습니다. 지금처럼 하면 됩니다.”
카메라 세팅 이후 오디오 연결이 남았지만 이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잠시 후.
강사인 이정민이 강의실로 들어왔다. 이주성은 퇴근하지 않고 태화 옆에 남아 있었다.
보통 첫 촬영을 하게 되면 직원이 옆에서 봐줘야 하기 때문이다.
태화는 카메라 프레임에 이정민의 모습을 담았다. 액정화면으로 이 모습을 본 이주성은 만족했다.
“좋네요. 이 정도로 잡으시면 됩니다.”
태화는 바로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눌렀다.
“태화 씨. 이 수업은 좀 주의하셔야 합니다.”
“네?”
“교수님이 좀 많이 움직이세요. 교수님 놓치지 말고 따라가면서 촬영하셔야 합니다.”
이정민의 강의는 인기가 있는 편이지만 컴플레인도 많이 들어오는 과목이기도 하다. 강사가 많이 움직이면 화면이 산만해져서 집중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학원 직원들도 이 점을 이정민에게 어필했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이정민은 자신의 강의 스타일을 간섭한다고 화를 냈다.
결론은 포기. 그리고 욕받이는 결국 학원 게시판과 직원이 된 상태다.
이정민이 마이크를 켜고 말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이정민입니다.”
이정민은 말을 마치자마자 이주성이 말한 대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태화는 일단 이정민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영감님. 이거 쉽지 않겠는데요?]
[이거 뜻하지 않은 곳에서 가르칠 일이 생겼구먼.]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네. 무엇보다 가르침이란 지금처럼 닥쳐야 효과가 큰 법이네.]
[그렇게 남 일 말하듯 하지 마시라고요.]
[진정하게 태화 군. 해법은 그렇게 어렵지 않네.]
[어렵지 않다고요?]
[내가 어제 뭐라고 했지?]
[눈으로 세상을 관찰하고 프레이밍 하라고 했습니다.]
[자. 그럼 현재 상황을 보겠네. 이 시점에서 프레이밍은 할 필요가 없네.]
[그렇군요. 이미 프레임이 잡혀 있는 상황이니까요.]
[태화 군. 그럼 뭘 해야 하는가?]
[당연히 관찰이죠. 영감님, 잠깐만요]
태화는 박도봉 감독과 대화하는 사이 잠깐 이정민을 놓칠 뻔했다. 1초 정도 되는 짧은 순간 카메라 액정화면에서 이정민이 사라졌다.
‘아차.’
태화는 재빨리 이정민을 따라갔다.
태화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던 이주성은 순간 태화에게 주의를 시키려다가 관뒀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용인할 수 있는 정도였다.
태화는 촬영에 다시 집중하면서 박도봉 감독과의 대화를 이어갔다.
[휴. 이정민, 저 사람은 왜 저렇게 움직이는지.]
[허허. 태화 군. 그래도 순간 집중력을 잃지 않았네. 계속해도 괜찮겠는가?]
[네. 어떻게든 해결해야죠. 언제까지 이렇게 촬영할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제가 어떻게든 따라갈 겁니다.]
[좋네. 그럼 계속 이어가겠네.]
[하시죠.]
[현 문제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프레임을 벗어나야 하네.]
[프레임을 벗어나요?]
[그렇네. 계속 프레임에 집착하게 되면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말을 듣고서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냉철하게 바라보았다. 현재 자신은 카메라의 프레임 안에 이정민을 넣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영감님. 프레임을 벗어나라는 말은 이제부터 이정민 저 사람을 중심으로 보라는 말인가요?]
[옳거니. 바로 그거네.]
박도봉 감독은 태화의 이 영특함이 좋았다. 가르치는 사람으로선 이렇게 제대로 반응이 오면 흥이 날 수밖에 없다.
[자네가 지금 해야 할 건 프레임에 이정민을 가두는 데 중심을 두는 게 아니라 이정민이라는 저 사람의 움직임이네. 이정민의 움직임을 자네가 예측할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수월해질걸세.]
태화는 움직임 예측이라는 말에 귀가 확 뜨이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겠군요.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으니 카메라 움직임도 산만하지 않을 거고요.]
그랬다. 태화는 지금까지 이정민의 움직임 예측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정민의 움직임에 수동적으로 따라가기만 했다. 내가 프레임을 주도하지 못한 거다. 하지만 내가 이정민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다면 프레임을 주도하는 건 내가 된다.’
태화는 이후 이정민의 움직임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그러자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정민은 움직이기 전에 미리 움직일 그 방향으로 어깨를 살짝 움츠리는 경향이 있었다.
[영감님. 이정민의 움직임. 이제 알 것 같습니다.]
[허허. 발견했는가?]
태화가 이정민의 성향을 파악한 이후 촬영은 상당히 부드럽게 이어졌다. 태화가 미리 이정민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그에 따라 카메라를 움직였기 때문이다.
태화 옆에서 지켜보던 이주성도 매우 만족했다. 이주성이 태화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태화 씨. 아주 좋은데요?”
“좋습니까?”
“네. 화면도 그렇게 어지럽지 않고 좋네요. 이거 컴플레인 좀 줄겠어요.”
이주성의 얼굴엔 순간 안도감이 흘렀다. 풀기 힘든 고민거리를 해결한 상황 아닌가.
이것도 이주성의 성과라면 성과였다.
현재 태화의 시야는 분명 처음보다 넓어진 상태였다. 초반엔 카메라의 프레임 안에 머물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현재 태화는 카메라의 프레임과 이정민을 동시에 보고 있었다.
[영감님. 문제 해결입니다.]
[자네가 잘 따라와 준 덕분이네.]
[근데 영감님은 처음부터 이정민의 움직임을 발견했습니까?]
[아니. 그렇지 않네.]
[그럼 어떻게 해결책을 알고 있었습니까?]
[어떤 패턴이 있을 거라고 판단했을 뿐이네.]
[패턴이요?]
[그렇네. 난 그동안 수많은 작품을 찍으면서 연기자들을 봐왔네. 그리고 연기자들은 각자 가지고 있는 행동 패턴들이 있었네.]
[영감님은 이정민 저 사람도 행동 패턴이 있다고 판단하신 거군요.]
[그렇네. 연기자나 이정민이나 어차피 같은 사람 아닌가?]
[크크. 이래서 경험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하는 거군요.]
[만약 내가 과거에 프레임에만 집착했다면 연기자들의 행동 패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걸세.]
[프레임을 위해서 때론 프레임을 벗어나야 하는 거군요. 이제야 그 의미를 알겠어요.]
[그 의미를 알았으면 됐네.]
#.
1교시 촬영을 마치고 쉬는 시간.
태화를 바라보는 이주성의 표정이 밝았다.
“태화 씨. 전 그만 퇴근해도 되겠네요.”
이주성은 태화가 만약 1교시 촬영이 불안했다면 퇴근을 못 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태화가 안정적으로 촬영하자 퇴근해도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그러세요. 빨리 들어가서 쉬세요.”
“정말 이정민 교수님은 촬영하기 힘들다고 다들 엄살을 부리는 강의인데, 태화 씨 덕에 한시름 놓았어요.”
“하하. 그런가요?”
“네. 그동안 촬영하는 사람들이 며칠 못 버티고 바꿔 달라고 난리였죠.”
“뭐. 쉽지는 않겠지만 최대한 버텨보겠습니다.”
이주성이 갑자기 태화의 손을 잡았다.
“태화 씨. 꼭 버텨주세요. 제발요.”
이주성의 얼굴엔 절실함이 묻어났다. 태화도 이주성이 왜 그러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순히 이정민의 강의가 촬영하기 어려워서가 아님을.
“알겠습니다.”
“태화 씨. 고마워요. 그럼 수고하세요.”
“네. 들어가세요.”
이주성은 태화와 인사를 나누고서 그 자리를 떴다. 이주성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 보였다.
이주성의 모습을 본 태화는 마음속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영감님. 처음입니다.]
[뭐가 말인가?]
[제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말을 듣는 게.]
[그랬는가? 나도 자네가 즐거워하니 기분이 좋네. 태화 군. 진로를 바꾼 게 잘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네. 잘한 거 같아요.]
[그게 다 내 덕일세.]
[영감님. 좀 뻔뻔해지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