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7화
[그게 뭡니까?]
[난 그걸 욕망의 크기라고 생각하고 있네.]
[욕망의 크기요?]
[인간은 누구나 욕망을 지니고 있지만, 그 크기는 다르네.]
[욕망의 크기요? 중요한 건 재능 아닌가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재능 없이 욕망의 크기만 크다면 머저리에 불과하겠지.]
[그러니까요.]
[하지만 재능은 현실이라는 벽 앞에 너무나 취약하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말을 듣고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재능 믿고 까부는 놈 금방 쓰러진다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영감님. 반박 불가네요. 인정합니다.]
[결국, 재능이 현실의 벽을 넘게 하는 건 욕망이네. 나에게 왔었던 그 수많은 제자의 재능은 결코, 모자라지 않았네.]
[욕망이 있기에 버틸 수 있다는 말이군요.]
[맞네. 욕망이 있기에 계속 버티면서 도전할 수 있는 걸세. 어쨌든 이영진은 애초에 욕망이 큰 녀석이었어. 욕망의 크기가 컸기 때문에 지금의 위치에 있는 걸세.]
[그렇다면 전 욕망의 크기가 아주 크겠군요.]
[허허허. 자넨 이영진을 넘어서야 하지 않나? 난 자네가 가진 욕망의 크기가 본능적으로 그런 대답을 하게 했다고 보네.]
[영감님은 내가 겸손하게 대답했다면 실망하셨겠군요.]
[아마도 그랬을 걸세. 그런데 태화 군. 어떤가?]
[뭐가 말입니까?]
[이영진은 재능과 욕망의 크기가 어마어마한 인물일세.]
태화는 이영진을 생각하자 오로지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왕좌.
최고 중의 최고가 앉는 바로 그 자리.
이영진은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영진이 현재 영화계에서 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겠죠.]
[이영진은 자네 말처럼 영화계의 킹이 맞네. 자신 있나?]
[이영진이 분명 대단한 인물이긴 해요. 그게 현실이기도 하고요.]
[두렵나?]
태화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영진 그도 결국 사람이잖아요.]
태화의 대답은 간결했지만, 현재 이 상황에서 더할 나위 없는 대답이었다.
이 대답에 다른 말을 첨가할 필요가 없었다.
[태화 군. 방금 그 대답. 내 맘에 아주 쏙 드는 대답일세. 허허허.]
박도봉 감독은 머지않은 미래에 펼쳐질 태화와 이영진의 대결을 상상해 보았다.
한 명은 자신이 가장 총애했지만 배신한 인물이고 다른 한 명은 신이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기회를 준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 싸움은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한 명은 현재 영화계의 킹이고 다른 한 명은 그 킹을 쓰러뜨리고 새롭게 왕좌에 오르려는 자의 싸움이었다.
‘그 싸움. 아주 흥미 있는 싸움이 될 거야.’
박도봉 감독이 재밌는 상상을 할 즈음, 문득 그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 이제야 알겠어. 내 인생이 왜 그렇게 점점 비참하게 흘러갔는지. 나는 킹이 될 사람이 아니었던 거야.’
영화계에서 비주류였던 박도봉 감독은 항상 자신이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를 갈망했었다. 그래서 칼을 갈며 준비했던 영화가 바로 <잔인한 서울>이었다.
하지만 <잔인한 서울>은 <노을 속으로>로 이름을 바꾼 채 박도봉 감독 자신이 아니라 운명의 장난처럼 이영진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이후 <노을 속으로>는 이영진이 킹의 위치에 올라가는 데 시작점이 된다.
마지막 작품 <벌이 날다>는 박도봉 감독 자신을 킹의 위치에 올릴 작품이 아니었다. 박도봉 감독의 집착이 그렇게 될 거라고 착각했을 뿐이었다.
‘내가 킹이 되려고 했기 때문에 인생의 말년이 비참했던 거다.’
#.
다음 날.
태화는 박도봉 감독과 오전에 영화 분석을 하고 나서 길거리 벤치에 앉았다.
[태화 군. 영화 분석과 함께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있네.]
[새로운 과제인가요?]
[그렇네.]
[알려주세요.]
[과제를 알려주기 전에 영화 연출 본질에 관해서 말해줘야 할 것 같네.]
[네.]
[영화 연출은 학문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응용의 영역이네. 그래서 많이 해본 사람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네.
[그런데 많이 할 수가 없잖아요.]
영화를 만드는 데 기본적으로 시간과 돈이 든다. 아무리 짧은 단편을 만들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주 현실적인 대안이 있네.]
[현실적인 대안이요?]
[그렇네. 습관을 만들면 되네.]
[습관이요?]
[자네가 습관을 만드는 게 새로운 과제의 핵심일세. 태화 군. 이제부터 자네의 눈을 카메라로 활용하게.]
[그게 무슨 소립니까? 스마트폰도 카메라가 있습니다.]
[아니. 꼭 자네의 눈으로 해야 하네.]
[굳이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뭐든 처음에 감각을 키울 때는 본인의 감각기관을 사용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네. 스마트폰의 카메라는 본인의 감각기관이 아니라 도구일 뿐이네.]
[사람이 글자를 배울 때 직접 손으로 써보는 것과 비슷한 거군요.]
[그렇네. 실제 영화 촬영 때 사용하는 카메라도 사실은 사람의 눈을 대신할 도구일 뿐이네. 게다가 사람의 눈은 별다른 도구 없이 움직임을 줄 수도 있네.]
태화는 이 순간 박도봉 감독의 설명에 집중하고 있었다.
[영감님. 계속하세요.]
[현재 자네는 가만히 있네. 고정된 카메라라고 할 수 있지. 자네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 패닝이 되는 거고 위, 아래로 움직이면 틸 업, 틸 다운이 되는 걸세.]
[만약 제가 움직인다면 카메라 무빙이 되겠군요. 혹은 핸드헬드가 될 수도 있고요.]
[그렇지.]
[하지만 문제가 있어요.]
[문제?]
[눈은 시야가 너무 넓잖아요.]
[태화 군. 그래서 눈으로 봐야 한다는 말이네. 내가 연출은 프레이밍에 관한 거라고 했던 말 기억하는가?]
[네. 아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프레이밍은 간단히 말해서 내가 보여주고 싶은 걸 보여주는 거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이 말한 요지를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영감님 말은 넓은 시야로 세상을 관찰하고 거기서 내가 원하는 부분을 프레이밍 하라는 말이군요.]
[바로 그거네.]
태화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프레임을 만들었다. 그런 후 왼쪽 눈을 감았다.
그러자 자신의 손으로 만든 프레임 안으로 차들이 지나갔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나갔다. 태화가 만든 프레임 안에 또 다른 세상의 풍경이 담겼다.
[영감님. 뭔가 다르게 보입니다.]
[어떻게 다르게 보인다는 건가?]
[지금까지는 아무 생각 없이 눈에 보이는 대로 세상을 봤습니다. 전 같았으면 이곳은 그냥 평온한 오후 정도로 봤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프레임이 잡힌 곳은 내가 보는 세상이라는 게 확실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기 몇 명의 사람들이 뛰어가는 모습을 중심으로 프레임을 잡으면 평온한 오후보다는 역동성이 느껴져요. 평온함 속에 역동성이라고 할까?]
[태화 군. 평온함에서 역동성을 찾아낸 건 아주 잘한 걸세. 그럼 좀 더 나가보세나. 평온함과 역동성 그 두 가지는 모순된 이미지네. 이제 자네는 그 두 개를 연속된 컷으로 이어 붙인다고 상상해 보게.]
태화는 잠시 생각에 잠긴 후 대답했다.
[평온한 풍경 속에 등장인물이 어디론가 뛰어가는 이야기가 되겠죠. 아, 영감님이 무슨 말 하려는지 알 것 같아요.]
[말해보게.]
[관객은 어디론가 뛰어가는 등장인물에 관심을 가지고 보겠죠. 왜냐하면 평온한 일상에서 등장인물이 뛰어가기 때문입니다. 무슨 중요한 일이 있다고 생각할 거고요.]
[그렇지. 그럼 그 뒤에는 어떤 장면이 붙어야 하는가?]
[등장인물이 뛰어간 이유가 나와야 합니다. 가령 약속 시간에 늦은 것 같은.]
[바로 그거네. 그렇게 해야 이야기의 연속성이 생기는 걸세.]
[단지 프레이밍만이 아니라 연속성까지 나가셨네요.]
[프레이밍과 연속성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일세. 사진작가는 한 컷으로 의미를 담아내지만, 영화감독은 컷의 연속성으로 그 의미를 전달해야 하네. 자네가 영화감독이 되면 콘티를 작성해야 하고 콘티는 바로 연속성을 전제로 하는 것일세.]
[결국 프레이밍이 콘티의 기초가 될 수 있다는 말이군요.]
[역시 자네는 말귀를 잘 알아듣는구먼. 자네는 연기보다 연출에 확실히 재능이 있는 거 같네.]
[전 같았으면 화를 냈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박도봉 감독은 태화가 즐거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태화의 말투가 바로 증거였다.
태화의 말투에는 신남이 묻어 있었다.
[태화 군. 어떤 일이든 즐긴다는 것만큼 좋은 재능은 없네. 조금 빨리 깨우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재능일세.]
[인정합니다. 재미없이 의무감에 그 일을 하다 보면 실력도 늘지 않고 오히려 힘만 들 뿐이잖아요. 언제부턴가 연기는 저에게 의무가 되어버렸어요. 지금 생각해 보니 악으로 한 거였어요.]
[태화 군. 이제부터는 즐기게.]
[그럴 겁니다.]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겠네. 자네의 눈을 카메라로 활용하는 건 영화를 보고 씬을 분석하는 것과 다른 차원이네.]
[영감님.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내가 직접 만든 프레이밍 아닙니까?]
[맞네. 자네의 눈으로 현실을 직접 프레이밍을 하는 거네. 자네가 그 훈련에 익숙해질수록 연출에 관한 내공도 늘어나게 될 걸세.]
[연출에 관한 내공이 늘면 당연히 씬 분석하는 데도 시간이 대폭 단축되겠군요.]
[바로 그거네.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거지.]
#.
다음 날.
태화는 영상자료원에서 박도봉 감독의 지도하에 연출교육을 소화한 후 전철역으로 향했다.
태화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바로 노량진이었다. 태화는 당산역에서 9호선 노량진 행 열차를 탔다.
[태화 군. 며칠 만에 다시 노량진에 갈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네.]
[그래도 수강 신청을 하러 가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게, 말일세. 촬영 알바라니.]
[잘된 거 아닙니까?]
[급한 불은 끄게 됐으니 잘된 일이네.]
[네. 어쨌든 당장 저한테 필요한 건 돈입니다.]
태화에겐 이영진이라는 거물을 넘어서야 하는 목표가 있지만,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태화는 이제 부모님에게서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처지다.
즉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결국, 태화가 알바를 해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다.
태화는 어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그 상대는 학원 영상팀 직원, 이주성이었다.
“실례지만 이주성 님 핸드폰이죠?”
-네. 그런데요?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서태화라고 합니다.”
-아!
이주성은 태화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솔직히 태화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이주성은 태화의 이름을 듣자마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서태화 씨. 기억하고 있습니다.
“혹시 아직 촬영 알바 구하고 있습니까?”
-네. 구하고 있습니다. 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네. 한번 찾아가려고 하는데 괜찮으신지요?”
-네. 저야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요즘 새로 강의 시즌이 시작돼서 사람이 부족하거든요.
“그럼. 내일 바로 찾아뵙겠습니다.
-하하. 저야 고맙죠.
태화가 알바를 구하는 일은 비교적 쉽게 풀리고 있었다. 이 바탕엔 지난번 잘못된 카메라 세팅을 해결해 준 게 컸다.
만약 태화가 귀찮다는 이유로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나서지 않았다면 촬영 알바를 구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감님. 그래서 사람이 맘을 곱게 써야 하나 봅니다.]
[허허. 그렇지. 내 말 들어서 손해 볼 일 없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