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6화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사연을 듣고서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박도봉 감독의 짙은 비애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럴 땐 박도봉 감독이 다시 말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태화 군. 나는 영화판에서 비주류였네. 만약 내가 그 작품을 거부했다면 제작자들이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네. 어쨌든 난 영화감독으로 사는 삶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으니까. 그래도 난 <영웅들>이라는 작품을 맡지 않았어야 했네.]
[영감님. 그땐 어쩔 수 없었던 상황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때 내 판단은 잘못됐던 거네.]
[이유가 뭡니까?]
[감독은 여러 가지 사항을 판단하고 실행해야 하는 자리일세. 그 판단에는 그 작품을 선택해야 하는지 아닌지도 포함되네.]
[그럼 이 작품을 애초에 선택하지 말아야 했단 말인가요?]
[그렇네. 나는 그때 <영웅들>이란 작품이 어떻게 만들어질지 빤히 알고 있었네. 그 결과도 내 생애 최악의 작품이 될 거라는 걸. 그런데도 난 그 작품을 선택했네. 두려움 때문이었지.]
[두려움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감정입니다. 그렇게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네. 그때 난 거부했어야 했네. 나보다 앞서 이 작품을 관둔 최 감독. 어떻게 됐는지 아는가?]
[매장당한 거 아닙니까?]
[아니. 그 이후로도 작품을 계속했네.]
[어떻게 그런 일이.]
[그 당시 영화계는 작품 제작 수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네. 그만큼 감독도 많이 필요했네.]
[그럼 그 최 감독이라는 사람은 수요 공급으로 감독을 계속하게 된 거네요.]
[그렇네. 하지만 난 그때 최 감독처럼 판단하지 못했네.]
[왜 그런 겁니까?]
[사람은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객관적인 판단을 못 하게 되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없는 판단이지.]
[영감님. 그래도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영감님처럼 경험이 많으신 분이 어떻게 벽이 흔들리는 걸 못 잡아냈는지.]
[못 잡아낸 게 아니네.]
[그럼. 알고 계셨다는 겁니까?]
[그래. 난 그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네.]
[그런데 왜 그대로 두셨습니까?]
[그때 난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네. 자괴감에 빠졌었지. 그래서 그때 내 결정이 잘못됐다는 걸세.]
[그래도 극장에 개봉되는 작품인데…….]
[솔직히 그 영화사는 <영웅들>이라는 작품이 흥행하는 데 별 관심이 없었네.]
[그게 말이 됩니까? 자신들이 제작한 영화인데.]
[당시 <영웅들>을 제작한 영화사는 영화를 잘 만들어서 흥행에 성공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네. 다른 목적이 있었지.]
[다른 목적이요?]
[그 영화사는 영화 제작이 목적이 아니라 외국영화 수입이 목적이었네.]
[외국영화 수입과 영화 제작이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외국영화 수입 쿼터제 때문이네.]
[외국영화 수입 쿼터제요?]
현재는 외국영화를 배급사가 직접 수입해서 극장에서 개봉하지만, 예전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과거 외국영화 직배가 이루어지기 전엔 국내 영화사들이 외화를 수입할 수 있었다.
한국 영화 3편을 제작하면 외국영화 1편을 수입할 수 있었는데 이게 바로 외국영화 수입 쿼터제다.
당시엔 수입한 외국영화들이 흥행 수익이 괜찮았기 때문에 영화사들은 서로 경쟁이 붙었었다.
이 때문에 각 영화사는 저예산으로 영화를 빨리 제작할 필요가 있었고 영화사의 요구를 들어줄 감독이 필요했다.(이러한 상황 때문에 한국 영화에서 B급 영화가 가장 활발하게 제작되기도 했었다.)
이 시기에 박도봉 감독이 활발하게 활동하게 된다.
박도봉 감독은 당시 빨리 찍기로 특화돼 있었다. 자신이 비주류로 영화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특기를 개발한 결과였다.
박도봉 감독이 만든 영화가 100편이나 되는 것도 이 시기에 많은 영화를 연출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영웅들>, 이 작품을 최악으로 꼽은 건 내 결정이 최악이었기 때문일세.]
[하지 말아야 할 걸 했기 때문에 자포자기 상태가 된 거고요.]
[그렇네. 태화 군. 감독은 항상 무언가를 결정하고 실행하는 위치일세. 감독으로서 난 상황을 통제해야 했지만 애초에 잘못된 선택으로 난 그 상황을 그냥 잘못되도록 내버려 둔 거네. 정말 그때 난 최악이었던 거지.]
[…….]
[난 감독으로서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능력을 이 작품에서 잃어버린 거네.]
[그 능력이 뭡니까?]
[바로 정무적 감각이네.]
[정무적 감각이라.]
[정무적 감각은 곧 리더의 큰 자질이기도 하네. 영화감독은 단순한 창작자가 아니네. 수많은 연기자와 스태프를 이끌고 가야 할 리더네. 영화감독을 할 정도면 그동안 쌓아온 영화적 지식은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네. 이때 감독의 능력을 결정짓는 게 바로 이 정무적 감각일세.]
[지금까지 제가 생각해오던 감독의 이미지와는 다르군요. 감독은 뭔가 근사한 화면을 만들어내야 하는 거로 생각했는데.]
[대부분 사람은 자네처럼 생각하네. 하지만 실제는 다르네. 감독은 끊임없이 뭔가를 결정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네. 간단한 예로 감독이 어떤 쇼트를 NG가 아니라 좋은 쇼트라고 결정했다고 가정해 보겠네. 이 결정에는 배우의 캐스팅부터 연기, 그리고 화면의 구도, 의상, 소품 등 다양한 요소들이 들어가게 되네.]
[그것이 바로 미장센 아닙니까?]
[정확히 말하면 미장센을 구성하는 요소일세.]
미장센은 본래 연극에서 연출가가 무대 위에 모든 시각적 요소들을 배치하는 걸 의미하는 용어다. 영화에선 감독이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한 화면에 담는 이미지의 구성을 말한다.
[감독은 미장센을 구성하는 요소를 어떻게 화면에서 구성할지 결정하고 연기자와 스태프는 그 결정에 따라가는 걸세. 그 수많은 결정의 결과물이 바로 감독이 좋다고 결정한 쇼트인 거네. 그리고 이러한 쇼트가 모여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되어가는 것이네.]
[그럼 관객은 감독이 수많은 결정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을 보는 것이군요.]
[그렇네. 그리고 결정하는 위치에 있다는 건 책임진다는 말이기도 하네. 그래서 어떤 영화를 말할 때 주연배우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아무개 감독의 작품이라고 말하는 거네. 히치콕의 <싸이코>처럼 말일세.]
[영감님. 그럼 정무적 감각이 좋다는 건 결정을 잘한다는 의미입니까?]
[그렇네. 감독이 정무적 감각이 좋으면 상황에 맞는 적절한 결정을 하게 되고 연기자와 스태프는 그 결정을 무리 없이 받아들이게 되네. 그렇게 되면 연기자와 스태프는 감독을 신뢰하게 되고 따르게 되지. 그렇게 신뢰받는 감독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연기자와 스태프를 이끌 수 있게 되네. 그래서 정무적 감각이 좋은 감독이 작품 연출을 맡으면 당연히 그 결과도 좋을 수밖에 없네. 감독의 연출력이라는 것도 결국 정무적 감각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지. 자네가 말한 멋진 화면도 감독의 정무적 감각에서 나오는 거라고 할 수 있네.]
[영감님. 이영진도 정무적 감각이 좋은 거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네.]
[그럼 정무적 감각은 어떻게 키웁니까?]
[서두르지 말게. 지금 자네는 영화적 기본 지식을 익혀야 할 시기일세. 그건 자네가 앞으로 무언가를 결정할 때 판단의 근거가 되기 때문일세. 기본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정무적 감각은 무딘 칼에 불과하네.]
[그래도 궁금합니다.]
[그럼 이것만 기억하게. 자넨 뭔가를 결정해야 하고 그에 따라 결과가 나온다는 걸.]
[결정과 결과라. 이론은 쉽군요.]
[이론이 쉬울수록 응용은 어려운 법이네. 태화 군. 오늘은 그만하겠네.]
[아직 뒷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솔직히 더 볼 필요는 없네.]
태화도 박도봉 감독이 최악의 작품이라고 평한 영화를 더 볼 필요는 없겠다고 판단했다. 박도봉 감독 자신도 불편할 테니까.
[그렇게 하시죠. 앞으로 봐야 할 작품은 충분하니까요.]
#.
태화는 자료를 데스크에 반납하고 영상자료원을 나섰다. 태화는 영상자료원 출입문을 나서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영감님. 오늘 수업 좋았습니다.]
[태화 군. 만족했다니 다행이네.]
[아까 오전엔 기초부터 해야 한다고 해서 막막했는데 지금은 사라졌어요.]
[뭐든지 처음엔 막막하게 마련이네.]
[뭐부터 해야 하는지 모르니까요.]
[그렇네. 하지만 막상 시작하면 그 막막함도 점점 사라지게 된다네.]
[하지만 아무렇게나 시작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영감님 때문에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태화 군.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 기초를 쌓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테니.]
[영감님. 믿습니다.]
태화의 이 발언은 진심이 담긴 말이었다. 태화는 오늘 단 한 번에 불과했지만, 박도봉 감독의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싸구려, 아니, B급 영화라고 하더라도 100편을 연출한 내공. 그게 어디로 사라진 게 아니다. 내가 그 지식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이영진에게 도전하는 것도 허황한 게 아니다.’
태화는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시를 살짝 넘은 시간이다.
대략 오전 10시부터 시작했으니 4시간 정도 걸린 셈이다. 태화는 일단 근처에 있는 벤치에 가서 앉았다.
<영웅들>의 런닝 타임은 90분 정도다. 그중 오늘은 1시간 정도만 본 상태였다.
[영감님. 씬 분석하면서 영화를 보는데 대략 4배 정도가 걸리는군요.
[오늘은 처음이라 시간이 좀 걸린걸세. 앞으로 기초가 쌓여가고 익숙해지면 그 시간은 단축될 거네. 그땐 하루에 한 편이 아니라 두 편 혹은 세 편을 보게 될 걸세.]
[오늘 하루가 끝났을 뿐인데 벌써 다음 과제를 주려고 하시는군요.]
[허허허. 눈치챘나? 난 자네가 재능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네. 금방 따라올 수 있겠지?]
[당연히 그래야죠.]
박도봉 감독은 비록 첫날이었지만 태화가 예상했던 것보다 잘 따라온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건 태화가 가지고 있던 능력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영진을 꺾기 위해서는 재능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태화 군. 오늘 첫날이고 하니 자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네.]
[하고 싶은 이야기요? 뭐 새로운 과제인가요?]
[과제는 아니고 그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네.]
[중요한 이야기요?]
[그렇네. 그동안 나에겐 많은 제자가 있었네. 하지만 그들 중 대부분의 사람은 현재 영화판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네. 왜 그런지 아는가?]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말에 놀라지 않았다. 박도봉 감독의 썰렁했던 장례식장을 떠올리면 어느 정도 예상이 되기 때문이었다.
[재능이 부족해서인가요?]
[언뜻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네. 하지만 그렇지 않아.]
[그럼, 뭔가요?]
[나도 그 답을 찾기 위해서 오랜 고민을 했었네. 그리고 그 답을 찾아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