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5화
영화 <영웅들>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어느 달동네에 물건을 훔치는 사건이 일어나지만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달동네 아이들이 모여서 그 범인을 찾아낸다는 이야기다.
당시 한국 영화에서 잘 만들어지지 않았던 아동 탐정 영화여서 신선했지만, 흥행 결과는 좋지 않았다.
[태화 군. 본격적으로 영화를 보기 전에 자네가 알아야 할 게 있네.]
[뭡니까?]
[감독이 촬영장에서 특정 타이밍에 왜 컷을 외치느냐일세.]
[그야. 다 찍었으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자네의 대답도 틀린 건 아니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답이 아닐세.]
[그럼. 뭡니까?]
[감독이 컷이라고 외치는 건 그 쇼트에서 보여줄 걸 다 보여주었다고 판단이 들었을 때네. 감독은 다 찍었다는 판단 이전에 그 쇼트에서 뭘 보여줄 것인지를 먼저 결정해야 하네. 자네의 대답엔 이게 빠졌네.]
[뭘 보여줄지 먼저 결정해라.]
[그건 아주 중요한 문제일세. 자네가 영화감독을 하게 되면 맞닥뜨릴 가장 근본적인 고민이 될 걸세. 그럼 이제 영화를 보도록 하겠네.]
박도봉 감독은 <영웅들> 영화를 보면서 태화에게 각 씬마다 상세한 설명을 해주었다. 주로 카메라의 위치와 연기자의 동선을 중심으로 설명했고 미술과 소품에 관한 설명도 필요한 경우 해주었다.
설명을 듣던 태화는 확실히 그 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
‘역시. 100편이라는 편수가 그냥 만들어진 건 아니다.’
태화가 마음에 들었던 건 박도봉 감독의 설명 방식이었다. 특히 연기자가 여러 명 등장하는 방금 장면은 설명할 때 다소 복잡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박도봉 감독의 설명은 전혀 복잡하지 않았다.
먼저 카메라의 위치를 설정한 후 연기자들을 등장 순서에 따라서 배치했다. 박도봉 감독은 당장 프레임이 들어오지 않는 연기자까지 고려해서 마치 평면도를 그리듯 설명했다. 연출에 관해서 잘 모르는 태화도 전체적인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태화는 잠시 플레이어를 일시 정지시켰다.
[영감님. 정말 설명이 간결하고 좋네요. 군더더기가 없어요.]
[그렇게 들었다니 좋구먼.]
[근데 어떻게 그걸 하나하나 다 기억하세요? 거의 40년 전인데.]
[기억하는 것보다 원리를 이해한다고 생각하면 되네.]
[원리요?]
[카메라의 프레이밍과 그에 따른 연기자의 동선이 어떤 원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지 이해하면 외울 필요가 없네.]
[아하. 원리를 이해해라.]
태화는 박도봉 감독이 마치 학원의 일타 강사처럼 느껴졌다.
[태화 군. 하지만 단순히 씬에 대한 이해에 그쳐서는 안 되네.]
[뭐가 더 있습니까?]
[씬을 분석하고 그걸 다시 시나리오로 재조합할 수 있어야 하네.]
[그래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영화는 시나리오를 영상화한 작업의 결과물이네. 즉 시나리오는 영화의 설계도라고 할 수 있네.]
[그렇다면 영화감독은 시나리오라는 설계도로 영상을 만들어가는 존재군요.]
태화의 대답을 들은 박도봉 감독은 흐뭇했다. 태화가 박도봉 감독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세련된 대답을 했기 때문이다.
[태화 군. 연출 초보치곤 괜찮은 대답이었네. 역시 감이 있어.]
[제가 전엔 연기 외에 관심이 없었다지만. 그 정도의 감은 있습니다.]
태화는 점점 연출에 관해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연출 이거, 생각보다 재밌는데?’
태화가 이런 흥미를 유발하는 데 박도봉 감독의 임팩트 있는 설명이 한몫하고 있었다.
#.
현재 태화의 뇌세포는 마치 스펀지로 변한듯했다. 뭐든지 빨아들이겠다는 태세였다.
[영감님. 아직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씬을 분석하고 시나리오로 재조합해야 합니까?]
[거기엔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네.]
[그게 뭡니까?]
[자네가 직접 시나리오를 써야 하기 때문이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제가 데뷔하려면 시나리오가 필요하고 저한테 시나리오를 줄 작가는 없을 테니까요.]
[맞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재 영화판에서 신인 감독에게 시나리오 작가를 붙여주는 예는 없네. 그래서 자네는 앞으로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 역량을 키워나가야 하네.]
[하지만 영상을 시나리오로 재조합하는 게 어떤 도움이 됩니까?]
[영상화된 걸 결과라고 해보세. 그 결과의 원인은 시나리오네.]
설명이 복잡할 거란 태화의 예상과 달리 박도봉 감독의 설명은 이번에도 간결하면서도 임팩트가 있었다.
[아하! 결과를 보고 원인을 추론하라는 말이군요.]
[옳거니! 자네는 가르치는 맛이 나는 사람이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칭찬을 듣자 기가 한껏 살았다.
기초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실망감은 이미 태화의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제가 시나리오를 쓸 수 있다면 영화의 설계자가 되는 거군요.]
[허허허. 바로 그거야. 영화감독은 영화의 설계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하네. 앞으로 자네는 영상을 보자마자 바로 시나리오가 떠오르도록 훈련해야 하네. 그 수준이 되면 자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영상을 자연스럽게 시나리오로 쓰게 될걸세.]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영어 공부할 때 직독직해와 비슷한 개념이군요.]
#.
태화는 일시 정지해 두었던 플레이어를 다시 시작했다. <영웅들>이라는 작품은 오래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걸 고려해도 분명 싼 티가 나는 작품이었다.
태화가 지금까지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건 씬 분석에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태화도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태화 군. 이번 씬을 잘 보도록 하게.]
[네. 영감님.]
박도봉 감독이 주의 깊게 보라고 한 장면은 아이들이 한 아이의 집에 모여서 서로 대화를 하는 장면이다.
태화는 화면을 보면서 왠지 화면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감님. 화면이 왜 이렇게 흔들린다는 느낌이 들죠? 무슨 기술적인 문제가 있는 건가요?]
[화면을 잘 보게. 만약 기술적인 문제라면 프레임 자체가 흔들려야 하네.]
태화는 화면을 자세히 보았다. 분명 프레임 자체가 흔들리지 않았다.
[영감님. 프레임이 흔들리는 게 아니라 배경으로 잡힌 벽이 움직이는 거 같은데요?]
[제대로 봤네.]
[이유가 뭡니까? 촬영할 때 지진이라도 났었습니까?]
[허허. 그건 아닐세. 이제부터 설명하겠네.]
[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웅들>, 이 작품은 내가 만든 작품 중 최악의 영화네.]
[작품을 보면서 싼 티가 난다고 생각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최악의 영화라뇨?]
[먼저 벽이 흔들린 이유를 설명하겠네. 이 작품에 실내 공간으로 나온 장소 말일세.]
[네.]
[사실 한 장소네.]
[한 장소요? 혹시 세트에서 촬영한 건가요?]
영화에서 세트 촬영할 경우 세트장 한 장소에서 벽을 바꾸고 소품을 채워서 다른 장소라는 느낌을 준다. 태화도 이 정도의 지식은 알고 있었다.
[아니. 세트 촬영이라면 저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걸세. 내가 했던 방법은 일반 가정집을 빌려서 촬영을 진행하는 거였네. 세트장에서 촬영할 제작비가 없었거든.]
[그래서요?]
[한 장소에서 촬영하면서 다른 장소의 분위기를 내야 했네. 그래서 합판에 벽지를 붙여서 벽으로 사용했네. 그리고 다른 장소의 분위기를 내기 위해 벽지를 다른 거로 바꾸어 가면서 촬영했네,]
태화는 순간 아주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상됐다.
제작비가 부족해서 세트장 촬영을 못 하고 대안으로 벽을 합판으로 만들었다. 게다가 가정집이라서 함부로 벽을 뜯거나 개조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럴 때 선택할 방법은 뻔하다.
[혹시 그 합판을 사람이 들고 있었습니까?]
[자네의 추측이 맞네. 합판 양쪽에 사람이 붙어서 들고 있었네. 벽이 흔들리는 건 양쪽에서 벽을 들고 있던 스태프가 한계 상황에 왔기 때문이네.]
태화는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추론이 사실로 드러나자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했습니까?]
[태화 군. 이 작품 촬영하는 데 며칠 걸린 줄 아나?]
[두어 달 걸리지 않았나요?]
태화의 대답은 일반적인 촬영 스케줄이다.
[아니. 실제 촬영은 5일 만에 끝낸 거네. 실내 장면은 하루 만에 끝낸 거고.]
박도봉 감독의 대답은 태화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거였다.
[네?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 되지 않더라도 사실일세. 그땐 제작 기간이 촉박했으니까. 이미 개봉 일자가 잡힌 상태였거든.]
영화의 개봉 시기는 영화가 완성될 즘 정해지는 게 아니다. 영화 제작사는 극장에 개봉 일자를 미리 잡아 놓고 제작을 진행한다. 그래야 개봉 시기가 밀리지 않고 제때 제작비를 회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내가 만들 작품이 아니었네. 작품을 맡기로 한 감독이 중도에 하차하면서 나에게 급하게 떠넘겨진 거네. 시나리오를 제대로 분석하는 데도 버거운 시간이었네.]
[그 감독은 왜 중도에 하차한 겁니까?]
[제작 여건이 너무 좋지 않았기 때문이네.]
[근데 영감님은 왜 이 작품을 맡으셨습니까? 개인적으로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는데.]
[내가 판단을 잘못했기 때문일세.]
[판단 잘못이요?]
#.
1981년, <영웅들> 제작사.
영화사 대표 최문석이 박도봉 감독에게 작품 <영웅들>을 떠넘기는 상황이다.
최문석은 40대 중반에 올백 머리를 하고 있었고 눈매가 찢어져서 전반적인 인상이 날카로웠다. 특히 최문석은 입에 시가를 물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조폭 보스 같았다.
박도봉 감독은 나이대가 30대 중후반이었지만 벌써 머리에 새치가 꽤 많이 나 있었다. 그래서인지 언뜻 보면 박도봉 감독이 최문석보다 더 나이 들어 보였다.
“최문석 대표님. 이건 정말 아닙니다.”
“박 감독. 영화 만들기 싫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다른 영화 제작비에 반의반도 안 주면서 영화를 만들라고 하시면……. 필름 값도 빠듯합니다.”
과거 필름으로 영화를 찍을 땐 필름 구매가 제작비의 큰 부분을 차지했었다. 필름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면 테이크를 충분히 갈 수 없게 되고 작품의 질에도 영향을 미친다.
“박 감독. 자네한테 무슨 대단한 영화 만들라고 하는 게 아니잖아.”
최문석의 이 말은 박도봉 감독의 속을 긁었다.
“대표님! 방금 그 말 모욕적입니다.”
“아니. 이 사람이! 어디서 눈을 부라리고 그래!”
“…….”
“박 감독. 앞으로 영화 안 만들 거야?”
“대표님. 제 말은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제작비를 줘야…….”
“박 감독.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나? 박 감독도 알겠지만, 영화판 아주 좁아. 자네가 만약 이 작품 맡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대표님.”
최문석은 시가를 길게 빨고는 연기를 내뱉으며 미소를 지었다. 최문석이 방금 지었던 그 미소는 그의 인상과 합쳐져 아주 야비한 미소가 돼 버렸다.
“난 이렇게 말하고 다닐 거네. 박 감독이 요즘 버릇이 많이 안 좋아졌다고.”
“…….”
“이 한마디면 끝나는 거 아닌가? 크크크. 앞서 감독 관둔 최 감독도 두고 보게. 어떻게 되나.”
최문석의 발언은 박도봉 감독에게 두려움을 주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