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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4화 (14/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4화

태화는 아파트 단지를 나섰다. 태화는 이제야 마음이 편해짐을 느꼈다.

[휴우. 이제야 지난 며칠간의 사태가 종결된 느낌이네요.]

[태화 군. 부모님 설득하기 힘들었지?]

[그러네요. 이기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해해 줄 거로 생각했었는데.]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때로는 가장 안티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하네.]

[영감님도 그랬습니까?]

[그렇다네. 나도 내가 영화 일한다고 했을 때 어머니가 반대했네. 반대 이유가 뭔지 아나?]

태화는 그 반대 이유가 뭔지 너무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하냐고 그러지 않았어요?]

[맞아. 자네가 너무 쉽게 맞히니까 좀 김이 빠지는군.]

박도봉 감독의 어머니는 아들이 회사에 취직해서 평범하게 살기를 바랐다. 그런 상황에서 박도봉 감독이 영화 일을 하겠다고 선언한 건 정말 생뚱맞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영감님은 어떻게 하셨어요?]

[‘이 못난 아들은 영화 일 하겠다.’라는 편지 한 장 써놓고 야반도주하듯이 집에서 나왔네. 나는 그때 어머니가 설득될 거로 생각하지 않았거든. 그때 내 나이 스무 살 때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난 무작정 충무로로 갔네. 그리고 영화사 앞에서 뻗치기로 버텼지. 나 좀 써달라고.]

[크크크. 영감님도 그런 시절이 있었군요. 근데 배우는 바로 포기하신 겁니까?]

[그렇네. 내 인생에서 처음 본 오디션이 액션 영화였는데 배우들이 다 멋있고 잘생겼더군. 바로 포기했네. 난 평생 가도 주연은 못 할 거 같았거든. 그래도 주연은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허허허.]

태화는 스무 살 박도봉 감독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당장 가진 건 없지만 열정과 패기로 가득 찼던 바로 그 모습.

일명 무대포 정신.

태화는 스무 살 박도봉 감독의 모습이 자신과 묘하게 겹쳐졌다.

[태화 군. 어쨌든 고생했네. 나름 잘 대처했어.]

[뭐, 잘 대처하고 할 게 있습니까? 그냥 솔직하게 말했을 뿐입니다.]

[바로 그거네. 솔직한 게 좋은 거네. 특히 자신의 의지를 밝히는 데 잔머리는 필요하지 않네.]

[영감님. 앞으로 계획은 뭡니까?]

[이영진이 거대한 성이라면 우린 변방의 아주 작은 성이라고 할 수 있네.]

[그래서요?]

[힘을 키워야지. 그래서 이영진이라는 거대한 성을 함락시켜야지.]

[멋진 말이긴 한데…….]

[그런데?]

[그냥 뜬구름 잡는 얘기네요. 구체적인 계획을 말씀하셔야죠.]

[태화 군. 성급히 판단하지 말게. 아직 내 말이 다 끝난 건 아니니까.]

[말씀하시죠.]

[우선 자넨 기초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네. 그래서 기초를 좀 다질 필요가 있어.]

태화는 기초부터 해야 한다는 말에 다소 실망감이 들었다.

‘젠장! 최고가 되겠다고 다짐했는데 기초부터라니.’

태화는 묘한 반발심이 들었다.

[바로 현장에 가는 거 아니었습니까?]

[현재 자네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네.]

[무슨 소립니까? 영감님이 도와주면 되지 않을까요?]

박도봉 감독은 태화의 반발심을 이해할 수 있었다.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해서 결단했는데 기초부터 해야 한다고 하면 누가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태화 군. 세상에 나가려면 그에 대한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이 방금 한 발언이 가슴에 와 꽂혔다.

‘세상에 나간다라…….’

어떤 의미에서 태화 자신은 한 번도 세상에 나간 적이 없었다. 단지 수많은 시도와 실패만 있었을 뿐이었다.

[영화 현장에 연출 스태프로 가려면 영화 연출 분야에서 일한 경험이 있어야 하네. 하다못해 단편 영화 연출이라도 해야 받아주네. 태화 군. 그런 경험이 있는가?]

[당연히 없죠.]

[그리고 자네가 어떻게 현장에 간다고 해도 두 개의 문제에 직면하게 되네.]

[두 개의 문제요?]

[그렇네. 첫 번째 문제는 내가 자네에게 조언해 준다 한들 자네가 즉각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울 거네.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업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면 소용없는 일 아닌가?]

영화 현장에서 연출 스태프는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그랬다간 욕 얻어먹기에 딱 맞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이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어요. 그럼 다른 문제는 뭡니까?]

[내가 자네에게 조언해도 결국 판단하고 결정하는 건 태화 군 자네가 하는 걸세. 기초가 없는 자네가 과연 가능할까?]

[아무래도 힘들겠죠.]

[그러니 기초가 필요한 거네. 그나마 다행인 건 자네가 연출에 관해서 백지상태라는 거네.]

[영감님. 지금 저 놀리는 겁니까? 백지상태라는 게 다행이라뇨?]

[오해하지 말게. 차라리 어설프게 아는 게 더 나쁘다는 의미니까. 자네가 어설프게 연출에 관해 알았다면 어떨까?]

[괜한 고집 때문에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겠죠.]

[아주 잘 아는군.]

태화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다시 명확히 짚었다. 박도봉 감독의 말처럼 자신은 연출에 관해선 왕초보다.

‘어차피 나와 영감님은 한배를 탄 운명이다.’

태화는 현 상황에서 박도봉 감독을 믿고 가야 한다.

[자신 있으십니까?]

[태화 군.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군. 자넨 내가 하라는 대로 기초를 잘 닦으면 되네. 그리고 기초를 다진 후에 자네가 연출하는 작품을 만들게 될걸세.]

[제가 연출하는 작품이요?]

[그렇네.]

[그런데 배우는 데 너무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요?]

[그건 걱정하지 말게.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테니.]

[어떻게요?]

[그래도 내가 만들었던 작품이 100편이네.]

[100편이요? 정말입니까?]

[믿기 힘들겠지만 정말일세. 정말 엑기스만 뽑아서 가르칠 것이니 걱정하지 말게나.]

한 영화감독이 영화 100편을 만들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세계 영화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이다.

[문제는 자네가 얼마나 따라 오느냐야.]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이 악물고 따라갈 테니까요.]

[좋네. 자네가 잘 따라온다면 난 그에 맞는 과정을 밟을 걸세.]

[그에 맞는 과정이요?]

[그렇네. 난 자네의 첫 작품이 단편이 아닌 장편영화를 만들도록 할 계획일세.]

박도봉 감독의 계획에 태화는 깜짝 놀랐다.

[바로 장편이요?]

[거기엔 이유가 있어. 단편으로 시작해서 연출부 생활을 하다 감독으로 입봉하는 과정은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네.]

[첫 작품에 장편영화 제작. 그게 가능합니까?]

[당연히 가능하니까 하는 말이네. 그러니까 기초부터 한다고 너무 실망하지 말게. 기초가 튼튼하면 뭐든 가능하니까.]

[제가 만약 영감님이 세운 기준에 도달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게. 난 자네가 내가 세운 기준에 도달할 때까지 기초를 다지게 할 테니 말일세. 왜 자신 없나?]

박도봉 감독의 도발적인 발언은 확실히 태화의 의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해낼 겁니다.]

[좋네. 태화 군. 그리고 난 내가 만든 작품들을 교재로 활용할 생각이네.]

[근데 굳이 영감님 작품을 교재로 해야 합니까?]

[무슨 소린가?]

[본인도 말했잖아요. 싸구려라고. 분명 좋은 작품도 많은데.]

[허허. 그래도 내가 만든 작품일세. 교재로 쓰는 데 전혀 나쁘지 않아.]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방법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이 들었다. 작품을 직접 만든 감독이 해당 작품에 관해서 가르쳐 주는 경우는 흔한 기회가 아니다.

‘단순히 프레이밍에 관한 것만 배우는 게 아니다. 100편을 연출했던 감독이라면 제작 노하우도 상당할 수밖에 없다. 전반적인 제작과정에 관해 노하우를 배울 수 있어.’

영화감독이 되려면 바로 이 작품 제작의 노하우에 관해서 배워야 한다. 일반적으로 이 과정을 배우는 데 상당히 오랜 기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태화가 박도봉 감독의 가르침을 받는다면 그 기간을 대폭 줄일 수 있다. 태화가 보기에도 확실히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영감님 작품이 어디 남아 있습니까? 인터넷 검색해도 안 보이던데.]

[한 군데 있네.]

[거기가 어딥니까?]

[영상자료원.]

영상자료원은 영화의 도서관과 같은 곳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제작해서 개봉했던 영화는 소실된 영화를 제외하고 대부분 이곳에 소장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또한, 이곳에선 소장 자료를 직접 관람할 수 있다.

영상자료원은 DMC역 근처에 있다. 태화는 6호선을 타기 위해 전철로 향했다.

#.

태화는 DMC역에서 하차해서 영상자료원으로 향했다. 영상자료원은 전철역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걸렸다.

태화는 영상자료원에 도착하자마자 데스크에서 회원가입을 했다. 그러고서 태화는 자료실로 향했다.

[영감님. 근데 뭘 보죠?]

[태화 군. <영웅들>이라는 작품이네.]

[<영웅들>이요?]

[그래.]

태화는 자료를 검색란에 박도봉 감독을 입력했다. 그러자 작품 리스트가 나왔다.

박도봉 감독 작품 수가 100편으로 나왔다. 태화는 자신이 잘못 본 거로 생각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지만, 결과는 처음과 같았다.

이 사실에 태화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정말이었어. 작품 수가 과장되었다고 생각했었는데.’

사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이 만든 작품이 100편이라는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었다. 한 감독이 10편의 영화를 만들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영감님. 정말 대단하군요.]

[이제야 날 좀 인정하는 분위기군.]

[근데 100편으로 딱 맞춘 겁니까?]

[허허. 그건 아닐세.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걸세.]

[어떻게 하다 보니 영화 100편을 연출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럼. 표현을 바꾸지. 난 정말 미친 듯이 영화를 만들었네.]

[미친 듯이 하셨다면 믿어야죠. 그런데 왜 사람들은 영감님을 잘 모를까요?]

[내가 사람들에게서 잊혔기 때문이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내가 실패했기 때문이지.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지,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엔 관심이 없다네.]

태화의 질문은 우발적이었지만, 박도봉 감독의 대답은 분위기를 예상외로 침울하게 만들었다.

‘뭐야. 이 우울한 분위기는…….’

첫발을 딛는 순간에 굳이 우울해질 필요는 없었다.

[영감님은 아직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소린가?]

[영감님은 마지막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마지막 기회가 서태화. 바로 접니다. 까짓거 제가 성공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반드시 성공해서 영감님을 사람들이 기억하도록 만들겠습니다.]

[허허. 태화 군. 그 패기가 좋네. 생각만 해도 벌써 기분이 좋구먼.]

태화는 작품 리스트에서 <영웅들>의 위치를 확인한 뒤 바로 자료실에서 작품을 찾았다. 작품은 DVD 형태로 보관되어 있었다.

[여기 있네요.]

<영웅들> 1981년 작. 감독 박도봉.

태화는 ‘감독 박도봉’ 글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영감님, 오래된 영화네요.]

[그래. 어쨌든 감회가 새롭구먼.]

만약 박도봉 감독이 자신의 육체를 갖고서 표정을 지을 수 있다면 아마도 밝게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1981년이면 우리 나이로 37세. 좋은 시절이 아니던가.

영상자료원 감상실은 1인, 2인, 다인 감상실로 구분되어있다. 태화는 <영웅들> 작품을 가지고 1인 감상실로 향했다.

1인 감상실은 1개의 좌석에 책상과 컴퓨터가 있었고 좌석마다 칸막이가 쳐져 있어서 사용하는 데 큰 불편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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