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3화
박도봉 감독은 오늘 발견한 태화의 이 재능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만약 태화가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이는 선택을 한다면 그간의 과정이 모두 수포가 될 수도 있다.
[태화 군. 조금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볼까?]
[네?]
[앞으로 벌어질 싸움에서 이길 확률이 조금 올라간 것 같네.]
[무조건 이기는 싸움 아니었습니까?]
[허허. 그 패기가 좋네. 하지만 현실적으로 말해서 지금까진 이길 확률이 한 자릿수였네.]
[영감님. 그거 너무 저평가 아닙니까?]
[근데 이제 두 자릿수는 되는 것 같네. 자네가 앞으로 노력을 한다면 그 확률은 더 올라갈 걸세.]
박도봉 감독은 자신이 발견한 태화의 재능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 굳이 말해서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가 없었다.
[뭐.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네요.]
[왜? 기쁘지 않은가?]
[아직 전망에 불과하잖아요. 지금 저한테 필요한 건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뭔가?]
[배를 채워야죠. 4일 굶었더니 배고파 죽겠습니다.]
태화는 긴장이 풀린 탓에 더 배고픔을 느꼈다.
[허허. 그렇군. 먼저 배를 채우는 게 중요하겠군.]
태화는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태화는 신발을 벗고서 식탁으로 향했다.
식탁에는 태화를 위한 식사가 차려져 있었고 한 장의 메모가 놓여 있었다. 글씨체로 보아 전미경이 쓴 메모였다.
-정말 말 더럽게 안 듣는 아들! 버섯 죽이야. 차가우면 데워서 먹어.
태화는 메모를 읽고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엄마. 고마워요.’
태화는 단식한 상태라 일반적인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날 수 있다. 그래서 전미경이 버섯 죽을 식탁에 차려놓은 것이다.
전미경은 평상시라면 태화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겠지만, 오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전미경은 남편 서준상 곁에 있었다. 아마도 아들한테 상처받은 남편을 위로해 주고 있으리라.
“아들. 잘 먹겠습니다.”
태화는 버섯 죽을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었다.
“맛있다.”
버섯 죽의 온도는 굳이 데워도 되지 않을 만큼 적당했다.
#.
다음 날 오전.
태화는 밖에 나가기 전 거울을 봤다. 머리를 삭발했다고 하나 인물이 죽은 건 아니었다.
삭발 때문에 머리 스타일로 시선이 분산되지 않아서인지 이목구비가 더 또렷이 보였다.
단지 옥에 티가 하나 있었으니, 그게 바로 땜빵이다.
[태화 군. 삭발도 잘 어울리는 거 같네. 근데 머리에 땜빵, 그거 좀 거슬리지 않나? 나야 뭐 상관없지만.]
[뭐, 당분간 모자 쓰고 다녀야죠.]
태화는 가끔 자신이 쓰고 다니던 야구모자를 머리에 쓰고 나서 방을 나섰다.
“다녀오겠습니다!”
전미경이 밖에 나가려는 태화를 불러세웠다.
“태화야. 잠깐만!”
“네?”
전미경이 태화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겼다. 전미경은 삭발한 태화의 모습을 보자 한숨을 쉬었다.
“아유. 진짜 속상해.”
“머리카락이야 금방 자라요. 난 시원하고 좋은데. 관리하기도 편하고.”
태화의 넉살에 전미경이 살짝 눈을 흘겼다.
“너, 한 번만 더 이딴 짓 하면 더 안 본다. 그땐 아주 호적에서 파버릴 거야!”
“알았어요. 다시는 안 할게요.”
태화는 피식 웃으며 전미경을 두 팔로 안았다.
“엄마, 믿어줘요. 이번에는 다를 거예요.”
태화가 집을 나선 시각은 오전 9시 10분.
출근 시간대의 분주함 대신 전반적으로 한가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태화 군. 몸은 괜찮은가?]
[영감님. 전 괜찮아요. 단식해서 그런지 몸도 가벼워진 느낌이고.]
[역시 젊다는 게 좋긴 좋군.]
[근데 기사 검색해 보니까 석무열 그 사람이 촬영장에 난입한 사건은 아예 없네요.]
태화는 단식 삭발 투쟁 때문에 기사 검색을 할 생각을 못 했었다. 모든 일이 정리된 이제야 기사 검색을 한 것이다.
[아무래도 유혜성이 등장하면서 덮인 거 같네요. 유혜성의 등장만으로 대중들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으니까요.]
[나도 그게 기사로 날 거로 생각하지는 않았네. 유혜성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걸세.]
[어쨌든 이것도 이영진의 힘이라면 힘이겠죠.]
[그렇네.]
태화가 아파트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이었다.
“어머, 도련님 아니세요?”
태화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태화의 형수 이수경이 유모차를 밀고서 태화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이수경은 대체로 귀여운 인상이었다. 눈꼬리가 살짝 처졌는데 그 때문에 인상이 더 순해 보였다.
어떻게 보면 귀여운 강아지를 연상케 하는 얼굴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성격까지 온순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 형수……님.”
태화의 형 서태훈은 태화와 동이 다를 뿐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다.
[태화 군. 어째 자네 말투가 좀 반갑지만은 않은 것 같네.]
[이젠 제 말투까지 분석하십니까?]
[굳이 하려고 한 건 아니네. 그냥 느낌대로 말했을 뿐이네.]
[뭐, 좀 사정이 있습니다.]
[사정이라? 혹시 형수와 사이가 좋지 않은가?]
[사이가 좋지 않기보다 좀 특별한 관계라고 할 수 있죠.]
[특별한 관계?]
[네. 저하고 형수는 초등학교 동창입니다.]
[그러니까 자네 형수는 한때 친구였지만 현재는 형수와 시동생의 관계란 말이군.]
[뭐, 그런 셈이죠.]
[태화 군. 아무래도 좀 불편하겠군.]
[네. 그리 편하지만은 않죠.]
[그래도 어쩌겠는가. 앞으로 잘 지내보도록 하게.]
[영감님. 그런 식으로 남 얘기하듯 하지 말라고요.]
[나도 도움을 주고 싶지만, 딱히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랬다. 서태훈과 이수경의 사이가 잘못되기를 바랄 수도 없는 거 아닌가?
태화가 초등학교 4학년일 때였다. 태화의 생일파티를 하기 위해서 집으로 친구들이 모였는데 그때 이수경도 있었다.
이수경은 이날 중학교 1학년이던 서태훈을 처음 보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첫눈에 서태훈에게 반한다.
보통 어릴 때 첫눈에 반한 상대는 시간이 지나면서 실망감에 마음이 멀어진다. 자라면서 키가 안 큰다거나 아니면 얼굴이 어릴 적에 비해 점점 못생겨진다거나……. 아니면 학년이 올라가면서 공부를 생각보다 못한다거나…….
하지만 이수경은 서태훈에게서 마음이 멀어질 수 없었다.
서태훈이 외모로 보나 학교 성적으로 보나 바람직스러운 모습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이수경은 고등학생 때부터 태화의 부모님에 대한 호칭도 바꾼다. 전에는 태화의 부모님을 ‘아줌마, 아저씨’라고 불렀지만, 이때부터 ‘어머님, 아버님’이라고 불렀다.
이게 다 미래의 시부모님이 될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는 전략이었다.
전미경도 이런 이수경이 싫지 않았다.
“수경이가 우리 집에 시집오면 좋겠네. 우리 집 며느리 해라.”
이수경은 태화의 부모님을 공략하는 한편 서태훈에게도 지속적인 구애를 펼쳤다. 하지만 서태훈은 이수경을 귀여운 동생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서태훈이 마음을 연 건 군대에 갔을 때였다. 이때 이수경은 주말마다 거의 서태훈에게 면회하러 갔었다.
말이 쉽지 군에 주말마다 면회 간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이수경 그녀는 사랑은 쟁취하는 거라는 걸 몸소 실천했고 보여줬다.
태화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이수경을 향해 먼저 말을 건넸다.
“아침부터 무슨 일입니까? 형수님.”
“저야. 어머님이 오라고 하셔서.”
태화는 유모차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다. 유모차에 조카딸 서지우가 타고 있었다.
태화에게 지우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조카였다.
태화는 몸을 낮춰 지우와 눈을 마주쳤다.
“우리 지우 왔어?”
이제 생후 1년이 갓 지난 지우는 태화를 보자 활짝 웃었다.
“헤헤.”
“우리 지우 웃었네. 삼촌이 그렇게 좋아?”
태화는 지우의 볼을 살짝 어루만졌다. 손가락에 닿는 볼의 촉감이 너무 부드럽고 좋았다.
“지우. 할머니랑 재밌게 놀다가.”
지우는 태화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또 한 번 웃었다.
“헤헤.”
태화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이수경이 태화를 빤히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사람을 쳐다보세요?”
“어머! 진짜네.”
이수경은 놀란 듯 자신의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정말 삭발했네요?”
“뭐요?”
태화가 모자를 썼다고 하지만 삭발한 티를 완전히 감출 수는 없다. 하지만 이수경은 이 자리에서 태화가 삭발한 걸 발견한 게 아니었다.
‘삭발했네요.’가 아니라 ‘정말 삭발했네요.’라니. 이건 누군가 말해줬다는 의미다.
“엄마가 형수한테 말했어요?”
“네.”
“그래서 나 삭발한 거 구경하러 왔어요?”
“당연히 그건 아니죠. 어제 전화하셔서 속상하다고.”
“그럼 대충 어떤 이야기인지 들었겠네요.”
“뭐. 대충.”
태화는 이수경에게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전 그만 가 볼게요.”
태화가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저기 잠깐만.”
“왜요?”
“이런 말 하기 좀 그런데…….”
태화는 이수경의 말버릇을 알고 있다. 항상 저렇게 운을 떼고 나서 자신이 할 말을 하곤 했다.
태화는 이수경의 이런 말버릇을 알기에 딱 잘라 말했다.
“그럼. 하지 마세요.”
“뭐가 그렇게 급해요?”
이수경은 재빨리 태화를 다시 돌려세웠다.
“지금부터 하는 말. 형수가 아니라 친구로서 말할게.”
이수경이 편안한 말투로 바꾸자 태화도 바로 말투를 바꿨다.
“그래.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제발 잘 좀 해. 지켜보는 주변 사람 더 이상 힘들게 하지 말고.”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나도 잘할 생각이니까.”
이수경은 태화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도 잘할 생각이다.
이건 태화가 그동안 항상 반복적으로 해왔던 말이었다.
“언제는 그런 말 안 했어?”
“뭐?”
태화는 방금 이수경의 발언이 수위를 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태화는 이수경의 이 발언 뒤엔 전미경이 있다고 직감했다.
‘이 시간대에 굳이 형수가 집으로 찾아온 것도 그렇고……. 엄마가 형수한테 전화해서 내 속을 한번 떠보라고 한 것 같은데.’
태화는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나도 친구로서 말할게.”
“해봐.”
“날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오늘까지야.”
“뭐, 오늘까지?”
“그래. 이번만큼은 다를 거야. 답답한 내 인생. 이번엔 내 손으로 끝낼 거니까.”
“끝낸다고?”
이수경은 태화의 이 발언이 예전과는 분위기가 분명 다르다는 걸 느꼈다.
예전에 태화는 ‘만일 나한테 한 번만 기회가 찾아온다면 잘할 수 있어.’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태화의 방금 발언엔 만일이라는 조건이 붙지 않았다. 대신 태화는 단정적으로 끝낼 거라고 발언했다.
메시지의 내용뿐 아니라 말투와 표정에서 전과는 확실히 무게감이 달랐다.
뭔가 묵직하다고 할까.
“난 할 말 다 했으니 이제 형수와 시동생의 관계로 돌아가죠.”
“그러죠.”
“그럼, 편안하게 잘 놀다가 가세요. 형. 수. 님.”
태화는 몸을 돌려 아파트 입구로 발길을 돌렸다. 태화의 모습을 바라본 이수경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돌았다.
“와. 서태화. 자신감 만 퍼센트네. 이번엔 좀 다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