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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2화 (12/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2화

박도봉 감독은 태화의 수가 염려가 되었다.

[태화 군. 그래도 이건 아닌 거 같네. 오히려 역효과가 날 거 같네. 차분하게 다른 방법을 찾아보세.]

박도봉 감독의 이 지적은 일면 타당한 측면이 있었다. 삭발한다는 건 저항의 의미다.

태화가 단식하는 상황에서 삭발까지 한다면 부모님과의 갈등 요소가 더 깊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태화의 태도는 단호했다.

[아뇨.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이 방법뿐입니다. 영감님. 제가 마지막 승부수라고 말했으면 이유가 있는 겁니다.]

[태화 군. 제발.]

태화는 바리깡의 전원 버튼을 켰다. 바리깡은 어느 정도 충전이 된 채로 와서 전원이 바로 켜졌다.

[영감님. 전 오늘 이 상황을 끝낼 겁니다.]

[그건 나도 아주 바라는 거라네. 하지만 삭발은…….]

[절 믿으세요. 더 이상 시작도 하기 전에 힘을 뺄 수는 없습니다.]

태화가 저렇게 확고한 태도를 유지하니 박도봉 감독으로서도 더 이상 말릴 수 없었다.

태화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바리깡으로 밀기 시작했다. 태화의 탐스럽던 머리카락은 단 몇 분 만에 바리깡으로 모두 잘려 나갔다.

몇 시간 후.

서준상이 퇴근 후 전미경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저녁 식사 메뉴는 육수에 시원하게 얼음을 띄운 물냉면이었다.

서준상은 면을 먹기 전 냉면 육수를 먼저 한 모금 마셨다.

“오늘 냉면 육수 잘됐네. 근데 태화는 아직도 그대로지?”

“그대로예요.”

“녀석, 오래 버티네.”

“그래 봐야 앞으로 며칠이나 버티겠어요? 내가 볼 땐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무슨 징조라도 있었던 거야?”

“태화가 낮에 물 마시러 나왔다가 냉장고 앞에 한참 서 있더라고요.”

서준상은 냉장고 앞에 서성이는 태화의 모습이 선하게 그려졌다. 그 때문인지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녀석. 부모 마음 반만 알아줘도 좋으련만…….”

“그러게요. 하여튼 말은 지지리도 안 들어. 나쁜 놈 같으니라고.”

부모 마음은 다 비슷하다. 자식이 크게 성공하지 않아도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가정을 꾸리는 것. 단지 그것이다.

대화를 나누던 태화의 부모님은 거의 동시에 면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면발을 흡입했다.

후루룩.

한편 태화는 최후의 승부수를 던지기 위해서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태화의 표정은 사뭇 비장했다.

이제 박도봉 감독도 그냥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태화 군의 승부수가 통하길 바랄 수밖에 없어.’

태화는 자신의 방을 나와 식탁으로 향했다. 태화의 부모님은 마주 보고 앉은 채 물냉면을 먹고 있었다.

이미 마음속으로 결심이 선 태화는 머뭇거리지 않았다.

“두 분 모습 정겨워서 보기 좋네요.”

태화의 부모님은 삭발한 태화의 모습을 보자 경악했다. 전미경은 면발을 흡입하다 사레가 들려 연신 기침을 해댔다.

“콜록. 콜록. 태……화……. 너!”

서준상은 흡입하던 면발을 도로 그릇에 뱉었다.

“푸우.”

전미경은 서둘러 물을 마시고 나서 태화에게 다가가 태화의 가슴을 손으로 쳤다.

“너 이 자식! 하다 하다 이제 머리까지 밀어!”

“…….”

“이제 머리 밀고 절이라도 들어가겠다는 거야! 이놈의 자식아!”

태화는 굳이 전미경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대신 태화는 서준상을 바라보았다.

전미경의 반응과 달리 서준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화를 내려면 벌써 냈어야 했다.

하지만 서준상은 아무 말 없이 태화를 바라볼 뿐이었다.

“태화야. 잠깐 얘기 좀 하자.”

#.

태화와 서준상은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공원으로 이동했다. 두 사람은 빈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다행히 사람이 많지 않아서 빈 벤치를 찾는 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태화야 왜 그랬니? 아빠가 어떤 마음일지 알면서…….”

“이 방법밖에 없으니까요.”

서준상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자신의 손으로 태화의 머리를 어루만지다 어느 한 지점에서 손을 멈췄다.

태화의 왼쪽 이마에서 뒤로 대략 3㎝ 되는 지점이다.

서준상의 손끝에 태화의 까칠까칠한 머리카락이 아니라 맨살이 느껴졌다.

일명 땜빵.

머리카락 길이가 어느 정도 되면 보이지 않지만, 지금처럼 머리를 삭발하면 더 선명하게 보인다.

그것은 태화의 상흔이자 서준상의 상흔이기도 했다.

태화가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할 무렵.

“헤헤.”

아기인 태화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헤헤거리며 집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서준상은 거실에서 선반을 정리하고 있었다. 선반의 위치가 다소 높아서 서준상은 의자를 밑에 받치고 그 위에 올라가서 정리하고 있었다.

서준상은 선반을 정리하던 중 잠깐 몸의 중심을 잃어버렸고 실수로 선반에 있었던 연장이 밑으로 떨어졌다.

“어!”

선반에서 떨어진 연장은 그 밑에 있던 태화의 머리로 떨어졌다. 서준상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태화야!”

연장을 머리에 맞은 태화는 그 충격에 쇼크로 기절했고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서준상은 재빨리 태화를 자신의 품 안에 안았다.

“태화야! 정신 차려! 태화야!”

서준상은 울 여유가 없었다. 서준상은 태화를 안고서 병원으로 향했다.

“태화야! 괜찮아. 괜찮을 거야!”

택시를 타고 병원에 도착한 서준상은 곧바로 응급실로 향했다.

“아이가 다쳤어요! 살려주세요! 선생님!”

“보호자님 더 들어오시면 안 돼요. 여기서 기다리세요.”

서준상에게 태화를 인계받은 의료진은 급히 응급실 안으로 들어갔다. 태화가 들어가고 얼마 안 있어 전미경과 태화의 친형 서태훈(당시 나이 4세)이 병원에 도착했다.

전미경은 사고가 나던 시간에 서태훈을 데리고 시장에서 장을 보고 있었다.

어린 서태훈은 전미경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서준상은 전미경을 보자 참았던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흑흑……. 만약 태화 잘못되면 어떡하지? 그 어린 것이 얼마나 아팠을까?”

“아냐. 그럴 일 없어.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

“미경아. 다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이때 서준상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태화야. 제발 무사해야 한다. 그렇게만 되면 아빠가 너 하고 싶은 거 다 들어줄게.’

잠시 후

태화의 담당 의사가 나왔다. 담당 의사는 얼굴이 둥글둥글해서 인상이 부드러웠다.

서준상이 재빨리 담당 의사에게 다가갔다.

서준상의 얼굴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선생님. 저희 아이 괜찮습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정말입니까?”

“네.”

서준상은 그제야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하아. 다행이다.”

“검사 결과 아이의 두개골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정말 운이 좋았던 거 같습니다. 대신 두피 부위에 상처가 좀 깊이 났는데 수술로 잘 봉합했습니다. 며칠 정도 입원했다가 퇴원해도 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아이가 참 예쁘더군요. 크면 인물값 좀 하겠어요.”

“예쁘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잘 키우세요.”

“네. 선생님. 수고하셨습니다.”

#.

서준상은 태화의 상흔을 어루만지던 자신의 손을 거두었다.

“휴우~”

서준상의 이 한숨엔 아픔이 담겨 있었다. 특히 자식이 준 아픔이기에 더 아팠다.

아프지만 이제 결론을 내려야 했다.

“태화야.”

“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죄송합니다.”

태화는 차마 고맙다고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의 승부수가 서준상의 아픈 상처를 다시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열심히 할 겁니다.”

“그걸로는 부족해.”

“네? 부족하다니요?”

“아빠도 너한테 조건을 걸겠다.”

“조건이요?”

“5년 안에 성과를 내라.”

“5년 안에 성과요?”

“그래. 5년 안에 성공하라는 말이 아니다. 최소한 그 길을 계속 갈 수 있을 정도의 성과다. 그때까지 네가 연기하려고 했던 것처럼 아무 성과가 없다면 그건 네 길이 아니다.”

서준상이 5년이라는 시간을 정한 건 그때가 되면 태화의 나이는 33세다. 뭐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다.

태화는 서준상이 내건 조건이 무리한 조건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합리적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

“네?”

“앞으로 경제적 지원은 없다. 이제 네 힘으로만 해라. 먹여주고 재워주는 거로 만족해라.”

태화는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기에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저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서준상은 태화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서준상은 뭔가 설명할 순 없지만, 태화의 분위기가 이전과 바뀌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태화 녀석. 어쩌면 이번에 자신의 길을 찾을지도…….’

서준상은 이런 생각이 들자 마음이 아프지만은 않았다. 자식이 자신의 길을 찾고 거기서 행복하다면 부모로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거 아닌가.

“아빠 먼저 들어간다.”

“네.”

서준상은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걸어갔다.

태화는 서준상의 뒷모습을 보며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자신이 아버지의 아픈 곳을 건드렸다는 미안함과 그래도 자신을 믿어주었다는 고마움.

[태화 군. 자네의 마지막 승부수가 통했네.]

[영감님. 내가 말했잖아요. 제 승부수가 이 상황을 끝낼 거라고.]

[다행일세.]

[그래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네요.]

[자네 마음 이해하네. 결국, 자네가 잘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되네.]

[부모의 심정입니까?]

[그렇다네.]

박도봉 감독은 태화의 마지막 승부수를 지켜보면서 솔직히 놀랐었다. 태화의 승부수는 박도봉 감독의 예상을 뛰어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화 군이 큰소리는 쳤지만, 삭발에 이런 의미가 담겨 있을 거로 생각하지 못했다. 단지 젊은 사람의 치기인 줄 알았는데…….’

박도봉 감독은 이제야 신이 왜 태화를 선택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태화 군에게 부족한 영화적 지식은 내가 얼마든지 채워줄 수 있다. 하지만 태화 군의 마지막 승부수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태화의 마지막 승부수는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 취한 행동이다.

자신이 무언가를 하겠다는 의지가 다른 장애를 뛰어넘었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아무나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우유부단한 사람이 절대 선택할 수 없는 결정이다.

‘신중하게 한답시고 길게 고민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장고 끝에 악수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과감한 결단과 그걸 실제 행동에 옮기는 실천력. 이건 누가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냥 본능적으로 아는 거다.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걸. 즉 이건 타고난 재능이다.’

박도봉 감독은 순간 이영진이 떠올랐다.

이영진은 결정적인 시기에 박도봉 감독 자신을 배신하는 선택을 했고 행동에 옮겼다. 그리고 현재 그는 영화계라는 정글에서 최상위 포식자의 위치에 있다.

이영진이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였다면 현재 이영진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 이문호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태화 군과 이영진은 서로 다르면서도 묘하게 닮아 있다. 그래서 싸움이 되는 거다. 무열이는 그게 부족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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