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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11화 (11/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1화

태화가 박도봉 감독의 질문에 대답했다.

[제 판단은 아주 간단합니다.]

[간단하다?]

[네. 영감님 제안을 받는 게 현재 내 삶에 변화가 있을 거 같았으니까요.]

[음. 합리적인 판단일세.]

[게다가 영감님 제안을 제가 받지 않는다면 영감님을 언제까지 혹처럼 달고 살아야 하잖아요.]

[뭐라? 혹?]

[사실이지 않습니까? 허락도 없이 들어온 거 맞잖아요.]

[허허허. 그렇군. 자네 말이 맞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영감님과 저, 참 묘한 조합이군요.]

[무슨 의미인가?]

[지금까지 둘 다 성공적인 삶은 아니었잖아요.]

[그렇네. 하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될 거란 보장은 없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래도 뭔가 달라질 거란 희망은 있는 거잖아요.]

태화는 그동안 계속된 오디션 실패로 피로감이 쌓여 있었다. 이젠 그걸 털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태화는 어쨌든 앞으로 걷게 될 길에 대한 염려보다 기대감이 앞섰다.

[영감님과 전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잖아요. 어쨌든 일 더하기 일이 이가 될 거란 생각은 안 드네요.]

[그럼?]

[바닥 아니면 톱이 되지 않을까.]

도 아니면 모.

태화의 이 생각에 박도봉 감독은 전적으로 동의했다. 이 싸움은 중간이 없는 싸움이다.

[태화 군. 그리고 이 일이 잘 진행된다면…….]

[잘 진행된다면요?]

[아마도 난 자네의 머릿속에서 떠날 수 있게 되겠지.]

[영감님.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하지 않다?]

[네. 이영진을 응징한다는 것. 그건 영감님뿐 아니라 저에게도 기회입니다.]

태화의 말처럼 자기의 머릿속에 누군가와 동거한다는 건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일이 잘 진행된다면 내가 최고의 감독이 될 거고요. 저한텐 그게 중요합니다.]

태화의 대답에 박도봉 감독은 웃음이 터졌다.

[허허허.]

[영감님. 지금은 내가 어떻게 감독이 될지에 대해서 생각할 시기지 어떤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서 말할 때는 아닌 거 같습니다.]

[태화 군. 자네 말이 맞네. 하지만 쉽지 않을 거네. 신이 기회를 준다고 했지, 성공을 보장해 준다고 하지는 않았네. 게다가 이영진은 단순히 잘나가는 한 명의 감독이 아닐세.]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영진은 명실상부 영화판의 최고 권력자 아닙니까? 하지만 그걸 깨야 또 재밌죠.]

박도봉 감독은 태화의 이 자신감이 좋았다. 물론 당장 근거는 없지만.

[아주 좋은 자세일세.]

[영감님. 이제 우린 한배를 탄 겁니다.]

[태화 군. 앞으로 잘해보세.]

#.

태화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자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부모님의 모습이 보였다.

태화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영감님. 마지막 장벽입니다.]

[태화 군. 부모님을 잘 설득하면 되지 않을까 하네만.]

[그럴 거라면 제가 굳이 장벽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지 않은가?]

[그것도 나름이죠. 연기 준비하면서 수없이 설득했었습니다. 저번에도 마지막이라고 하고 간신히 허락을 받은 거고요. 아마 부모님도 저만큼 피로감이 쌓여 있을 겁니다.]

[그래. 그 심정 잘 알지.]

태화만큼이나 태화 부모님의 속도 까맣게 타들어 간 지 오래다. 멀쩡하게 생긴 아들이 오디션만 보면 다 떨어지니 세상 어느 부모의 속이 온전하겠는가?

[이번엔 쉽지 않겠구먼.]

[쉽지 않지만 그래도 설득해야죠. 우리의 운명이 걸린 일 아니겠습니까? 배가 출항도 못 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네. 배는 일단 출발을 시켜야 하네.]

박도봉 감독은 의지를 불태우는 태화가 대견스러우면서도 문득 신이 장난꾸러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한을 풀어 줄 사람이라면 차라리 감독 지망생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게 더 나은 거 아닌가? 하지만 신은 태화를 선택했다.

‘역시 쉽게 주지는 않겠다는 건가?’

태화는 신발을 벗으며 부모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다녀왔습니다.”

태화의 인사를 받자 서준상이 입을 열었다.

“그래. 학원 수강은 끊었냐?”

“아뇨. 끊지 않았습니다.”

태화의 대답에 집안은 벌집을 건드린 것 같았다.

서준상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태화! 이놈의 자식!”

말투로 보아 서준상은 화가 단단히 난 게 분명했다. 솔직히 이 상황에서 화를 내지 않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

태화는 부모님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서준상의 얼굴엔 노기가 서려 있었다.

“도대체 이유가 뭐냐? 또 연기한다고 버티는 거냐!”

“아닙니다.”

“그럼?”

“영화감독이 되려고 합니다.”

서준상은 태화의 예상치 못한 대답에 순간 당황했다.

“그래서 하필 하겠다는 게……. 영화감독?”

“네. 그렇게 됐습니다.”

여태껏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던 전미경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태화야! 너 미쳤어! 절대 안 돼!”

“엄마.”

“아무리 공부가 하기 싫어도 그렇지. 그렇다고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공부하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앞으로 열심히 할 거예요. 그러니까.”

“너, 영화감독 할 생각이면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아니, 왜 그렇게 반대만 해요.”

태화는 자신의 예상보다 장벽이 견고함을 실감했다. 그래도 일단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영화감독 한다고 하는 애들 어떻게 사는지 몰라서 그러는 줄 알아? 돈도 쥐꼬리만큼 받는 데다가 나이 먹고 돈 없어서 결혼도 못 하고. 그렇게 사는 게 좋니?”

“그건 감독 데뷔를 못 해서 그런거고…….”

“누가 너 감독으로 데뷔시켜 준대?”

“그건 내가 앞으로 노력해서…….”

“도대체 넌 언제까지 뜬구름 잡는 얘기만 할 거야!”

전미경은 태화의 가슴을 쳤다.

“네가 뭐가 부족해서 그렇게 살아야 하냐고!”

전미경은 말을 마치고 나서 울음을 터뜨렸다.

“흑흑.”

전미경의 눈물을 본 태화는 가슴이 짠해졌다.

“엄마.”

태화는 전미경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전미경은 태화의 손을 뿌리쳤다.

“너, 계속 고집부릴 거면 앞으로 밥도 먹지 마!”

전미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준상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받았다.

“그래. 내 생각도 네 엄마와 같다. 밥값 하지 못하는 놈은 밥 먹을 자격이 없지.”

“알겠습니다.”

“뭐?”

“허락해 주실 때까지 단식하겠습니다.”

“아니. 저 자식이!”

#.

태화와 부모님의 서로에게 했던 엄포는 공갈포가 아니었다. 태화는 삼 일째 단식에 돌입했다.

태화는 벽에 기댄 채 앉아 있었는데 굶어서 그런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영감님. 이러고 있으니까 현타가 오네요.]

[현타? 무슨 말인가?]

[현실 자각 타임.]

[태화 군. 무슨 소린가?]

[작은 월세방 얻을 돈이 있었다면 이러고 있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네. 이참에 독립을 선언하면 되는 거니까.]

[솔직히 알바도 해서 돈을 안 번 건 아닌데……. 연기자 준비한다고 돈을 모으지를 못했네요.]

연기자가 오디션을 준비하려면 의외로 돈이 들어간다. 오디션에 맞춰서 연기학원을 다니기도 하고 단기 과외를 받기도 한다.

태화는 거기에 자신이 알바로 번 돈을 연기를 준비하는 데 모두 써버렸다.

[태화 군. 그게 다 자네가 하고 싶어서 한 거 아닌가?]

[후회는 없는데 조금 아쉽네요. 허무하기도 하고.]

태화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어쩌면 당연했다. 결국, 열정의 대가치고 뭐 하나 남은 게 없었다.

[그런 소리 말게. 사람은 가끔 현재 자신의 처지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네.]

[현재 저의 처지야…….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신세죠.]

[그래. 그걸 인정하면 됐네. 난 자네가 그렇다고 절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네. 다시 시작하면 되네.]

[영감님.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 거 아닙니까?]

[태화 군. 자네는 최고가 되겠다고 다짐한 사람 아닌가? 이 정도로 무너지지 않을 거로 생각하네.]

[능구렁이가 따로 없군요.]

[당연하지. 내가 살아온 세월이 있는데. 그러니까 지나간 일에 너무 마음 쓰지 말게. 그나저나 자네 부모님도 고집이 대단한 거 같네. 자식이 단식한다고 하면 으레 약해지게 마련인데.]

[어디에 뒤처질 정도는 아니죠.]

[혹시 자취하는 친구 없나? 당분간 자취하는 친구 집에 가서 방법을 모색해 보는 게 좋을 거 같네만.]

[뭐, 장외투쟁 그런 겁니까? 저도 그 생각 해봤는데 아닌 것 같아서요.]

[서로 강 대 강이면 냉각기를 갖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한데.]

[아뇨. 피하지 않을 겁니다.]

[벌써 삼 일째네. 이대로 자네가 버틴다고 해서 돌파구가 마련될 거 같진 않네만.]

[마지막 승부수가 있습니다.]

[그게 뭔가?]

[아직 밝힐 수 있는 단계는 아닙니다.]

태화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영감님과 저는 참 묘한 동거생활입니다. 시각과 청각은 공유하는데 서로의 생각은 읽지 못하고.]

[아. 그리고 자는 것도 독립적이네. 자네가 잠든다고 해서 나도 자는 건 아닐세.]

태화와 박도봉 감독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방문 틈으로 맛있는 음식 냄새가 예고도 없이 스며들어왔다.

킁킁.

자연스럽게 태화의 코가 반응했다.

태화는 냄새를 맡자 음식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차돌박이다.”

태화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다. 태화의 부모님은 심리전을 펼치고 있었다.

이래도 항복 안 할 거야?

이 전략은 어느 정도 통하는 듯싶었다. 태화는 냄새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방문을 살짝 열었다.

태화의 행동을 본 박도봉 감독이 소리쳤다.

[태화 군. 정신 차리게! 태화 군!]

하지만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태화의 눈은 이미 반쯤 풀린 상태였다.

태화는 열린 방문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러자 식탁에서 차돌박이를 굽고 있는 부모님의 모습이 보였다.

서준상이 차돌박이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에 넣었다.

“태화 녀석. 아직 항복 안 했지?”

“네. 자기 방에만 있어요.”

“혹시라도 몰래 녀석한테 음식 주지 마.”

“그럴 일 절대 없어요. 나도 이번에는 그냥 못 넘어가. 그 많은 직업 중에 하필…….”

전미경은 태화가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말했다.

“인물이 좋으면 뭐 해? 써먹지도 못하는걸. 나중에 장가도 못 가면 어떡하려고.”

차돌박이 굽는 냄새에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끌려가던 태화는 부모님의 대화를 듣고서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안 돼.”

태화는 재빨리 방문을 닫았다.

“휴. 위험할 뻔했어.”

태화는 방에 걸린 수건을 집어서 자신이 쓰는 스킨로션을 수건에 뿌렸다.

그런 후 태화는 수건으로 자신의 코를 막았다.

#.

다음 날 태화는 자신이 며칠 전 주문한 택배를 받았다. 태화는 상자를 열어서 물건을 꺼냈다.

물건을 바라보는 태화의 표정은 사뭇 비장했다.

[태화 군. 이건 바리깡 아닌가?]

[네.]

[자네 혹시 이걸로 삭발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영감님. 제가 말했죠? 마지막 승부수가 있다고.]

[그 마지막 승부수가 삭발인가? 단식이 통하지 않으니 그다음은 삭발이라는 말인가? 태화 군. 이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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