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10화
태화는 서둘러 대답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 태화 자신의 인생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말하겠네. 자네가 감독으로서 이영진을 뛰어넘으면 되는 거네.]
[뛰어넘는다…….]
[그렇네. 인제 와서 법적 심판은 불가능해. 이영진, 그를 응징하는 건 그를 뛰어넘어 최고가 되는 걸세. 최고가 되면 그만큼 힘이 생길 테니까.]
[힘이 생긴다?]
태화는 힘이 생긴다는 이 말에 주목했다. 자신에게 힘이 생긴다는 말은 다른 의미로 사회적으로 성공한다는 의미였다.
[그렇네. 자네가 이영진을 뛰어넘고 그에 관한 진실을 말한다면 그 말에 힘이 실리게 될걸세.]
박도봉 감독의 말처럼 힘은 세상을 지배하는 이치다. 힘이 없는 자가 이영진에 관해서 말해봐야 미친놈 혹은 관종 소리만 들을 뿐이다.
[근데 왜 접니까?]
[자네밖에 없기 때문이네.]
태화는 순간 한 사람이 떠올랐다.
[석무열. 그 사람 있지 않습니까?]
[불행히도 무열이는 이영진의 적수가 아니네.]
[그건 왜입니까?]
[만약 무열이가 이영진의 적수가 될 만한 사람이었다면 지금까지 뭐라도 결과가 나왔겠지. 죽이든 밥이든…….]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태화가 보기에 석무열은 마음속으로만 화를 삭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석무열이 장례식장에서 보인 모습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그리고 무열이는 무엇보다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
[약점이라뇨?]
[이미 이영진에게 노출이 되어 있다는 점이네.]
실제 이영진 감독은 감독으로서 위치뿐 아니라 투자와 배급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이영진 감독이 작정하면 석무열은 작품을 만드는 게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석무열이 무엇을 한들 제대로 결과가 나오기는 어렵다.
[그러니까 영감님 말은 저처럼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르는 녀석이 해야 한다는 말이군요.]
[바로 그걸세. 태화 군, 어떤가? 한번 해보지 않겠는가?]
[아뇨. 그 결정은 잠깐 보류하겠습니다.]
[보류?]
[네. 이따가 만날 사람이 있습니다.]
[만나고 나서 결정하겠다는 건가?]
[네. 근데 석무열, 그분은 괜찮을까요?]
태화가 이 말을 한 건 석무열이 경찰에 인계돼서 경찰차에 압송되는 걸 보았기 때문이었다.
[괜찮을 걸세. 무열이는 유능한 변호사를 알고 있거든.]
[유능한 변호사요?]
[그래. 석무철. 무열이가 뒷바라지해서 키운 친동생이자 유능한 변호사라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
태화는 노량진을 떠나 한강 공원 망원지구로 향했다. 이곳은 태화의 집에서 가까워서 평소 자주 찾는 곳이다.
태화는 빈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해가 지고 나서인지 강가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 시원하다.”
태화는 순간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태화야, 무슨 일이야.”
태화가 고개를 돌리자 한재영이 서 있었다.
“너 좀 있으면 바쁠 거잖아.”
“그렇긴 하지. 앞으로 촬영 들어가면 당분간 얼굴 보기 힘들지.”
태화는 한재영에게 마음의 빚이 있었다. 한재영은 힘들게 태화에게 오디션 기회를 주었지만, 어쨌든 태화는 그 기회를 걷어차 버린 셈이었다.
“그때 오디션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신경 안 써. 근데 너, 감독님한테 혼났지?”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잔소리 좀 들었지. 정말 신경 쓰지 마. 지금 바빠서 그때 일 아무도 기억 못 해.”
“자, 받아.”
태화는 편의점에서 산 캔맥주 하나를 재영에게 건넸다.
“이걸로 퉁치자.”
“퉁치는 가격치곤 좀 싸지만 봐줄게.”
태화와 한재영은 각자 들고 있던 캔맥주를 부딪치고 나서 한 모금씩 마셨다.
태화와 한재영.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캬~ 좋다.”
태화는 다른 주제로 넘어가야겠다고 판단했다. 태화가 오늘 한재영과 만나려 한 건 원래 마음의 빚을 갚으려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재영아. 너 이영진 감독에 관해서 어떻게 생각해?”
“이영진 감독? 그건 왜?”
“오늘 <아름다운 인생> 촬영 현장을 구경했었거든.”
“오, 그래? 좋은 구경 했네……. 이영진 감독. 현재 최고의 감독이지. 아마도 현재 영화 스태프를 하는 사람은 이영진 감독하고 일하는 게 일 순위일걸. 나도 그 사람 중 하나고.”
“혹시 뭐 소문 같은 거 없어?”
“이영진 감독에 관한 거?”
“응.”
“소문? 딱히 소문이라고 할 건 없어. 있다면…….”
“있다면?”
“인간성도 좋다고 할 수 있지.”
“인간성이 좋다고?”
“응. 정기적으로 기부하는 거로 알고 있어. 솔직히 돈이 많아도 기부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노블레스 오블리주’. 참 멋지지 않냐?”
태화는 잠자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도봉 감독에게 말을 걸었다.
[영감님. 노블레스 오블리주라. 이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은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기 위해 때론 가면을 쓰기도 하네.]
[가면이라? 그렇다면 이영진은 신분 세탁 제대로 한 듯하네요.]
[이영진.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지. 한재영, 이 친구를 만난 것도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나?]
[네. 그래도 재영이는 몇 년간 영화판에 몸담았던 놈이니까요. 현재 영화판 사람들의 인식이 재영이하고 비슷하다고 봐야죠. 그리고 재영이는 내가 가장 믿을 수 있는 녀석이에요. 영감님 말만 믿고 갈 수는 없잖아요.]
[꼼꼼하군.]
[그런 셈이죠. 확실한 건 영감님과 이영진 둘 중 하나는 위선자라는 사실입니다.]
박도봉 감독은 태화의 이런 의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라도 그랬을 테니까.
[이해하네. 자네가 그런 생각할 만하네.]
캔맥주를 한 모금 마신 한재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태화야. 조금만 기다려라.”
“왜?”
“내가 영화판에서 자리 잡으면 너 캐스팅한다.”
태화는 한재영의 말에 짠한 감정이 올라왔다.
“어느 세월에.”
“그건 잘 모르지. 크크크.”
“그러다 노인 돼서 출연하는 거 아니냐?”
“아주 악담을 해라. 태화야, 그래도 나 참 대단하지 않냐? 너를 연기자로 쓸 생각을 하고.”
“내가 볼 땐 넌 참 기특한 녀석이야.”
태화는 한재영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연기자로 쓰고 싶다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근데 재영아.”
“왜?”
“나 이제 연기자 하려고 발버둥 안 치련다.”
“뭐?”
태화의 발언은 한재영에게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너, 지금까지 그렇게 고생했는데……. 너 진짜로 공무원 시험 준비하려고?”
“아니, 너니까 하는 이야기지만……. 솔직히 나 연기로 가능성 별로 없잖아.”
“그럼?”
“희망 고문은 이제 접으려고.”
“야,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안 하고 뭘 어떡할 건데? 혹시 뭐 산속에 들어가서 자연인으로 살려고?”
“나 영화감독 되려고.”
한재영은 순간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뭐?”
놀란 건 한재영뿐 아니라 박도봉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태화는 박도봉 감독에게 확답을 주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박도봉 감독은 태화가 자신도 의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박도봉 감독은 태화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가 궁금했지만 잠시 미루기로 했다.
‘지금은 내가 두 사람의 대화에 낄 타이밍은 아니야.’
태화는 다시 충격받은 한재영에게 또박또박 한 글자씩 정확하게 말했다.
“영. 화. 감. 독. 되. 려. 고.”
태화는 고개를 돌려 한재영을 바라보았다. 한재영의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태화야, 너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한재영은 한 손으로 태화의 이마를 짚었다.
“아니. 열은 없는데?”
“나, 정상이야.”
태화가 가볍게 자신의 이마를 짚은 한재영의 손을 가볍게 툭 쳐내며 말했다.
“왜? 난 영화 감독하면 안 되냐?”
“아니.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는데 그럴 수 있나? 네가 원하면 대통령이 되려고 할 수도 있어.”
“그럼. 됐지. 뭐가 문제냐?”
“너 같으면 이 상황이 납득 되겠냐? 네가 연기를 포기한다는 말도 믿기지 않는데 감독을 하겠다니.”
지금까지 적지 않은 기간 태화를 지켜본 한재영으로선 지금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태화는 ‘서무스’라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연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인간이었다.
‘저번 오디션 탈락이 너무 충격이었나? 그게 아니면 요즘 스트레스를 너무 받아서 그런 건가?’
한재영은 아무 말 없이 한동안 태화를 바라보았다.
태화도 한재영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태화. 이 녀석. 눈빛이…….’
태화의 눈동자는 이 순간 흔들림 없이 너무나 차분했다.
“태화, 너……. 진짜구나?”
“그래, 나 진짜다.”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야?”
태화는 한재영의 질문에 당황하지 않았다. 태화는 오히려 이 순간 마음이 편했다.
마치 묵혀왔던 가슴속의 응어리를 내뱉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태화는 한재영에게 대답하기 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제 나도 뭔가 다른 길을 찾아봐야지.”
“다른 길?”
“그래. 솔직히 그동안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너무 힘들었어.”
한재영은 태화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태화의 심정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본인이 아무리 하고 싶어 하고 노력해도 오랜 기간 결과가 안 나온다면 지칠 수밖에 없다는 걸.
‘태화 녀석.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었지.’
한재영이 태화를 보며 말했다.
“네 생각 난 지지한다.”
“고맙다.”
“근데 왜 하필 감독이냐? 감독도 만만한 길은 아닌데. 어쩌면 연기자의 길보다 더 힘들지도 몰라.”
“그래도 감독이 연기와 완전히 떨어진 생소한 분야는 아니잖아.”
“그렇긴 하지.”
한재영은 궁금했지만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더 묻는다고 해도 대답해 줄 태화가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재영아, 사람 마음이 참 이상하더라.”
“왜?”
“솔직히 연기할 땐 어떻게 단역이라도 한 번 출연하는 게 목표였는데 진로를 바꾸니까 더 큰 목표가 보이더라고.”
“더 큰 목표?”
“이왕 하는 거 최고가 한 번 돼보려고.”
“최고?”
“응. 최고의 자리. 그 맛이 어떨까 궁금해.”
다른 때 같았으면 한재영은 태화의 이 밀을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웃었을 게 뻔했다. 하지만 태화는 지금 농담이나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한재영은 태화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태화가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 허튼소리나 할 녀석이 아니지.’
이쯤 되면 한재영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태화. 너란 놈은 진짜. 예측이 안 되는 놈이야.”
“나 원래 그런 놈 아니냐.”
“그래. 네가 하고 싶다면 해라. 나도 응원하마.”
“고맙다.”
#.
태화는 한재영과 헤어지고 나서 집으로 향했다.
[태화 군. 한재영이라는 친구. 괜찮은 사람인 거 같더군.]
[좋은 녀석이에요.]
[그래. 나중에 태화 군에게 힘이 될 거네. 모든 걸 떠나서 자신을 응원해 주는 사람이 세상에 한 사람이라도 있다는 건 좋은 일이지.]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네. 태화 군.]
박도봉 감독은 기분이 좋았다. 태화가 앞으로 영화감독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게 중요했다.
[태화 군. 하나 궁금한 게 있네?]
[왜 영감님 제안을 받아들였냐고요?]
[그렇네. 자네가 희망 고문은 접겠다고 했지만, 자네는 나와 이영진. 두 사람을 다 의심한 상황이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