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9화
사람들 사이에서 커다란 함성이 터진 건 주연배우 유혜성이 근사한 슈트를 입고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유혜성의 이 등장은 철저하게 영화 홍보를 위해서였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팬들에게 하는 인사.
아마도 내일쯤 언론엔 촬영 현장이 풀려서 포탈을 뒤덮게 될 것이다. 그리고 대중들은 이 영화의 개봉을 손꼽아 기다리게 될 것이다.
“유혜성! 유혜성!”
유혜성 뒤로 이영진이 활짝 웃으며 등장했다. 이영진도 대중들에게 아주 잘 알려진 스타 감독 중 하나였다.
사람들은 유혜성과 함께 이영진을 함께 연호하기 시작했다.
“유혜성!”
“이영진!”
최고의 배우와 최고의 감독. 이 두 사람의 등장은 촬영 현장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이미 사람들에겐 방금 석무열이 촬영장에 난입했던 사건은 모두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태화는 사람들의 함성을 뒤로하고 서둘러 인파 속을 빠져나왔다.
#.
태화가 인파 속을 빠져나와 10여 분 정도 걸어가자 비교적 조용한 골목이 나왔다. 태화는 골목길 담에 등을 기대고 섰다.
[영감님. 이문호가 도대체 누굽니까?]
[이문호는 무열이의 선배네.]
[그 말씀은?]
[이문호는 한때 내 제자였네. 아주 재능이 넘쳤던 녀석이었지. 특히 녀석은 액션 영화에 재능을 가지고 있었네.]
[그런데요?]
[그 이문호가 바로 이영진일세.]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대답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말이 됩니까?]
[태화 군.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일세. 아마도 자넨 나 같은 삼류 감독이 이영진 같은 감독을 데리고 있었다는 걸 믿을 수 없었을 걸세.]
태화는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이내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태화는 고등학교 때를 떠올려보았다.
교사가 실력이 없어도 시험 점수를 잘 받아서 좋은 대학에 가는 학생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실력 없는 교사가 뛰어난 제자를 두지 말란 법은 없다.
박도봉 감독 문하에 이영진 감독이 있었다는 게 아주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었다.
[근데 왜 촬영장에서는 모른 척하고 있었습니까?]
[내가 말했다면 자네가 믿었겠는가?]
[당연히 아니죠.]
[사실 난 촬영장에서 자네에게 나와 이영진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연출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네. 자네가 연출에 흥미를 느끼고 영화감독의 길을 선택하기를 바랐네.]
[그건 넘어가죠. 제가 궁금한 건 석무열, 그 사람이 왜 촬영장까지 난입했냐는 겁니다. 단순히 장례식장에 안 온 게 서운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태화 군. 제대로 봤네. 무열이가 그렇게 행동한 건 이영진이 이문호이던 시절, 나를 배신했기 때문이네.]
[배신이요?]
[그래. 이문호가 배신할 당시 난 액션 영화 한 편을 준비하고 있었네. 작품명 <잔인한 서울>이네.]
[그런데요?]
[그 작품은 결국 내가 만들지 못했네.]
[왜죠?]
[이문호가 내 시나리오의 내용을 훔쳐 가서 자신이 만들었기 때문이네. 그 영화 제목이 바로 <노을 속으로>이네. 감독으로 데뷔하면서 이름도 개명했지.]
[그게 정말입니까?]
[사실이네. 내가 지금 자네에게 거짓말을 해서 뭘 얻겠는가?]
<노을 속으로>는 2000년도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작품은 시골에서 주먹을 좀 쓴다고 하는 남자주인공이 서울로 상경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액션 영화다.
결국, 남자 주인공은 노을이 비치는 곳에서 조직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는 거로 결말이 난다.
개봉 당시 흥행성적은 나쁘지 않았고. 평단에서도 호평이 이어졌다.
-한국적 느와르의 탄생!
-30대의 젊은 신인 감독. 데뷔작을 멋지게 쏘아 올리다!
<노을 속으로> 작품 이후 이영진은 탄탄대로를 걷는다.
[무열이가 오늘 이렇게 분노한 건 당시 상황 때문이네.]
[당시의 상황이요?]
[그래. 난 <잔인한 서울>이란 작품에 모든 걸 걸다시피 했네. 그동안 나에게 비아냥거렸던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네.]
[그 심정 이해합니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들에게 시원하게 펀치를 날리고 싶었던 그 마음.
나도 이렇게 할 수 있어!
[그런데 소송은 하지 않으셨습니까?]
[당연히 소송했네. 하지만 결국 난 그 소송에서 졌네.]
이후 박도봉 감독은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평생 모은 재산으로 <벌이 날다>란 영화를 제작했지만 결국 그 작품은 일주일 만에 극장에서 간판을 내리고 흥행에 참패했다.
태화는 이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되었다.
‘그래. 석무열, 그 사람이 장례식장에서 왜 그렇게 공격적이었었고 오늘 촬영장에 난입까지 했는지……. 이젠 납득이 간다. 그런데 이해는 가는데……. 속이 왜 이렇게 들끓는 거지?’
어느새 태화의 내면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마치 속에서 활화산이 터지는 것 같았다.
태화는 이 충격적인 진실을 알기 전까지 가슴이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자신의 꿈을 버려야 하는 상황이니 당연히 그럴 만했다. 하지만 지금, 태화의 허한 가슴으로 분노가 세차게 몰아치며 그 빈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쿵쾅쿵쾅.
태화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호흡이 빨라졌으며 덩달아 몸에서 열이 나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게 말이 돼? 배신자에 도둑놈은 저렇게 성공해서 떵떵거리며 살고 있고 자기 걸 도둑맞은 사람은 말년에 고시원 전전하다가 차가운 길바닥에서 생을 마감하는 게…….’
태화는 뺑소니 사고를 목격했던 그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렸다. 자신의 품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박도봉 감독의 모습.
그래서일까? 태화의 분노는 점점 끓어오르고 있었다.
‘게다가 도둑놈은 추악한 흔적을 감추기 위해서 개명까지 했는데.’
태화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시 태화의 가슴속에 분노의 감정이 한바탕 세차게 몰아쳤다. 그 분노가 절정에 달하면서 태화의 주먹 쥔 손이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한바탕 분노의 파도가 지나간 후 태화의 내면에 또 다른 무언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거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왜 그동안 아무도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없었지? 정말 이건 아니잖아! 이걸 그냥 두고 봐야 하는 건가?’
태화의 내면에 일어나고 있는 분노가 아닌 또 다른 감정의 정체.
그건 정상적인 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
바로 정의감이었다.
태화의 가슴 속에 바로 그 정의감이 깨어나고 있었다.
[영감님.]
[왜 그런가?]
[제가 정말 화가 나서 그러는데…….]
태화의 이 질문은 머릿속으로 생각해서 나온 발언이 아니었다. 순전히 그의 격정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태화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박도봉 감독은 반가웠다. 지금까지 태화는 영화감독의 길을 가려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었다. 하지만 현재 그 분위기는 달라져 있었다.
‘대체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걸 하려 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분노 때문에 무슨 일을 하려고 하기도 한다.’
분노가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경우는 많다. 누군가 공권력의 부당함을 목격하고 나서 인권변호사가 되는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박도봉 감독은 태화의 현재 내면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분노가 태화의 정의감을 일깨웠고 지금껏 단단했던 태화의 마음을 돌리고 있다는 걸.
‘결국, 분노가 태화 군이 영화감독으로 가게 하는 것 같구나.’
태화가 이처럼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건 박도봉 감독이 원하던 바였다. 하지만 박도봉 감독은 지금 노량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단순히 우연이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하필 태화 군이 노량진에 왔을 때 이영진이 나타났고 무열이가 등장했다. 나, 이영진, 석무열. 이 세 사람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태화 군은 분노의 감정을 갖게 되었다. 이 일련의 흐름이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롭다. 우연이라는 탈을 쓰고 있지만, 누군가에 의해서 짜인 느낌이다. 그렇다면 혹시……?’
박도봉 감독은 이 상황에 신이 개입했음을 직감했다.
‘일단 기회는 주겠다는 건가?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하지만 박도봉 감독은 태화에게 자신의 직감을 발언하지 않았다. 이건 박도봉 감독 자신이 괜히 말을 꺼냈다가 태화가 다시 마음을 바꿀 수도 있다는 역효과 때문이 아니었다.
#.
[영감님. 그 인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응징해야지.]
[어떻게 응징할 수 있습니까?]
박도봉 감독은 순간 갈등했다. 신은 박도봉 감독 자신에게 한을 풀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었다. 하지만 박도봉 감독은 아무리 신이 개입했다고 하더라고 인간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결국 결정은 오롯이 태화가 해야 했다. 태화가 영화감독의 길로 가는 게 바로 자신의 인생이어야 했다.
이 상황에서 박도봉 감독은 모른 척하고 태화를 선동하면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박도봉 감독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태화 군. 그전에 한 가지만 말하겠네.]
[뭡니까?]
[태화 군. 내가 자네의 머릿속으로 들어온 이유, 궁금하지 않나?]
태화로선 당연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씀해 보세요.]
[그래. 내가 그날 사고를 당하고 나서…….]
박도봉 감독은 태화에게 일련의 과정에 관해서 설명해 주었다. 태화는 아무런 대꾸 없이 박도봉 감독의 설명을 들었다.
[결국, 내가 영감님의 그 한을 풀어줄 사람이라는 겁니까?]
[그래. 그게 내가 내린 결론이네.]
태화는 이제야 무당이 자기의 머릿속에 있는 박도봉 감독을 쫓아내지 못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당이 신을 이길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태화는 또 하나 의문이 들었고 거침없이 박도봉 감독에게 말했다.
[근데 굳이 그 이야기를 지금 하십니까? 혹시라도 내가 기분이 나빠서 안 한다고 할 수도 있잖아요.]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겠지. 내가 자네를 이용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말일세. 하지만 난 자네에게 솔직해지고 싶었네.]
태화는 일단 박도봉 감독의 이 발언을 신뢰했다.
‘영감님은 자신이 한 발언이 자기에게 불리할 거란 결과를 예상했음에도 나한테 했다. 그렇다는 건 최소한 바닥은 아니라는 의미다.’
태화는 다시 현 상황을 판단하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영감님이 내 머릿속에 들어온 건 엄연히 벌어진 현실이다. 내가 영감님의 제안을 받지 않을 때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언제까지 머릿속에 나 아닌 다른 사람과 동거해야 한다는 현실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만약 영감님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거기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걸 따져보아야 한다.’
이 때문에 잠시 대화가 멈췄지만 박도봉 감독은 태화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만큼 이 순간은 태화나 자신에게 중요한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태화가 대화를 이어갔다.
[영감님. 계속 말해보시죠.]
[무슨 말 말인가?]
[어떻게 하면 이영진을 응징할 수 있는지.]
[자네 결심이 선 건가?]
[일단 그 방법을 먼저 들어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