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8화
태화는 박도봉 감독에게 해결책을 듣고 나서 직원에게 다가갔다. 그런 후 태화는 카메라를 보면서 하나둘씩 해결책을 풀기 시작했다.
“직원분, 우선 색감이 문제입니다. 지금 카메라가 프리셋 값으로 설정이 되어서 색감이 이상하게 잡힌 겁니다.”
태화가 말하자 직원이 태화를 묘하게 쳐다보았다. 직원의 표정에는 태화를 원망하는 표정이 같이 묻어나왔다.
병 주고 약 주냐?
하지만 그러면서도 직원은 태화가 카메라의 액정화면을 잘 볼 수 있게 태화에게 살짝 자리를 비켜주었다. 일을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프리셋을 매뉴얼로 바꾸고 화이트 값을 재설정하세요.”
태화의 지시대로 직원이 카메라 세팅 값을 조정했다.
색감을 조정했지만, 카메라에 약간 붉은 색이 감돌았다.
“약간 붉은 색이 도는 건 RGB 색상 값을 조금만 조정하면 됩니다. 그리고 카메라 노출도 약간만 낮춰주면 눈의 피로가 덜 할 겁니다. 지금 너무 칠판이 밝아서 오히려 가독성이 떨어집니다.”
태화가 말한 대로 카메라값 조정을 마치자 수험생들의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훨씬 보기 좋은데.”
“확실히 전보다 낫네요!”
수험생들의 반응에 직원은 멋쩍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직원이 태화에게 물어보았다.
“혹시 영상 전공하셨나요?”
사실 직원은 영상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었다. 학원가는 영상과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이 종종 영상팀 직원으로 일을 하기도 했다.
직원이 태화에게 저런 질문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요.”
태화도 멋쩍게 인사를 하고서 강의실을 나섰다.
[영감님. 카메라도 좀 다룰 줄 아시나 봐요?]
[내가 이것저것 관심을 두다 보니 그렇게 됐네.]
태화의 뒤로 학원 직원이 따라왔다.
“저기 잠깐만요.”
“네? 무슨 일이시죠?”
“실례지만 성함이?”
“서태화입니다.”
직원은 자신의 명함을 태화에게 건넸다.
“태화 씨. 공탑 영상팀 사원 이주성입니다. 혹시 나중에 촬영일 하고 싶으면 연락해주세요.”
“네?”
“지금 강의 촬영할 사람이 필요한 시기거든요. 생각 있으면 연락해 주세요.”
“아. 네.”
#.
무료 강의 2교시가 시작된 지 30분이 흘렀다. 강의를 듣던 태화는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태화 군. 나가려고?]
[네. 답답해서 못 있겠네요.]
태화가 중도에 강의실을 나오려고 결심한 건 강의가 재미없어서가 아니었다.
채철환의 입담은 분명 재미가 있었다. 하지만 태화는 애초에 이 강의에 흥미가 없었다.
그냥 한번 들어보자는 심정이었다. 태화가 강의 중간에 나가기로 한 건 무엇보다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수강생들은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었고 일타강사를 마치 구원자라도 되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아. 정말 미치겠네요.]
[왜 그런가?]
[수험생은 마치 신도 같고 강사는 그냥 교주 같네요.]
[그건 절실함 때문이네.]
[무슨 말인지 알아요. 시험에 합격해야 한다는 절실함 때문에 스타강사를 교주처럼 여기는 거겠죠.]
태화는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 머지않아 자신도 다른 수험생처럼 될 거 같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를 교주처럼 바라본다는 것. 태화로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태화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미련 없이 강의실을 나왔다. 다행히 702호 강의실은 강사가 있는 곳이 아니어서 강의실을 나갈 때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강의실을 나온 태화는 학원 데스크로 이동했다. 데스크 앞에는 수강 신청을 하기 위해서 수험생들이 줄 서 있었다.
정상적이라면 태화는 그 줄에 합류해야 했다. 하지만 태화는 그 줄에 합류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태화 군. 수강 신청 안 할 건가?]
[글쎄요. 마음이 내키지 않네요.]
태화가 수강 신청을 망설이는 지금, 박도봉 감독에겐 기회의 순간이었다.
‘태화 군이 망설이고 있다. 그렇다면 틈이 벌어진 거다. 내가 여기서 태화 군을 설득한다면 태화 군은 내 바람대로 영화감독의 길을 걸을까?’
박도봉 감독은 이내 자기의 생각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아니다. 태화 군은 마음이 내켜야 하는 스타일이다. 내가 지금 설득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오히려 역효과만 날 수 있다. 뭔가 계기가 필요하다. 태화 군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박도봉 감독은 현시점에서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태화는 일단 학원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숨통이 그나마 트이는 것 같았다.
‘휴. 살 거 같다.’
태화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도 잠시였다. 태화는 이내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걸 발견했다. 노량진이 유동 인구가 많다고 해도 이렇게 한곳에 모여 있는 건 드문 일이다.
[뭔데 저렇게 사람들이 모여 있을까요?]
[태화 군. 아무래도 여기서 영화 촬영이 있는 거 같네만.]
[영화 촬영이요?]
[그렇네. 저기 사람들이 움직이는 게 보이지?]
태화는 박도봉 감독이 알려주는 방향을 집중해서 보았다. 거기엔 모여드는 사람들은 통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영감님. 로케이션이군요.]
[그런 것 같네.]
[그나저나 년 수는 못 속이겠네요.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저 사람들을 찾아내시다니.]
[경력이 그냥 쌓이는 건 아니라네.]
영화 촬영은 규모가 꽤 큰 듯했다. 태화가 가까이서 보니 도로변에는 커다란 발전차가 한 대가 아니라 몇 대가 주차해 있었고 전세를 낸 고속버스도 몇 대 주차해 있었다.
고속버스에는 영화 스태프들과 영화 출연진들이 각각 고속버스에 나누어 타고 있었다.
고속버스 앞 창문에는 오늘 촬영할 영화에 대한 간단한 정보가 붙어 있었다.
제목 <아름다운 인생>
각본/감독 이영진
제작사/여름
태화는 감독인 이영진의 이름을 보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영진 감독이 누구인가? 현재 이 나라 영화계에서 톱으로 손꼽히는 감독이다.
특히 이영진 감독은 액션 영화 같은 남성적인 영화에서 장점을 발휘했고 이 점이 남자 배우를 돋보이게 했다. 그래서 남자 배우라면 이영진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에 주연으로 출연하는 게 꿈이기도 했다.
현재 촬영 준비 중인 ‘아름다운 인생’은 첩보 액션 영화로 남자주인공이 조직의 배신자로 누명을 썼다가 위기를 극복하고 자신의 누명을 벗는다는 내용이다.
이번 촬영의 목적은 노량진에서 추격전을 촬영하기 위한 것이다.
한편 언론에서도 ‘아름다운 인생’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아름다운 인생’은 현재 제작에 들어간 영화 중 가장 기대되는 작품 중 하나다. 영화의 줄거리나 주제를 떠나서 흥행 보증 수표인 이영진 감독과 영화계의 블루칩 유혜성의 만남으로도 충분히 기대되는 작품이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와. 저거 뭐야?”
태화도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우웅~
카메라를 장착한 드론의 소리였다. 이 드론 소리만으로 촬영을 구경나온 사람들을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영감님. 오늘 촬영 대박일 거 같은데요?]
[그래 보이네.]
태화에게 대답하는 박도봉 감독의 말투는 그 이전과 살짝 달랐다. 하지만 촬영장 분위기에 압도된 태화는 그 미묘한 말투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좀 더 앞으로 가야겠어요.]
#.
태화는 인파를 뚫고 거의 앞까지 다다랐다. 맨 앞줄에 가고 싶었지만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사람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밀지 마세요!”
“밀지 마! 밀지 말라고!”
태화는 무리해서 더 앞줄로 이동하지 않기로 했다. 그냥 현재의 자리에 있어도 촬영을 관전하는 데 큰 무리는 없었다.
태화는 자신도 모르게 촬영장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촬영이 시작되기 전 연출, 카메라, 조명, 미술 등을 담당한 스태프들은 각자 맡은 일을 위해 뛰고 있었다.
[태화 군. 참 분주하게 움직이지?]
[네.]
태화가 만약 오디션에 한 번이라도 붙었다면 이러한 현장의 분위기를 알았겠지만, 현재로선 학부 때 했던 졸작이 마지막이나 다름이 없었다.
순간 박도봉 감독은 태화가 촬영장에 흥미를 보인다는 걸 눈치챘다. 박도봉 감독에겐 어쩌면 기회라면 기회였다.
흥미를 보인다는 건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태화 군. 저기 카메라가 위치한 곳을 보게나.]
[네.]
[카메라의 위치는 영화 촬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네. 왜 그런지 아는가?]
[피사체를 잡기 위한 것 아닌가요?]
[그 말도 맞지만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네.]
[영감님이 원하는 대답은 뭔가요?]
[프레임을 짜기 위해서네.]
[프레임이요?]
[그렇네. 감독은 프레임 안에 자신이 그리고 싶은 이미지를 넣네. 그렇게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는 거네.]
영화를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는 바로 쇼트다. 그리고 이 쇼트는 바로 프레임이 짜여진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연출은 카메라를 통해서 프레임을 짜는 거라고 할 수 있네.]
태화도 영화 이론 시간에, 비슷한 내용을 들었던 것 같지만 현재는 가물가물한 상태였다.
어쨌든 태화는 한동안 카메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태화 군이 흥미를 보이는 것 같군. 어쩌면 지금이 태화 군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르겠어.’
박도봉 감독이 태화에게 다시 말을 걸려는 그 순간이었다.
한 남자가 인원 통제를 하기 쳐놓은 바리케이드를 뛰어넘어서 촬영장으로 난입해 들어오고 있었다.
난입한 남자와 태화가 위치한 곳의 거리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태화는 그 남자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너무나 첫인상이 강렬해서 못 알아보는 게 오히려 이상할 남자였다.
[영감님. 저 사람은 장례식장에 왔었던…….]
[그래. 무열이네.]
석무열이 촬영장 안으로 난입하자 바로 뒤이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야! 뭐해! 저 새끼 잡아!”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현장을 통제하던 스태프 서너 명이 바로 따라붙기 시작했다. 석무열은 이들을 요리조리 피하면서 소리쳐 외치기 시작했다.
“야, 이문호! 그렇게 사니까 좋냐!”
석무열이 한마디 하는 사이 현장 스태프들이 석무열을 잡았다. 하지만 석무열은 쉽게 제압당하지 않은 채 소리쳤다.
“너! 박도봉 감독님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아냐! 최소한 장례식장에 와서……. 읍!”
석무열은 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스태프가 입을 틀어막는 바람에 더는 하지 못했다. 하지만 태화는 석무열이 소리쳤던 말을 확실히 들을 수 있었다.
불과 자신과 몇 미터 거리에서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영감님. 지금 이게 무슨 소리죠? 왜 석무열 저 사람이 이곳에 와서 영감님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까?]
[…….]
[그리고 이문호가 누굽니까?]
[…….]
[영감님. 뭡니까?]
[태화 군. 조금 설명이 필요할 거 같네.]
[여긴 너무 시끄럽네요. 조용한 데로 가시죠.]
태화가 인파 속 빠져나가려는 순간 갑자기 커다란 함성이 터졌다.
“우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