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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7화 (7/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7화

박도봉 감독은 마음이 급했다. 오늘은 본격적인 학원 개강이 아니라 수강 신청을 하는 날이다. 뭐든지 도로 물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만약 태화가 오늘 수강 신청을 한다면 그만큼 박도봉 감독의 설득은 어려워진다.

[태화 군. 정말 시험 준비할 건가?]

[영감님. 다른 수가 없잖아요.]

[자네. 부모님을 설득할 생각은 없는 건가?]

[나보고 시험 준비하지 말고 영화감독 하란 말입니까?]

[허허. 그래. 영화감독. 꽤 근사한 일이거든.]

[영감님 보면 그럴 것 같지도 않습니다.]

[뭐?]

[말년에 고시원에서 사는 게 그리 근사해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그거야……. 어쩌다 보니 그런 거고.]

[영감님. 낮은 페이에 불확실한 미래. 설사 감독 입봉이 성공한다고 해도 자신이 연출한 영화가 흥행하지 못하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존재. 이게 영화감독 아닙니까?]

[태화 군. 자네는 너무 비관적으로 보고 있네.]

[비관적인 게 아니라 현실적인 겁니다. 게다가 영감님이 일류는 아니잖아요.]

태화의 마지막 발언은 꽤 도발적이었다. 하지만, 박도봉 감독이 누구던가?

영화계 입문 이후 평생을 비주류로 살아왔고 삼류라는 말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녔던 사람이었다.

박도봉 감독은 흔들리지 않았다.

[자네. 왜 연기를 그렇게 하려고 하나?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데.]

[저한테 도발하는 겁니까?]

[아니. 정말 궁금해서 그러네. 어떻게 보면 자네가 연기하려고 하는 게 더 현실성이 떨어져서 말일세.]

[하고 싶으니까요.]

[뭐라?]

태화의 대답에 박도봉 감독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영감님. 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냥 하고 싶어서요. 화면에 연기하는 내 모습이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

[다른 이유가 필요합니까?]

박도봉 감독은 순간 깨달았다. 자신의 방법이 잘 못 되었음을.

‘아. 내가 인생 헛살았구나.’

박도봉 감독이 삼류 감독이라는 비아냥 속에서도 버텨낸 건 단 하나였다.

영화감독을 하고 싶었으니까.

하고 싶었기 때문에 고되고 힘든 과정을 버틸 수 있었다.

-이번에 정차하실 역은 노량진, 노량진역입니다.

전철 문이 열리고 태화가 내렸다.

#.

태화는 노량진역을 빠져나와 학원가로 향했다. 태화는 공탑으로 향했다.

공탑은 ‘공무원 시험 탑 학원’의 줄인 말로 수험생들에게 평가가 괜찮았다.

태화는 수강 신청을 위해서 학원 데스크로 향했다. 학원 접수실에는 학원의 각종 홍보물이 붙어 있었다.

그중 태화의 눈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일타강사 무료 강의!

노량진에서는 홍보를 위해서 수강 신청 기간에 강사들이 무료 강의를 하기도 한다. 수강생들이 강의를 직접 들어보고 나서 판단하라는 의미다.

태화가 데스크 여직원에게 물었다.

“저기 저 강의 무료 맞아요?”

“네. 맞아요. 아. 두 시부터니까 좀 있으면 시작하겠네요. 701호로 가세요. 오신 김에 한번 들어보세요. 저 교수님 강의 잘하시니까.”

공무원 학원에선 강사를 교수라고 지칭한다. 태화도 이 정도는 알고 있었다.

“네.”

태화는 무료 강의가 예정되어 있는 강의실로 향했다.

[태화 군. 정말 오늘 수강 신청할 생각인가?]

박도봉 감독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현재 분위기로 봐선 태화가 정말 수강 신청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뭐. 일타강사라고 하잖아요.]

[태화 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거 같네.]

[영감님. 그만하시죠.]

태화는 딱 잘라 말했다. 박도봉 감독도 더 이상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

채철환. 일타강사이자 공무원 한국사의 마스터.

채철환의 강의가 예정된 701호는 학생들로 미어터졌다. 이 강의는 한 개의 강의실로 모자라서 바로 옆인 702호 강의실까지 썼다. 하나의 강의실에는 강사가 직접 들어가서 강의를 하고 다른 강의실은 천장에 달아놓은 모니터로 중계하는 영상을 보는 방식이었다.

특히 강사가 직접 들어가는 강의실은 강의 시작 몇 시간 전부터 줄을 서야 출입을 할 수 있었다.

굳이 줄을 서서 강의를 들은 필요가 없었던 태화는 당연히 영상을 중계하는 702호 강의실로 갔다. 하지만 이곳도 자리를 맡는 것이 만만하지 않았다.

모니터가 잘 보이는 자리는 이미 누군가 차지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태화는 모니터가 있는 곳에서 다소 거리가 있는 곳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태화의 시력이 양쪽 1.5로 나쁘지 않다는 점이었다.

태화는 학교 다닐 때도 앞자리엔 잘 앉지 않았으니 크게 불편한 것도 없었다.

이것보다 태화를 짜증 나게 하는 건 자리보다 더위였다. 큰 강의실에 많은 사람이 앉아 있으니 에어컨을 켜도 더웠다.

‘다들 미쳤구나.’

태화는 이 강의실에 오면서 열 명 스무 명 데리고 수업을 하는 강의실도 보았다. 그런데 이런 스타강사는 몇백 명이 넘는 수강생을 놓고서 강의를 한다. 수십 배의 차이다.

태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드디어 일타강사 채철환이 강의실로 들어왔다. 채철환이 들어와서 마이크를 켜자 태화가 있는 강의실에도 스피커를 통해서 채철환의 목소리가 전달되었다.

“여러분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채철환은 바로 수업을 시작하지 않고 앞으로 수업을 어떻게 진행할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특히 채철환은 주교재와 부교재를 꼭 살 것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책 판매를 올리고자 노력하는 채철환의 입담에 빠져서 웃고 있었다.

태화도 채철환의 입담에 웃음이 나왔다.

‘대단하다. 정말. 저 인간은 남극에서 에어컨을 팔아도 팔 사람이다.’

화면을 응시하던 태화는 손으로 눈을 비볐다.

눈에 따가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박도봉 감독이 태화에게 다시 말을 붙였다.

[태화 군. 뭔가 이상하지 않나?]

[무슨 소립니까?]

[모니터 화면 말일세.]

[모니터 화면이요?]

[색감이 잘 맞지 않는 것 같네. 저래선 눈이 금방 피로해지고 가독성도 떨어지네.]

[그런가요? 어쩐지 눈이 좀 따갑더라니.]

#.

1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다. 태화는 701호 강의실로 들어갔다.

이 강의실은 강사가 실제 강의하는 곳이어서 카메라로 촬영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했다.

[영감님. 왜 제가 나서야 합니까?]

[그건 자네가 모니터 화면의 문제가 뭔지 알고 있기 때문이네.]

[제가 문제를 아는 게 아니라 영감님이 아는 거죠.]

[어쨌든 아는 건 아는 거 아닌가?]

[문제를 알았으니까 모른 척하지 마라?]

[그렇네. 자네는 모른 척하고 넘어갈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저랑 안 지 얼마나 됐다고 그렇게 자신하십니까?]

[인생을 나 정도 살면 사람 보는 눈도 생기게 마련일세.]

박도봉 감독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태화의 본 모습이 어떤지 알 수 있었다. 박도봉 감독 자신이 뺑소니 사고를 당했을 때 봤던 태화의 모습과 장례식장에서 봤던 태화의 모습.

태화는 선한 의지가 있으면서도 강단이 있었다.

[태화 군. 나는 확신하네. 자네는 문제를 알면서도 그냥 넘어갈 사람이 아니네. 게다가 문제가 해결되면 여기 많은 사람의 시력 건강에 도움을 주는 거 아닌가? 아주 공익적인 일을 하는 걸세.]

[영감님. 저에 대한 평가는 그만하고 문제나 해결하죠.]

태화는 시선을 돌려 카메라를 찾았다. 카메라는 강의실 뒤편에 배치가 되어있었다.

태화가 카메라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카메라를 촬영하는 사람은 태화 또래였다.

카메라를 촬영하던 남자는 킥킥거리며 카톡을 주고받고 있었다.

태화가 카메라맨에게 다가갔다.

“저기.”

카톡에 빠져서 태화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있었다. 태화가 답답한 마음에 손으로 살짝 상대방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제야 상대방이 반응했다.

“무슨 일이시죠?”

“옆 강의실에서 모니터로 수업 듣는 학생인데요. 모니터에 나오는 영상이 보기가 좀 불편해서.”

“네?”

카메라맨은 갑작스러운 태화의 요구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영상 색감이 좋지 않아서 오래 보고 있기가 좀 불편해요. 눈도 아프고요.”

색감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카메라맨은 어쩔 줄 몰라 했다.

“색감이요? 저기 잠시만요.”

카메라맨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여기 701호 강의실인데요. 모니터로 수강하는 학생이 색감이 안 좋아서 보기가 불편하다고 하네요. 네. 네.”

전화를 끊은 카메라맨이 태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직원이 온다고 하네요. 저는 알바라서 함부로 카메라를 조작하면 안 되거든요.”

“아. 네.”

잠시 후에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타났다. 직원으로 보이는 남자는 인상이 푸근했다. 뛰어왔는지 입에선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 색감이 안 좋은 것 같다고요?”

“네.”

직원이 모니터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태화를 쳐다보았다. 직원은 말은 안 했지만, 그 의미는 분명했다.

별문제가 없는 거 같은데 왜 시비냐.

“하하. 큰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요. 좀 민감하신 모양이시네요.”

직원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태화에게 말했다. 직원의 말을 들은 박도봉 감독은 혀를 찼다.

[쯧쯧. 저걸 괜찮다고 말할 정도면 영상에 대한 기초지식이 전혀 없는 건가.]

[이렇게 된 거 영감님이 해결책을 내놓으시죠.]

[지금은 아니네.]

[좀 더 기다려 보자는 말인가요?]

[그렇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의도를 알아챘다. 섣불리 나섰다가 직원의 반발심을 살 수 있었다.

내가 해결하려고 하는데 당신이 왜 나서지?

이런 반응이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직원은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계속 버벅대고 있었다.

직원이 살짝 태화를 쳐다봤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직원의 표정엔 원망의 감정이 살짝 실려 있었다.

[영감님. 직원이 해결 못 하는 상황인 거 맞죠?]

[그런 거 같네.]

태화는 다소 못마땅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직원 아닌가?

직원도 태화의 표정을 보고 나서 살짝 기분이 상했는지 다소 신경질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조금만 기다려 봐요.”

직원이 카메라를 이곳저곳 조작을 했지만, 결과는 더 좋지 않았다.

강의실에 있던 수강생들의 불만의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아니, 뭐해요!”

“화면이 더 이상해졌잖아요!”

불만이 터지자 당황한 듯 직원의 얼굴이 빨개졌다.

태화는 시계를 보았다. 쉬는 시간이 이제 몇 분 남지 않았다.

이미 직원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 불안감은 채철환 때문이었다.

채철환은 스타강사다. 그리고 스타강사들은 입맛이 까다롭다.

자칫 카메라 세팅이 늦어져서 강의가 지장을 받으면 스타 강사들은 진상을 부리는 경우가 많았다. 학원가에서 스타 강사는 을이 아니라 갑이다.

직원의 얼굴에 불안감을 넘어 초조함이 묻어나오기 시작했다.

‘아, 시발. 미치겠네.’

태화는 직원의 모습을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아마도 이걸 깔끔하게 해결하지 못하면 깨질 게 분명해 보였다.

[영감님. 직원이 좀 안돼 보이네요.]

[태화 군. 해결책은 아주 간단하네.]

[알려주시죠.]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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