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6화
태화의 질문에 박도봉이 대답했다.
[그렇네. 자식한테 폐 끼치고 싶은 부모는 없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고시원에서 사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따님분도 못사는 것 같지는 않던데.]
[그래 맞아. 선영이는 열심히 살아온 녀석이지. 현재 건실한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대표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고시원에서 지내는 게 나로선 최선이었네. 어차피 나에게 남아 있는 게 얼마 없었으니 말일세.]
[역시. 영감님은 이기적이시군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 이기심 때문에 삶의 마지막이 그렇게 끝났을지도 모르지.]
이 순간 박도봉 감독은 태화를 다시 보고 있었다.
‘태화 군은 어떤 점에서는 생각이 성숙하군. 어떨 때는 철부지 같기도 하더니. 역시 시련을 겪어봐서 그런 건가?’
박도봉 감독은 오늘 미처 말하지 못했던 걸 태화에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태화 군. 자네 어머니가 연기를 포기한 건 아무래도 나 때문인 거 같네.]
[영감님 때문이라고요?]
[자네 어머니의 연기를 보고 나서 내가 심한 말을 했었네.]
[무슨 말을 했길래…….]
[다시는 연기하지 말라고 했었네.]
[네?]
[연기 실력이 늘 가능성은 1%도 되지 않는다고 내가 말했었네. 더 이상 연기한다고 기웃거리지 말라고……. 내가 그렇게 말했었네.]
박도봉 감독의 말을 들은 태화는 피식 웃었다.
[태화 군. 왜 웃나?]
[영감님. 너무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거 아닙니까?]
[뭐?]
[남이 하지 말라고 해서 포기했다면 그건 엄마 책임 아닙니까? 그리고 지금 내가 연기를 못하는 거 보면 대충 짐작이 됩니다. 엄마의 연기가 어땠을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영감님은 속고만 사셨나 봐요?]
박도봉 감독은 태화의 말을 듣고서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사실 박도봉 감독은 태화가 자신을 탓한다고 해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인정이 빠르구먼.]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지금 남 탓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도 아니고.]
[태화 군. 내가 너무 집착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영감님이라는 호칭 좀 바꿔주면 안 되겠나?]
[그건 안 될 것 같은데요?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단어라서.]
[영감님이 노인네 지칭하는 거 말고 다른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네. 영감은 영화감독의 줄임말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냥 억지로 의미를 부여한 것 아닌가? 그래도 의미를 아니까 그리 기분이 나쁘지는 않구먼. 허허허.]
태화는 걸어가다 낯이 익은 한 명이 장례식장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바로 전미경이다.
“엄마?”
태화는 재빨리 전미경이 볼 수 없게 근처의 차 뒤로 몸을 숨겼다. 다행히 전미경은 태화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쳤다.
[태화 군. 자네 어머니. 날 원망하러 온 걸까?]
[글쎄요. 내가 엄마가 아니라서 모르겠는데요? 하지만 분명한 건 엄마가 이미 수십 년 지난 일 가지고 원망하거나 할 사람은 아니라는 겁니다.]
[…….]
[엄마는 제가 잘 알아요. 오래전이지만, 인연이 있었던 사람 조문하러 온 걸 겁니다.]
태화는 전미경이 장례식장 건물로 들어간 걸 확인하고 몸을 일으켰다.
태화가 병원 정문을 지나자 강지은에게서 톡으로 메시지가 왔다.
-오빠 오늘 나 퇴근하고 저녁때 F 카페에서 봐.
메시지를 확인한 태화는 마음이 씁쓸했다.
#.
태화는 저녁 7시에 F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태화는 먼저 도착한 강지은이 앉아 있는 곳으로 익숙하게 이동했다.
두 사람이 오면 항상 앉는 지정석 같은 자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빠. 여기.”
강지은이 웃으며 태화를 반겼다. 강지은은 단발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갖춘 얼굴이었다. 그래서인지 발랄한 분위기가 풍겼고 웃는 게 참 잘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언제 왔어?”
“나도 방금 왔어.”
강지은은 자신이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그사이 태화가 강지은의 맞은편에 앉았다.
“오빠도 주문해.”
“아니, 됐어.”
“근데 오빠. 어제 왜 전화 안 받았어?”
“그냥. 전화 받을 기분이 아니었어.”
강지은이 다소 실망스러운 듯 말했다.
“그럼. 오디션 안 된 거야?”
“그래. 이번에도 안 됐어.”
“저기, 태화 오빠.”
“왜?”
강지은은 태화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잡았다.
“나 많이 생각해 봤는데…….”
“왜?”
강지은은 운을 떼고 잠시 망설였다. 그러자 태화가 강지은을 재촉했다.
“지은아. 뭔데?”
“오빠 연기하는 거 인제 그만두면 안 돼?”
“뭐?”
“솔직히 오빠 오디션 보고 나면 우리 둘 다 힘들잖아. 오빠는 오빠대로 힘들고 나도 힘들고…….”
현재 태화가 놓인 현실을 고려하면 강지은의 말이 분명 맞았다. 하지만 태화의 감정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 그만두자.”
태화의 대답에 강지은이 살짝 미소를 띠었다.
“오빠 정말이야?”
강지은은 한시름 놓았다. 이 말을 꺼내기 위해서 그동안 얼마나 고민을 했던가. 하지만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면 반전도 있게 마련이다.
“응. 우리 그만 만나자.”
강지은은 태화의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당혹스러웠다. 그 당혹감은 강지은의 표정에 드러났다. 강지은의 표정은 미소를 띤 표정에서 순간 묘하게 일그러졌다.
“뭐? 그게 무슨…….”
“지은이 네 말처럼 우리 모두 힘들잖아. 이제 더 이해해 달라고 하지도 못하겠다.”
“오빠 농담이지?”
“넌 헤어지자는 것도 농담으로 하니?”
태화의 말에 화가 난 강지은이 순간 큰소리로 외쳤다.
“오빠!”
강지은이 외친 소리에 카페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태화와 강지은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쳐다보았다.
“사람들한테는 지은이 네가 날 찬 거로 해.”
“나쁜 새끼.”
강지은의 눈가는 어느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태화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나 나쁜 놈이야. 그러니까 매달리지 마. 지겨우니까.”
강지은은 자신이 마시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태화의 얼굴에 뿌렸다.
“너, 나 사랑은 했니?”
“그냥 미련 갖지 마라. 얼굴에 커피도 뿌렸는데 당당하게 걸어 나가야지.”
“저질! 개자식!”
강지은은 카페를 뛰쳐나갔다. 한순간 카페 안 사람들의 시선은 홀로 남은 태화에게 쏠렸다. 그리고 그 시선의 의미는 동일했다.
여자를 울려? 저거 나쁜 자식이네.
태화는 테이블에 놓인 냅킨으로 자신의 얼굴을 닦아냈다.
“서태화. 참 꼴이 말이 아니네.”
냅킨으로 얼굴을 닦았지만, 태화는 찝찝함을 느꼈다. 태화는 물로 얼굴을 씻어내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강지은과 이별을 고한 태화는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카페를 나섰다.
[자네 왜 그랬나?]
[왜요?]
[자네 여친 말일세. 자네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거 같았는데 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는가?]
[날 진심으로 대해서 그랬어요.]
[뭐? 진심으로 대해서 그랬다고?]
[아마 계속 만났다면 서로에게 좋지 않았을 거예요.]
[인제 보니 자네 나쁜 남자구먼.]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저처럼 선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나쁜 남자와 그냥 나쁜 놈의 차이가 뭔 줄 아는가?]
[뭔데요?]
[그냥 나쁜 놈은 여자를 이용하려고 하네. 여자가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을 이용해 자신의 잇속을 챙기네. 하지만 나쁜 남자는 겉으론 못되게 굴어도 속으로 여자를 위하는 마음이 있네. 자넨 그녀의 미래를 위해서 헤어지자고 한 거 아닌가?]
[그러니까 영감님 말은 내가 별 볼 일 없는 놈이라서 지은이에게 헤어지자고 말했다는 거 아닙니까?]
[그렇네.]
[근데 어떡하죠? 영감님이 잘못 짚었는데.]
[뭐라? 잘못 짚었다고?]
[네. 전 영감님이 말한 것처럼 나쁜 남자라서 오늘 그런 행동을 한 게 아니에요.]
[그럼 뭔가?]
[그냥 깨달았을 뿐이에요. 난 지은이를 사랑하지 않았어요.]
[사랑하지 않았다?]
[네. 지은이가 연기를 그만두면 어떻겠냐고 물어봤을 때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헤어지기 위한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동안 지은이를 만난 것도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싫지 않아서 만나왔던 거고.]
[내가 보기에 자넨 연애에 관해선 분명 선한 사람은 아닐세.]
[그 이야기는 인제 그만두죠. 부질없으니까.]
#.
모두가 잠든 밤.
박도봉 감독은 홀로 깨어 있었다.
‘시각과 청각은 태화 군과 공유하지만 잠을 자는 건 또 다른 문제인 건가?’
태화는 걱정과 달리 맥주 한 캔을 마시고 금방 잠이 든 상태였다.
‘태화 군은 정말 그녀를 사랑하지 않은 모양이군. 이렇게 잠을 잘 자는 걸 보니.’
박도봉 감독은 자신이 태화의 머릿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과정을 떠올렸다.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한 순간 칠흑 같은 어둠이 있는 곳에 있었다. 그리고 한 줄기 빛이 그 어둠을 뚫고 비추기 시작했다.
박도봉 감독은 본능적으로 그 빛을 따라갔다.
‘저 빛을 따라가면 저세상으로 가는 건가? 이제 아내와 아들을 만날 수 있는 건가?’
박도봉 감독이 그 빛에 다다랐을 즈음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게 너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니라.
박도봉 감독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목소리의 주인이 신이라는 걸 직감했다. 박도봉 감독은 생전에 신에게 애절하게 빌었었다.
딱 한 번만 자신에게 기회를 달라고.
그리고 마침내 신은 박도봉 감독이 뺑소니 사고를 당하는 전날 꿈에 답을 주었다.
-너에게 더 이상의 기회는 줄 수 없다.
-이유가 뭡니까?
-너에게 기회를 준다면 다른 사람의 기회를 빼앗아 오는 것이다. 그러니 안 된다.
-정말 너무 하십니다. 그럼. 저의 이 한은 어떻게 풉니까?
박도봉 감독의 한은 삼류 감독이라는 비아냥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한 인간의 배신 때문이었다.
그 인간의 배신으로 자기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신은 왜 나를 태화 군의 머릿속에 들어오게 했을까? 태화 군의 어머니인 전미경과 나와의 과거의 인연 때문인가? 그때 내가 전미경에게 상처를 주었고 그것에 대한 속죄?’
하지만 박도봉 감독은 이 이유 때문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아니다. 그건 아니야. 신은 내가 태화 군의 머릿속에 들어오게 된 게 마지막 기회라고 했다. 그렇단 말은 나의 한을 풀어줄 사람이 태화 군이기 때문이다.’
순간 박도봉 감독은 태화를 생각하자 답답했다. 태화는 영화감독이 되려는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아, 답답하다. 영화감독을 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왜 하필 태화 군인가?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정말. 미치겠군.’
#.
며칠 후.
태화는 당산역에서 9호선으로 전철을 갈아탔다. 노량진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결국, 태화는 노량진 학원가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의 압박이 생각 외로 강했기 때문이다.
태화도 그냥 순순히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자신을 항변했지만, 힘을 받지 못했다.
구체적인 성과가 하나도 없는 이상 부모님을 설득하기는 힘들었다.
여태껏 부모님은 꽤 긴 시간 동안 태화를 기다려 주었다. 그래서 태화는 부모님을 너무 야박하다고만 생각할 수도 없었다.
자식이 안정된 삶을 살기 바라는 건 모든 부모의 마음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