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5화
태화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근데 무당님.”
“…….”
“소문만큼 영험한 건 아니네요.”
태화의 발언에 무당의 얼굴이 화 때문에 뻘겋게 달아올랐다.
“뭐야! 말 다 했어!”
“네. 말 다 해서 가는 겁니다.”
무당이 화를 내자 최 군이 태화에게 다가왔다.
“최 군 아저씨. 스톱!”
“…….”
“지금 가겠다는 사람한테 시비를 걸겠다는 겁니까?”
태화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지금 상황 다 녹음되고 있습니다.”
태화는 무당을 만나기 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스마트폰 녹음 기능을 켜놓았었다.
“자신 있으면 건드려 보시든가? 근데 폰만 어떻게 한다고 되는 거 아닙니다. 이거 클라우드에 저장되는 거거든요.”
“클라우드?”
“쉽게 말해서 내 폰에 저장된 거 지워도 소용없다는 겁니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냥 계세요. 그게 나으니까.”
최 군이 당황한 표정으로 무당을 쳐다보았다. 무당은 인상을 찡그렸다.
“최 군아. 그냥 보내줘.”
#.
태화와 태화의 머릿속에 기거하는(?) 박도봉 감독은 길거리를 걷고 있었다.
[태화 군. 지금 어디를 가는 건가?]
[세양 병원이요.]
[세양 병원이라면?]
[네. 영감님 장례식장에 갑니다.]
태화는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박도봉 감독은 태화가 여간 고마운 게 아니었다.
[고맙구먼.]
[영감님. 그렇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요.]
[무슨 소린가?]
[저도 영감님 말 듣고서 궁금해졌습니다. 영감님이 자신의 장례식장에 가면 어떤 생각이 들지.]
태화의 대답을 들은 박도봉 감독은 내심 흐뭇했다. 태화의 성격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말은 저렇게 해도 따뜻한 젊은이군.’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장례식장에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썰렁함을 느꼈다. 조문하러 온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영감님. 도대체 인생을 어떻게 살아오신 겁니까?]
[허허. 내가 그렇게 인생을 잘못 산 거 같지는 않은데…….]
박도봉 감독은 씁쓸함을 느꼈다. 만약 자신이 죽기 직전까지 영향력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로 장례식장은 꽉 찼을 것이다.
[막상 자신의 장례식장에 오니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인생무상이라더니. 그 말이 맞는 거 같네.]
태화는 상주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한 중년 여인이 상주로 홀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는데 그녀는 꽤 기품이 있어 보였다.
그 여성은 슬픔을 참아내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태화는 마음이 짠해졌다.
[따님이세요?]
[딸 같은 아이네.]
[딸 같은 아이라뇨? 그럼 친딸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그래. 저 녀석의 이름은 이선영이네. 내 오랜 친구의 딸이야. 부모를 일찍 여의어서 내가 수양딸로 삼았네. 오랜만에 선영이 얼굴 보니 반갑구먼.]
[그럼. 사모님하고 자제분은?]
[아내하고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교통사고로 죽었네.]
[죄송합니다. 몰랐습니다.]
[괜찮네. 모르고 한 말인데.]
태화는 신발을 벗고서 차분하게 조문을 하러 영정 앞에 섰다. 영정 사진은 사고로 타계할 때의 모습보다 훨씬 젊은 시절의 모습이었다.
멋스럽게 빵모자를 쓰고서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참 영화계에서 전성기를 보낼 때의 모습 같았다.
태화는 절을 마치고 나서 상주인 이선영에게 다가가 말없이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이선영이 태화에게 울먹이며 말했다.
이선영은 40대 중반의 나이였지만 나이보다 젊어 보였고 수수한 얼굴이 매력이었다.
“와주셔서 고마워요.”
“아. 네.”
“근데. 아빠와는 어떻게 아세요?”
“그러니까…….”
이선영의 이 질문은 태화에겐 대답하기 꽤 난감한 질문이었다.
“전 영화학도입니다.”
“네?”
“영화학도로서 박도봉 감독님을 존경했습니다. 뉴스에서 비보를 보고 왔습니다. 전 존경의 의미로 온 겁니다.”
이선영은 태화의 대답을 듣고 더는 묻지 않았다. 오히려 이선영은 태화의 두 손을 꼭 잡았다.
태화가 박도봉 감독의 장례식에 조문하러 와준 게 더 고마웠다.
“그랬었네요. 고마워요.”
“네. 힘내세요.”
태화는 상주에게 인사도 건넸으니 떠나야 했다. 하지만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뭔가 마음속에 찜찜한 게 남았기 때문이다.
[영감님. 아무래도 말해야겠습니다.]
[무슨 말 말인가?]
[사고 당시의 상황이요.]
[그건 말하지 말게. 부탁이네.]
[혹시 이선영, 저분이 가슴 아파할 거 같아서 그럽니까?]
[그래. 마음이 너무 아플 거야. 부모로서의 그 심정을 이해해 주게.]
[영감님 참 이기적이십니다.]
[이기적이라고?]
[네. 부모의 심정만 있고 자식의 심정은 없습니까? 자식으로서 최소한 부모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전 말해야겠습니다.]
[이보게. 태화 군! 태화 군!]
박도봉 감독이 태화를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태화가 결심한 이상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상주님.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네?”
“사실, 제가 박도봉 감독님. 마지막 모습을 본 사람입니다.”
“네?”
“제가 박도봉 감독님이 당하셨던 뺑소니 사건의 목격자입니다.”
태화의 말을 들은 이선영은 다시 태화의 손을 꼭 잡았다.
“얘기해 주세요. 아빠의 모습.”
태화는 자신이 목격했던 뺑소니 사고에 관해서 설명해 나갔다. 이선영은 태화의 설명을 듣는 내내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집중하고 있었다.
“고인께선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그래도 마지막엔 표정이 편안해 보였습니다.”
“그래도 마지막엔 편안하셨다니……. 다행이네요.”
“고인께선 좋은 곳으로 가셨을 겁니다.”
태화가 한마디를 건네자 이선영은 참았던 오열을 터뜨렸다.
“아이고. 어떻게! 이렇게 외롭게 가시나! 아이고…….”
태화는 오열하는 이선영을 두 손으로 가볍게 안아주었다. 이선영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
몸을 타고서 전해지는 진한 슬픔 때문에 태화도 눈물이 핑 돌았다.
#.
태화는 조문을 마치고 신발을 신었다. 태화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한 중년 남자가 조문하러 다가오고 있었다.
[태화 군. 잠깐만.]
[왜요?]
[저 남자. 아는 사람이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말에 중년 남자에게 자연스레 시선이 멈춰졌다. 중년 남자는 비통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분위기로 보아 어디서 술 한잔하고 온 것 같았다.
[영감님. 누굽니까?]
[석무열. 내 제자였던 녀석이다.]
[근데 무슨 인상이.]
태화의 말처럼 석무열의 키는 170㎝ 중반으로 그리 크지 않았지만, 운동해서인지 상체가 꽤 발달해 있었고 인상은 날카로웠다.
특히 머리를 아주 짧게 유지하고 있었는데 언뜻 보면 싸움꾼 같기도 했다.
[참나. 오늘 무슨 날인가 보네요. 연속으로 저런 인상의 사람을 보다니.]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네. 인상만으로 상대가 몇 수 접어줄 인상이긴 하지. 하지만 생긴 건 저래도 순수한 녀석이야.]
[그 말을 믿으라고요? 그냥 길거리에서 만나면 딱 조폭인데요.]
태화가 자신을 계속 바라보자 석무열도 태화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절 봅니까? 나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요?”
“아뇨. 그냥 분위기가 남다르신 것 같아서. 그냥 시선이 간 겁니다. 다른 의도는 없어요.”
석무열이 태화에게 다가왔다. 그러자 석무열에게서 술 냄새가 확 풍겼다.
“여긴 어떻게 알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볼일 다 봤으면 그냥 가요.”
석무열은 태화가 단지 호기심으로 장례식장에 온 사람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간단했다.
석무열은 박도봉 감독과 태화 같은 20대 청년이 어떤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석무열은 태화가 그냥 우연히 뉴스를 보고 호기심에 온 것으로 판단했다. 그래서 방금 태화에게 말이 세게 나간 거였다.
하지만 이건 태화와 박도봉 감독의 상황을 모르는 석무열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태화는 순간 석무열의 말과 태도에 반감이 들었다.
[영감님. 이 사람. 자기가 뭔데 사람보고 가라 마라 하는 겁니까?]
[태화 군. 참게. 부탁이네.]
[참. 오늘 왜 이렇게 참을 일이 많은지 모르겠네요.]
[미안하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부탁도 있고 장소도 장소이니만큼 참고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상황은 묘하게 흘러갔다. 태화가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석무열의 도발이 이어졌다.
“거기. 박 감독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온 건가?”
태화는 여기서 폭발했다. 어쨌든 태화 자신은 장례식에 조문을 온 사람이었다.
“여기 무슨 전세 내셨습니까?”
“뭐?”
“내가 가고 싶으면 갑니다. 그쪽이 가라고 해서 가는 게 아니고.”
“그쪽?”
“그리고 조문은 돌아가신 분을 잘 몰라도 올 수 있는 겁니다.”
“이 자식이.”
밖이 소란스러워 보이자 상주인 이선영이 태화와 석무열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무열 오빠!”
“선영아.”
“조문하러 온 사람한테 왜 그래?”
“아니. 그게…….”
분위기는 이선영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석무열은 이선영에게 꼼짝 못 하고 있었다.
이선영은 석무열을 상주가 쉬는 작은 방으로 데리고 갔다.
[허허허.]
[영감님. 지금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옵니까? 자신의 장례식장에서 웃는 사람은 영감님이 처음일 겁니다.]
[여전하네. 그래서 웃었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선영이가 무열이 킬러였었네.]
[두 분이 좋아하던 사이였습니까?]
[아니. 선영이나 무열이 모두 부모님을 일찍 여의었네. 그래서 두 사람은 친남매처럼 지냈었지. 무열이는 여동생한테 꼼짝 못 하는 오빠였네.]
태화와 박도봉 감독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이선영이 재빨리 태화에게 다가와 사과했다.
“미안해요. 무열 오빠가 나쁜 사람은 아닌데 술이 좀 과했나 봐요.”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
태화는 이선영과 인사를 나눈 후 박도봉 감독의 장례식장을 나섰다.
[그나저나 태화 군.]
[왜요?]
[자넨 어디서 그런 깡이 나오는가? 무열이와 대면하면 기가 죽는 게 대부분인데 말이야. 솔직히 무열이가 인상으로 먹고 들어가지 않나?]
[좋은 게 좋은 건 아니니까요.]
[자네는 갈수록 마음에 드는군.]
태화는 순간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 소리 마세요. 끔찍합니다.]
[끔찍?]
[내가 그렇게 마음에 들면 내 머릿속에서 안 나갈 게 뻔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자네가 마음에 드는 건 사실일세. 나와 자넨 의외로 잘 맞는 구석이 있는 거 같네.]
[앞으로는 마음에 안 드는 일만 해야겠군요.]
[하지만 신중해야 할 걸세. 자네는 마음에 안 드는 거라고 하는 게 나한테 아주 좋아 보일 수도 있으니 말일세.]
[영감님. 저에 대한 집착을 버리세요! 제발!]
[허허허. 자네가 그럴수록 난 자네가 좋아지는구먼. 이러다 나와 자네가 브로맨스를 이루는 거 아닌지 모르겠구먼.]
[브로맨스라뇨?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
조문을 마친 태화는 장례식장 건물을 빠져나왔다.
[영감님. 왜 따님하고 지내지 않으셨어요? 따님은 같이 지내고 싶어 했던 거 같던데요. 혹시 부모의 심정 같은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