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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4화 (4/195)

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4화

태화가 박도봉 감독에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혹시 자네 어머니 연기하지 않았나?]

태화는 슬쩍 반대편에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전미경을 쳐다보았다.

“왜, 엄마한테 할 말 있니?”

“아니, 콩나물국 맛있다고.”

“그래. 많이 먹어. 우리 아들 빨리 속 풀어야지. 어제 과음했는데.”

전미경은 말을 하고 나서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태화는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네. 속 풀어야죠.”

전미경은 항상 뭔가 할 말이 있을 때 지금처럼 상냥하게 말하곤 했다. 하지만 태화의 당장 관심사는 박도봉 감독이 어떻게 자신의 엄마 전미경에 관해서 알고 있느냐였다.

[영감님. 엄마에 대해서 어떻게 알았어요?]

[자네 어머니. 연기한 거 맞지?]

[한 건 아니고 하려고 했다고.]

[그럼. 내 기억이 맞다는 얘긴데.]

[기억이요?]

[내 기억대로라면 말일세. 자네 어머니가 내가 준비했던 작품에 오디션을 봤던 거 같아. 그때 이름 세련이었던가?]

박도봉 감독의 말이 끝나자 태화는 깜짝 놀랐다.

“헉!”

태화의 모습을 본 전미경이 물컵을 건넸다.

“태화야. 물 마시면서 먹어.”

“하하. 나도 모르게 급하게 먹다가 그랬네. 고마워요. 엄마.”

태화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박도봉 감독에게 말을 걸었다.

[그 이름 어떻게 알아요? 그 이름 엄마가 예전에 썼던 예명인데.]

태화가 세련이라는 예명을 기억하는 건 태화의 아버지인 서준상이 가끔 전미경을 ‘세련아’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역시. 내 기억이 맞았어.]

[근데 그걸 어떻게 기억해요?]

[눈에 띄는 외모에 세련이라는 예명이 확실히 기억에 남아 있거든. 그런데 하려고 했다는 건 뭔가?]

[아빠 만나서 그냥 결혼하셨다고, 일보다는 사랑을 택했다고 하셨어요.]

[그건 아닌 거 같은데.]

[그럼. 다른 이유가 있다는 말인가요?]

[내가 자네의 어머니를 기억하는 건 외모하고 예명 때문만은 아니야. 자네 어머니의 연기 때문이었네.]

[연기요?]

태화는 점점 흥미가 돋기 시작했다.

[그래. 태화 군. 자네 어머니의 연기는 희대의 발연기였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의 말을 듣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태화의 표정을 본 전미경이 궁금한 듯 물었다.

“너 무슨 좋은 일 있어?”

“아뇨, 없어요.”

“근데, 왜 웃어?”

태화는 전미경의 물음에 마땅히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오디션도 떨어졌는데 좋은 일이 뭐가 있겠는가?’

태화는 대답 대신 전미경에게 방금 생긴 궁금증을 물어봤다.

“엄마.”

“왜?”

“혹시 박도봉 감독이라고 알아요?”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아?”

태화는 전미경의 대답을 듣고 나서 박도봉 감독의 말에 신뢰가 생겼다.

‘그냥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했다면 모르겠지만 그 이름을 어떻게 아냐고 말했다는 건 박도봉 감독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전미경이 재차 태화에게 물었다.

“그 이름을 어떻게 아냐고?”

“저기 TV 뉴스에서 나오길래.”

“TV 뉴스?”

태화의 말에 전미경은 TV로 고개를 돌렸다. TV에는 박도봉 감독 사고 소식이 단신으로 나가고 있었다.

헤드라인-한국 영화계의 노 감독. 새벽에 서울 길거리에서 뺑소니차에 치여 타계.

헤드라인에 이어서 기자의 보도가 이어졌다.

“영화계의 원로 감독인 박도봉 감독이 오늘 새벽 뺑소니차에 치여 타계했습니다. 박 도봉 감독은 영화계의 대표적인 원로 감독으로 7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영화에서 활약했던 감독입니다……. 박도봉 감독의 빈소는 세양 병원에 차려질 예정입니다…….”

태화는 전미경이 TV 뉴스를 보는 사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둘러 자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잘 먹었습니다.”

전미경은 태화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그 의도를 알아채고 있었다. 전미경이 태화를 붙잡아 다시 자리에 앉혔다.

“태화야. 잠깐 앉아봐.”

“왜요?”

“아침에 아빠랑 이야기했다. 너 취직 준비해.”

태화는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조용히 넘어간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갑자기 왜요?”

“갑자기는 뭐가 갑자기! 너 이번에도 안 된 거 맞지?”

태화 순간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태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고. 내가 미쳐.”

“엄마. 그렇다고 아직 포기하기에는 일러요. 열심히 준비하면…….”

“준비? 너도 이제 나이가 좀 있으면 서른이야, 서른! 정신 차려 이것아!”

“…….”

“이번에 너도 마지막이라고 했잖아.”

“지방대 출신인 내가 어디 갈 데가…….”

태화는 이런 식으로라도 항변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전미경도 만만치 않았다.

“공무원 준비해. 한 2, 3년 바짝 하면 된다더라. 이번에 어머니 아는 사람 아들도 이번에 9급 붙었다더라.”

“…….”

“걔도 지방대 출신이야.”

“엄마!”

“공무원 시험은 시험만 잘 보면 되잖아. 지방대 나와도 상관없고…….”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나 공부할 머리는 아냐!”

태화는 자신을 애써 폄훼했다. 최악의 발악이라면 발악이었다.

하지만 전미경은 태화의 이런 전략에 말려들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

“근거는요?”

“태화 너, 잔머리 잘 굴리잖아.”

태화는 어이가 없었다.

“엄마, 너무 생각이 참신한 거 아닙니까?”

“너랑 말장난할 시간 없어!”

“…….”

“태화야. 네 맘도 알지만,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어야지.”

태화는 직감했다. 이번만큼은 적당히 넘어갈 수 없음을.

#.

마포구의 한 무당집.

태화는 영험하다는 무당집 앞에 서 있었다. 태화가 이곳에 온 이유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박도봉 감독을 내보내기 위해서였다.

태화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박도봉 감독이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게 영 께름칙했다. 무엇보다 태화는 현 상황이 자신한테 도움이 될 게 하나도 없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박도봉 감독이 태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건 불편함만 초래할 뿐이었다.

[태화 군. 소용없다니까.]

[소용이 있는지 없는지는 대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럼. 해보게. 대신 우리 내기 하나 할까?]

[내기요?]

[그렇네. 어떤가? 할 생각이 있는가?]

[아뇨. 내가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러지 말고 내용이나 듣고서 결정하게.]

태화는 박도봉 감독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굳이 내기의 내용을 듣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 말해보세요.]

[자네가 지면 내 장례식장에 한 번 가줬으면 하네.]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그냥 궁금해졌네. 내 장례식장을 내가 지켜본다면 어떨까?]

[영감님 심정은 알겠어요. 근데 좀 화가 나는군요.]

[화가 난다? 뭐 땜에 화가 났는가?]

[도대체 저를 뭐로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

[내기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영감님 장례식장엔 가려고 했어요.]

[이거 고맙구먼. 내가 사과하겠네. 그럼 내기는 없던 거로 하겠네.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어떤 이유가 있는 건가?]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제가 영감님 마지막 모습을 지켜봤잖아요.]

[그게 다인가?]

[뭐 다른 이유가 필요합니까?]

박도봉 감독은 태화가 참 순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닐세. 다른 이유는 필요 없네.]

태화는 박도봉 감독과 대화를 마치고 무당집 안으로 들어갔다.

태화가 무당이 있는 곳으로 가자, 영험해 보이는 무당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무당은 중년의 여성으로 제법 날카로운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무당이 태화를 보자마자 한마디 던졌다.

“허허. 이거 머릿속에 이상한 게 들어와 있구먼.”

태화는 무당의 말에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척 보면 딱 아닌가?”

“그럼. 어떻게 내보낼 수 있겠습니까?”

무당은 잠시 눈을 감고 신들린 듯 머리를 흔들었다. 곧이어 무당은 힘이 들었는지 한동안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으으…….”

태화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당의 모습을 본 상황이었다. 그래서 태화는 긴장된 표정으로 무당을 바라보았다.

무당의 얼굴에 비 오듯 땀이 맺혔다. 한동안 앓던 소리를 내던 무당의 눈이 번쩍 떠졌다.

“못 내보내!”

태화가 깜짝 놀라서 반문했다.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 존재는 내 능력을 벗어났어.”

“아니. 여기가 영험하다고 해서 왔는데…….”

“아무리 내가 영험해도 나보다 강한 존재를 어찌해 볼 수는 없어!”

“그럼. 어떡해야 합니까?”

“그냥 스스로 나가도록 할 수밖에 없어!”

“네?”

무당의 대답은 태화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박도봉 감독이 스스로 나갈 리 만무했다.

“스스로 안 나가면요?”

“그건 나도 몰라.”

무당의 대답에 태화는 어이가 없었다.

“근데 정말 영험한 거 맞습니까?”

태화의 말에 순간 무당의 표정이 매서워졌다.

“지금 날 의심하는 건가?”

“아니. 그렇잖아요. 제대로 된 해결책도 없고.”

“당장 나가!”

“아니. 지금 해결책을 내놓지도 못하고 오히려 저한테 화를 내십니까? 화를 내야 하는 건 저 아닙니까? 혹시 용한 게 아니라 사기 아닙니까?”

“뭐? 사기? 감히 날 의심해!”

무당이 역정을 내자 문밖에서 한 남자가 무당이 있는 곳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남자는 건장한 체격의 소유자로 무당의 보디가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가끔 손님 중에 무당이 내린 점괘를 의심하고 행패를 부리는 사람 때문이었다.

태화는 그 남자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무슨 인상이…….’

그 남자는 키도 태화보다 한 뼘 정도 더 컸고 몸무게도 100㎏은 족히 나가 보였다. 이 정도라면 그냥 덩치가 큰 사람일 뿐이다.

태화가 놀란 건 그 남자의 얼굴에 난 상처였다. 오른쪽 뺨에 칼에 그어진 듯한 상처가 있었는데 사극에 나오는 칼만 하나 쥐여 준다면 영락없이 산적이었다.

무당이 그 건장한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무당은 남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성만 불렀다.

“최 군아. 저놈 당장 내보내!”

“네.”

최 군의 대답은 짧고 명료했다. 무당의 명을 받은 최 군은 곧바로 태화에게 다가왔다.

역시 최 군은 자신의 직책에 맡게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타입처럼 보였다.

그동안 아무 말 없이 지켜만 보던 박도봉 감독이 태화에게 말을 걸었다.

[태화 군. 이거 빨리 이곳에서 나가는 게 낫겠네.]

[그럴 생각입니다. 저 산적 같은 인상의 최 군이라는 남자와 시비가 붙어봤자 저한테 득 될 게 없잖아요.]

[잘 생각했네. 난 또 자네가 다른 생각이라도 하는 줄 알았네.]

[아무리 현 상황이 엿 같아도 여기서 멍청한 짓을 할 만큼 바보는 아닙니다.]

[현명한 판단일세.]

태화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됐어요. 제 발로 나갈 겁니다.”

태화가 순순히 돌아가려 하자 무당의 입가에 실소가 감돌았다.

네놈이 그러면 그렇지.

무당의 표정을 본 태화는 왠지 모를 짜증이 밀려왔다. 태화는 이대로 그냥 가기가 싫었다.

그냥 뭐라도 한마디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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