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영감님과 함께 3화
태화는 누군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이 소리에 태화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본다고 한들 뭐가 나오겠는가?
“뭐야…… 술이 덜 깬 건 아닌데?”
분명 태화가 일어났을 때 머리가 아프지는 않았다. 단지 속만 좀 쓰렸을 뿐이었다.
[벌써 날 잊은 건가?]
다시 목소리가 들려오자 태화는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한 번이면 착각일 수 있지만 두 번이라면 그건 착각이 아니다.
보통 섬뜩한 순간이 다가오면 사람들은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그 반대로 몸이 가위에 눌린 것처럼 순간적으로 얼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태화는 지금 후자의 경우에 속했다.
“어, 어…….”
태화의 입에선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고 몸은 얼음처럼 굳어서 소변을 누는 자세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설마 화장실 귀신? 그런 건가? 혹시 내 뒤에……?’
태화는 이 순간 공포 영화에서 나오는 한 장면이 생각났다. 등장인물이 고개를 돌리면 바로 기괴한 모습의 귀신과 눈이 마주치는 바로 그런 장면.
태화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이씨. 어제, 오늘 대체 왜 이러냐? 뺑소니 사고 목격의 충격도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혹시 귀신인가?’
태화는 순간 지난날을 돌이켜 보았다.
‘침착하자. 혹시 내게 원한 살 만한 사람이 있나?’
태화는 짧은 순간 자신의 기억을 소환했다. 하지만 태화는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자신이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만한 짓을 하지 않았다.
태화 자신은 학창 시절에 누구를 집요하게 괴롭히거나 그런 짓은 하지 않았다.
태화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원한 살 일이 없다는 판단이 들자 일단 안도의 한숨부터 내 쉬었다.
‘다행이다. 내게 원한을 산 사람이 없어서…….’
태화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하지만 태화는 이내 현타가 찾아왔다.
‘근데,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내게 원한을 품은 사람이 없다는 게 그렇게 좋아할 일이야? 입가에 미소가 지어질 만큼? 이게 말이 돼? 난 어제 오디션도 떨어져서 미칠 지경인데?’
게다가 태화는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을 보자 기가 막혔다. 자신은 소변보러 왔다가 변기 앞에 선 채로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여기서 이럴 순 없어.’
태화는 순간 질끈 감았던 두 눈을 떴다. 우선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필요가 있었다.
그때였다.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말 좀 해보게. 나만 말하니 좀 재미가 없네.]
태화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짜증이 확 치밀어올랐다.
‘뭐? 사람 놀라게 해놓고서 심심하다고? 귀신이 되면 예의는 걷어차는 건가?’
태화는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아직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시 그 목소리가 들렸다.
[이런 말 하기 좀 뭐한데 말일세. 혹시 쫀 건가?]
그 목소리를 들은 태화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뭐. 쫄았냐고? 정말 듣자 듣자 하니까.’
태화는 이제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태화가 용기를 내 입을 뗐다.
“다, 다, 당신, 누, 누구야?”
태화는 발언하고 나서 자신이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는 떨렸고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이판사판에 용기를 낸 거치곤 결과가 좀 초라했다.
[자네가 내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 했네. 사과하겠네.]
‘나한테 사과한다고? 그럼, 나한테 악의가 없다는 건가? 기왕 이렇게 된 거 대화라도 해보자.’
태화는 다시 용기를 내어 입을 뗐다.
“당신은 누구지? 나를 아는 것 같은데.”
목소리가 태화의 물음에 바로 반응했다.
[조금 얘기가 길어질 것 같네. 얘기하기 전에 바지를 좀 추스르는 게 좋은 것 같은데. 자금 자세는 대화하기에 좋은 자세는 아니군.]
태화는 목소리의 말을 듣자마자 자신의 현 자세를 보았다. 이미 소변을 다 보았지만, 여전히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순간 민망함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아이. 진짜.”
태화는 재빨리 옷을 추슬렀다.
#.
태화는 변기의 뚜껑을 닫고 그 위에 앉았다.
“이제 당신의 정체를 밝혀야 할 것 같은데?”
태화의 질문에 목소리가 대답했다.
[좋네. 그 질문에 바로 대답하겠네. 나는 박도봉이네.]
목소리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자 태화는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박도봉 그분은 분명히 돌아가셨는데…….”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네. 분명히 나는 숨이 끊어졌어.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
태화가 판단하기에 말투와 목소리의 나이는 분명 나이 든 사람의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그럼. 증명해 봐.”
태화는 계속해서 높임을 쓰지 않는 말투를 고수했다. 태화로선 딱히 상대에게 높임말을 쓸 이유가 없었다.
[증명?]
“그래. 나하고 박도봉.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 수작은 안 통해.”
태화가 수작이라는 말까지 쓴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목소리까지 나이 든 사람처럼 하지 말란 법 없잖아.’
박도봉이라고 자칭하는 목소리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이제부터 자네 이름을 부르겠네.]
“좋을 대로.”
[좋아. 태화 군. 나는 오늘 새벽에 망원역 근처에서 뺑소니를 당했네. 그걸 자네가 목격했고.]
태화는 살짝 놀라면서 사고 당시를 기억해 냈다. 그곳에는 자신 외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었다.
“그 정도로는 부족해.”
[성격이 급하군. 아직 내 말이 끝난 건 아니네.]
“그럼. 더 해보시든가.”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네. 자네는 술을 많이 마신 것 같더군. 아마도 오디션에 떨어져서 그런 걸 거고.]
태화에게 오디션 탈락은 개인적인 문제고 아직 아무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태화는 순간 발끈했다.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허허. 자기 입으로 말해 놓고, 오리발인가?]
목소리의 말처럼 태화는 당시 이렇게 말했었다.
-젠장. 오늘 무슨 날이야! 오디션도 떨어졌는데!
이 사실은 분명 태화와 박도봉,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태화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자네 아직 믿지 못하는군. 좋아. 그럼 더 확실한 믿음을 주어야겠군. 난 자네에게 젊은 시절 배우를 지망했다가 인물이 딸려서 못했다고 이야기했었지. 그리고 자네는 도로에 떨어져 있던 빵모자를 주워서 내 머리에 씌워주었지. 기억나는가? 그때 난 자네가 참 따뜻한 청년이라고 생각했다네.]
“기억나. 하지만 아직 당신을 믿는 건 아냐.”
[아직도 더 필요한가?]
“그래. 당신은 아직 한 가지를 말하지 않았어.”
태화의 요구에 목소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다소 망설이는 듯했다.
그럴 만도 한 게 태화의 이 요구는 상당히 아픈 부분이 있기 때문이었다.
[할 수 없군. 난 싸구려 삼류 감독이라고 자네한테 말했었네.]
“헉!”
이 정도 되면 태화로서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박도봉. 그분이 맞는군요.”
[태화 군. 그렇네. 믿지 못하겠지만 난 박도봉일세.]
“근데. 지금 어디 계시는 거죠? 모습을 보이시죠.”
[자네는 내가 무슨 귀신인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군.]
“그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저승으로 못 가고 이승을 떠도는 그런 거 아닙니까?”
[자네의 기대대로 난 귀신이 아닐세. 그래서 자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어.]
“그럼 어디에 계신 겁니까?”
[자네의 머릿속.]
“뭐요?”
태화는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젠장.”
[사실일세. 난 자네의 머릿속에 있어.]
“그럼. 내 생각도 읽는 겁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아. 시각하고 청각은 공유하는 듯하네. 촉각이나 후각 미각은 잘 모르겠네.]
“그럼 일단 다행이군요.”
[다행이라?]
“네. 방금 영감님. 욕하고 있었거든요.”
태화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태화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알게 된 온갖 욕을 박도봉에게 퍼붓는 중이었다.
[뭐? 영감님? 욕?]
“그럼. 칭찬이라도 들을 줄 알았습니까? 남의 머릿속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선.”
[그래도. 영감이라는 호칭보다는 더 나은 게 있지 않은가?]
“감독님이라는 호칭?”
[그래. 바로 그거네. 태화 군. 그래도 내가 명색이 감독 아닌가. 허허허.]
“제 머릿속에서 나가시면 감독님이라고 불러드릴게요.”
[그건 좀 난감하군.]
“난감하다고요?”
[그렇네. 사실 나도 나갈 방법을 모르네.]
“후우.”
태화는 이 순간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정말 염치도 없으시네. 남의 머릿속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 나갈 방법이 없다고?’
태화는 불현듯 자신의 두 손을 모았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태화는 주기도문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태화의 종교가 기독교여서 주기도문을 외운 게 아니다.
전에 오디션에 지원했던 배역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 외웠던 기억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태화 군. 그래 봐야 소용없네. 앞서 말했지만 난 귀신 같은 게 아닐세.]
“젠장.”
태화는 현실적인 판단을 하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지만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일은 현실이다. 오늘 새벽에 일어났던 일을 당사자가 아니라면 절대 알 수가 없다.’
당장 나갈 방법이 없다면, 일단 박도봉 감독과 머릿속 동거를 할 수밖에 없다.
그랬을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점.
지금처럼 박도봉 감독과 대화를 한다면 사람들은 태화를 미친놈 취급할 게 뻔했다. 자신은 계속해서 혼자 중얼대면서 있을 테니까. 그런다면 당연히 미친놈 소리나 들을 게 뻔했다.
그렇다고 박도봉 감독이 분위기 봐 가면서 말을 안 걸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정말 박도봉 감독이 작정하고 계속 말을 붙인다면?
태화는 그 상황을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결국은 입을 열지 않고 대화를 해야 한다는 말인데……. 혹시 머릿속으로 대화가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태화는 입을 열지 않은 채 박도봉 감독을 불렀다.
[영감님. 제 말 들리세요?]
의외로 박도봉 감독의 반응은 빨랐다.
[오. 들리네. 방금 입을 떼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한 건가?]
[그냥 영감님하고 대화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태화 군. 연기만 못했지 나름 똑똑하군. 상황 파악도 빠르고. 허허.]
[그게 칭찬입니까, 욕입니까?]
[아. 미안하군. 내 의도는 칭찬일세. 앞으로 잘 지내보세.]
[잘 지내다뇨? 빨리 내 머릿속에서 나갈 생각을 하셔야죠!]
[…….]
[제발 말 좀 안 시키고 조용히 계셨으면 좋겠군요. 당연히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지만.]
[허허. 나도 최대한 잘 지내도록 노력하겠네.]
#.
태화는 화장실을 나와서 식탁으로 이동했다. 식탁에는 전미경이 식사 준비를 해놓은 상태였다.
“태화야. 무슨 화장실을 그렇게 오래 있어?”
태화는 전미경의 말에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적당히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그러게. 좀 걸렸네.”
“혹시 너 변비 있니?”
“아냐. 그런 거. 그냥 양이 좀 많았어.”
태화는 자신의 대답이 식사를 앞둔 시점에서 적절하지 않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 태화가 전미경의 눈치를 살폈다.
이내 전미경이 불같이 화를 내며 태화를 타박할 게 뻔했다.
-태화, 너 음식 앞에 놓고 그렇게 말해도 돼? 버릇없이.
하지만 태화의 예상과는 달리 전미경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전미경은 태화를 타박하기는커녕 태화에게 숟가락을 건네며 말했다.
“태화야, 어서 먹어.”
태화는 순간 짠한 감정이 올라왔다. 아들의 건강을 생각한 엄마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들, 잘 먹겠습니다!”
한 숟가락 뜬 태화는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캬~”
콩나물국은 맛있었고 속풀이에 아주 그만이었다.
[태화 군.]
[영감님. 밥 먹을 때는 말 시키지 마시죠.]
[난 시각하고 청각만 자네하고 공유하는 것 같네.]
[그럼. 미각 후각 촉각은 공유하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그렇네. 난 방금 자네가 먹은 콩나물국의 맛을 느끼지 못했고 음식 냄새도 맡지 못했네. 그리고 자네가 수저를 들 때도 느낌이 없었네.]
[정말 다행이군요. 쓸데없이 뭐 먹고 싶다고 조르지 않을 테니.]
[그런데 자네 어머니 말일세.]
[영감님. 저희 엄마한텐 관심 끊으시죠. 아니, 아예 제 가족한텐 관심을 끊으세요.]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자네 어머니가 왠지 낯이 익어서.]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