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4화. 허수아비의 기도 (15)
‘매달린 사람’은 봉인석을 깨고 나온 도로시의 두 사역마, 검은 갈기의 사자 수인(獸人)과 육중한 배틀액스를 어깨에 걸친 강철 골렘 앞에 섰다.
두 사역마는 평범한 인간 크기의 허수아비와 달리 거대한 체구를 자랑했다.
“크르르르르!”
-삐! 삐! 삐! 삐!
사자 수인은 이성을 잃은 듯 흉흉한 살기를 내뿜으며 마력을 방출했고 강철 골렘은 눈에서 빨간빛을 반짝이며 경고음을 냈다.
“은둔자! 빨리해요!”
“대기.”
로우어펠의 다급한 외침에 오스먼드는 빠르면서도 느긋한 움직임으로 수인(手印)을 맺으며 마법을 완성해 갔다.
“크어엉-!!”
-삐삐삐! 삐삐삐!
막 봉인에서 풀러나 이성을 잃은 사자 수인과 강철 골렘이 폭주하듯 발톱과 도끼를 휘둘렀다.
콰앙-!
강철 골렘의 도끼에 의해 ‘매달린 사람’의 방어막이 깨부숴졌다.
“잘했어요, 광대!”
그녀는 굵은 마력사로 사자 수인을 속박해 막은 자반을 칭찬하며 다시 방어막을 만들었다.
“으아아아!”
정작 칭찬받은 자반은 사자 수인의 강력한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팔이 휘둘러지는 대로 끌려가 이리저리 허공을 날아다녔다.
두 사람이 이성을 잃은 사역마들의 주의를 끄는 사이 오스먼드가 마법을 완성해 마법 지팡이를 휘둘렀다.
“완료.”
오스먼드의 지팡이에서 반짝이는 마력 가루가 공간을 장악하듯 퍼져나갔다.
마력 가루에 닿은 사자 수인과 강철 골렘은 흥분한 듯 폭주하다가 점점 움직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이내 축 늘어지듯 제자리에 섰다.
“성공.”
오스먼드가 “에헴!”소리를 내며 오른손으로 브이를 만들었다.
“역시 샌드맨(Sandman)의 수면 마법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요.”
요정의 한 갈래인 잠의 요정 샌드맨은 근처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잠들게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보통 마력 저항력이 낮거나 수면 상태 이상의 내성이 높지 않은 이들과 만날 때는 특수한 직물로 짠 옷과 가면 등으로 특성을 봉인했다.
샌드맨의 목소리는 수면 상태를 유발하기에 의사소통은 극히 짧은 단어만으로 구사하고 마법 또한 주문보다는 수인으로 대체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연인, 당신 차례입니다.”
“예예, 준비 다 끝났습니다.”
‘매달린 사람’의 재촉에 로우어펠은 바늘처럼 생긴 주물(呪物)을 두 사역마를 향해 던졌다.
“옭아매라!”
로우어펠의 호령에 날아가던 주물이 요동치더니 사자 수인과 강철 골렘의 곳곳에 박혀 들어갔다.
강철 골렘의 경우 주로 가동 부위와 틈새로 바늘이 들어갔다.
전신에 깊숙이 박힌 침들에서 거뭇거뭇한 저주의 기운들이 빠져나와 사역마들의 육신을 잠식했다.
“이걸로 준비는 모두 끝났군요. 은둔자의 마법이 조금만 늦었어도 전멸할 뻔했어요.”
오랜 봉인에 도로시와의 사역 계약 연결이 희미해지고 몸이 굳어 있는 데다 벤시의 울음소리로 이성을 잃은 상태라 가능했다.
조금만 더 늦어 완전히 몸이 풀렸다면 네 사람 모두 죽을 뻔했다.
“형통(亨通 : 모든 일이 뜻대로 잘 되어감).”
오스먼드는 엄지를 치켜세웠다. 잠 요정의 말에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래요, 모두 잘되었으니 다행이죠. 광대, 당신 차례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자반은 슬픈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봤다.
“울어다오, 라일라.”
자반의 말에 벤시는 서글픈 목소리로 울었고 두 사역마는 두 눈을 떴다.
두 사역마가 얌전히 서 있는 것을 확인한 ‘매달린 사람’은 한숨 돌리며 말했다.
“우선 저 알 수 없는 폭발의 원인을 알아내고 허수아비를 제압하죠. 허수아비가 있어야 제대로 마녀의 봉인을 풀 수 있으니까요.”
그들의 목적이 단순히 사역마를 지배하는 거였다면 다른 방법도 많았다.
오랫동안 아르카나가, 수십 명의 ‘매달린 사람’이 굳이 복잡하게 마녀 도로시의 마력 파장을 복제하고 그 파장과 적합성이 높은 영혼을 찾아 벤시로 만드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터였다.
“드디어…! 그 망할 X년에게 복수를! 굴욕을 줄 수 있겠군요!”
한껏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엔 희열과 분노, 굴욕과 흥분, 그리고 결코 채울 수 없는 상실감이 뒤섞여 있었다.
* * *
나는 은하의 눈으로 숲 중앙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라봤다.
짐작하고 있었지만 잠에 취해 얌전해진 사자와 깡통을 보니 역시 아르카나의 목표는 마녀였던 모양이다.
정확히는 마녀를 복종시키기 위한 사전 준비를 하려 했겠지만 내가 친 깽판 때문에 모험을 한 듯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네임드 간부라고 해도 고작 네 명만 보냈을 리가 없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전투 위주의 넘버즈 간부를 함께 보냈을 터였다.
소설에서는 그랬으니까.
느끼한 인상의 중년인은 자반, 전신을 꽁꽁 싸맨 데다 가면까지 쓴 녀석은 샌드맨인 오스먼드, 그리고… 로우어펠인가?
침을 사용하는 저주술은 말레콥 제프리즈의 비전인데 그걸 사용하는 젊은 남자라면 그밖에 없었다.
원래라면 말레콥이 왔어야 했지만 원래 운명과 달리 바스타유 산맥에서 전사한 까닭에 로우어펠이 대신 온 듯했다.
그리고 남은 한 명은 ‘매달린 사람’이겠지?
도로시와 연관된 임무에 ‘매달린 사람’이 빠질 리 없으니 분명 ‘매달린 사람’의 영혼 파편 중 하나가 분명하다.
오스먼드를 제외하면 다들 전투 쪽 전문은 아니지만 마녀의 봉인을 풀고 지배하는 데 필요한 사람들만 모였다.
“대단한 괴물들입니다.”
제이드도 마법으로 숲 중앙에서 벌어진 일을 확인했는지 진지한 얼굴이었다.
“전성기였다면 그렇지만 지금은 그럭저럭 상대할 만할 거야.”
“바로 기습할까요? 지금이라면 대비하기 전에 전력으로 한 방 먹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제이드의 제안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조금만 기다리면 더 재미있을 거야.”
오스먼드가 수면 마법으로 도로시의 사역마들을 제압했다면, 로우어펠은 제압된 사역마들의 몸에 저주를 걸어 이성을 제압하고, 벤시의 마력이 담긴 음파가 전달되도록 ‘수신기’를 박아 넣었다.
도로시의 마력 파장을 연구해 이식한 벤시의 울음소리는 이성을 잃은 사역마들에게 벤시를 도로시라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즉, 라일라는 두 사역마를 조종할 수 있다.
나는 나비의 등을 쓰다듬으며 마력을 불어넣었다.
“부탁한다.”
-미야아옹!
나비는 벤시의 울음 ‘소리’에 간섭했다. 그 순간 사역마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 * *
‘매달린 사람’은 생각했다.
위대한 대마녀 도로시는 꼭두각시가 되어 그녀와 아르카나를 위해 평생토록 봉사하게 될 거다.
그녀가, 그리고 분열된 ‘매달린 사람’의 영혼 파편들이 그토록 원하던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확신한 순간 벤시의 울음소리가 살짝 이상하게 들리더니 두 사역마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크어어어엉-!!”
-삐삐삐! 전투 명령, 대상을 검색합니다.
사자 수인이 휘두르는 주먹에 ‘매달린 사람’이 날아가며 나무에 부딪혔다.
그리고 강철 골렘의 어깨에서 무언가가 계속해서 발사되었다.
“은둔자! 다시 재워요! 광대! 벤시의 울음소리를 멈추게 하세요!”
부러진 팔을 부여잡으며 피를 토하는 그녀의 외침에 오스먼드와 자반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사이 하늘 높이 쏘아진 수십 개의 강철 덩어리들이 꿈틀거리더니 작은 강철 골렘의 형태로 바뀌어 관리 부대가 있는 곳으로 쏟아져 내렸다.
* * *
나는 가볍게 혀를 찼다.
“쯧, 어렵구만.”
정확한 마력 패턴을 몰라서인지 도로시의 사역마를 내 뜻대로 조종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도 일시적으로 폭주시키는 데 성공했다.
강철 골렘의 분체(分體)들이 관리 부대 위로 고공 낙하하며 전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일단 폭주시키면 미끼부터 공격할 줄 알았다.
우리는 검은 오팔을 터트려 마력 공백 지대에 숨었지만 관리 부대 쪽은 강철 골렘이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마술사’ 휘하의 마법사들을 숲 중앙까지 끌어들인 목적 중 하나가 이루어졌다.
허수아비에게 듀라한이 있다면 강철 골렘에게는 분체 골렘이 있다.
재물이 있으면 무한히 만들 수 있는 듀라한과 달리 계속해서 증식이 되진 않지만 분체 골렘 하나하나는 어지간한 듀라한보다 강력했다.
“저 골렘은 현시점에선 소모제군요.”
관리 부대 쪽을 살피던 아바스엘이 분체 골렘을 분석하고는 바로 본질을 파악했다.
“맞아. 마녀가 있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마력이 고갈될 거야.”
물론 그렇다고 해도 지치고 다친 마법사들을 압도할 정도로 강력하겠지만.
짧은 사이 상대적으로 위계가 낮거나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마법사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땅을 굴렀다.
전투에 익숙한 관리 부대는 부대원들끼리 뭉쳐 잘 버티며 분체 골렘의 마력을 잘 소진시키고 있었다.
“좋아, 이걸로 배후 기습이나 차륜전은 안 당하겠네.”
사자 수인은 애초에 부하들을 만드는 능력이 없었고, 허수아비의 듀라한도, 강철 골렘의 분체 골렘도 이제 없다.
이제 싸워야 한다면 순수하게 세 사역마만 상대하면 된다.
“유안, 마녀의 사역마가 다시 잠잠해졌습니다.”
봉인 쪽을 주시하고 있던 제이드의 말에 나도 시선을 돌렸다.
그 짧은 시간에 잘도 진정시켰다.
영혼이 파편화되었다고 해도 과거 마도팔현의 자리를 위협하던 대마법사라는 건가.
‘매달린 사람’은 금방 문제를 파악하고 내 방해를 무력화했다.
하기야 마녀를 지배하기 위해 몇 년을 노력했는데 고작 음파를 방해한 것 정도로 어긋날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할까요?”
제이드의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 지시를 내렸다.
“일단 실루아와 아바스엘은 언제든지 준비했던 것들을 사용할 수 있게 대기하고, 길버트와 야드는 두 사람 호위 부탁해.”
“예,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힘차게 대답하는 길버트와 달리 야드는 지금이라도 봉인이 있는 숲 중앙으로 달려가고 싶은지 초조해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그러나 감정과 달리 현명하게도 감정을 억누르고 참을 줄 알았다.
“프레시아와 제이드는 말했듯이 신호 주면 바로 갈 준비하고, 소피아는 두 사람을 보조해 줘.”
내 말에 소피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너는 뭘 하는데?”
“나? 나야 아주 재미있는 일을 해야지.”
물론 나만 재미있고 아르카나한테는 재미없는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슬슬 도착할 시간이 됐는데 늦는다. 그렇게 생각할 때쯤 벤시의 울음소리에 반쯤 이성을 잃은 허수아비가 숲 중앙을 향해 달려왔다.
“드디어 도착했군.”
나보다 먼저 갔으면서 이제 도착하다니. 어디서 놀고 온 건가 싶어 자세히 보니 옷과 얼굴에 검댕이가 묻어 거뭇한 게 보였다.
몰골을 보아하니 내가 숲을 터트릴 때 폭발에 휘말려 늦었던 모양이다.
이건 계산 밖이었다.
숲의 마력 탓에 나도 모든 곳을 볼 순 없었다.
“유안.”
제이드가 날 바라보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오차 범위 내네.”
더 늦었으면 애매해졌을 텐데 다행이다.
허수아비가 숲 중앙에 도달해 거대한 낫을 휘두르는 순간.
가면을 쓴 프레시아와 제이드도 마녀가 봉인되어 있는 숲 중앙으로 뛰어들었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도로시의 얼굴을 볼 시간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