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허수아비의 기도 (14)
프레시아는 앞서 달리며 나무를 베어 숲 중앙으로 향하는 일직선 길을 만들었다.
나는 빽빽하게 잘린 나무 밑동을 밟고 달리며 혀를 내둘렀다.
프레시아도 마력을 방출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하얀 팔찌를 차긴 했지만 오랜 시간 음차원의 마력을 머금고 질겨진 나무를 두부 썰듯 베어냈다.
“저 나무들은 나중에 챙겨 가죠. 저런 희귀 표본은 구하기 힘듭니다. 프레시아 경이 자를 수 있는 걸 알았다면 진즉 부탁하는 거였는데 말이죠.”
내 옆에서 비행 마법으로 날아가는 아바스엘은 잘려 나간 나무를 탐냈다.
확실히 나도 저렇게 쉽게 베어 넘길 줄은 몰랐다.
저거 검기로도 잘 안 잘리는 걸 텐데 프레시아의 검에는 검기는커녕 희미한 마력만 맺혀 있을 뿐이었다.
내 감탄하는 시선을 느꼈는지 프레시아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저 무언가를 베는 요령을 알았을 뿐이에요.”
검마와 검선에게서 뭔가를 배운 건가?
프레시아는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은근히 칭찬을 바라는 듯 날 흘끔흘끔 바라봤다.
“그 요령을 안다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 역시 프레시아야.”
칭찬은 진심이었다.
소설에서 로툴러스도 저 나무를 벨 땐 검기로 안 돼서 강기로 힘껏 베어냈지, 프레시아처럼 가볍게 베어내진 못했다.
어쩌면 프레시아가 세운 자신의 심상(心想)을 검에 싣게 된 결과일지도 몰랐다.
내 칭찬에 아닌 척했지만 프레시아의 입꼬리가 살짝살짝 올라갔다.
“별것 아닙니다. 그보단 도련님의 성장이 더 대단합니다. 몇 달 전에는 지금처럼 뛰시지 못했잖아요.”
프레시아는 쑥스러운지 뺨을 살짝 붉히며 말을 돌렸다. 프레시아의 평가에 나는 가볍게 웃었다.
“하하하하, 다 네 덕분이지.”
프레시아의 개같, 아니 X 같, 아니 시발, …뭐라 긍정적으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사람의 한계를 걸레 쥐어짜듯 시험하는 단련과 검증된 연공법, 그리고 디벳의 영양제와 정령술의 복합적인 성과였다.
이젠 평범한 소년 수준까지 올라온 신체 능력을 연공법으로 종자급 기사 수준까지 끌어올린 다음에 정령술로 신체 능력을 한 번 더 상승시켰다.
정령비전오의(精靈秘傳悟意)-빙의술(憑衣術)
대상, 누니-비뢰신(飛雷身) 1단계
대상, 나비-풍허신(風噓身) 1단계
번개의 정령 누니의 힘으로 속도를 높이고, 바람의 정령 나비의 힘으로 호흡을 골랐다.
지금 내 신체 능력은 갓 정식 기사가 된 수준은 될 거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이 몸이 평범한 몸뚱이였으면 나도 지금쯤 시조의 유산을 받아들이고 검기 정도는 사용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내 신체 능력이 기사급이 됐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각종 편법을 사용한 것이기에 시조의 유산을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멀었다.
퍼센트가 차오르는 걸 보면 앞으로 10년은 걸릴 것 같구만.
시조의 유산은 이미 없는 셈 친 지 오래였다.
내가 쓴웃음을 짓는 걸 본 아바스엘은 다시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면 허수아비는 잡지 않아도 괜찮은 겁니까? 이성을 잃은 걸 보면 보통 일이 벌어진 게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아바스엘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나는 별것 아니라고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 그놈이 이성을 잃고 달려가는 것도 전부 예상했거든. 그래서 듀라한도 미리 사기 쳐서 뺏었잖아.”
숲 중앙에서 울려 퍼진 벤시의 울음소리는 아르카나의 마법사들이 오랫동안 마녀의 마력 파장을 분석해 음성 파장에 이식한 결과물이었다.
“아, 그래서였습니까?”
내 말에 아바스엘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다. 불손하게도 마치 그냥 네가 탐나서 사기 친 게 아니냐는 눈이었다.
음, 나에 대해서 너무 많은 걸 알고 있군.
계속 나무 밑동을 밟고 달리다 보니 어느새 숲 중앙 근처 합류 지점까지 도달했다.
미로 같은 숲을 일직선으로 달려오니 이렇게 빠르고 편할 수가 없다.
때마침 제이드가 다른 일행들을 데리고 도착했다.
“시킨 일은?”
“완벽하게 끝냈습니다. 언제든 가능합니다.”
“네 계획은?”
“얼추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제이드가 악동처럼 웃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다들 수고 많았어. 슬슬 마무리만 하면 되겠네.”
길버트에게서 검은 오팔이 담긴 자루를 건네받는데, 야드가 머뭇거리며 손을 들었다.
“저,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답지 않게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의 그를 의아하게 보는 데 제이드가 쓰게 웃으며 대신 말했다.
“아무래도 저 내부에서 주기적으로 울리는 울음소리의 주인이 야드의 연인인 라일라인 것 같습니다.”
라일라? 자반에게 살해당한 슬라반 서커스의 라일라? 이 벤시의 울음소리가 라일라의 거였다고? 처음 듣는 정보인데?
내가 놀라서 야드를 보자 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처음 울음소리가 울려 퍼질 때 라일라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당장 이 숲을 나가라고, 마녀가 깨어나기 전에 도망치라고.”
도망치라고 경고한다라. 흥미롭네.
계속해서 우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이성을 잃은 상태인 것 같은데 어떻게 말을 전한 걸까?
그리고 아르카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지?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야드는 다급하게 말했다.
“진짜입니다! 제가 라일라의 목소리를 못 알아들을 리가 없습니다!”
“아아, 진정해. 아니라는 건 아니니까. 벤시가 라일라일 수도 있지. 충분히 가능해.”
자반도 자기가 키우던 양녀를 죽인 이유가 있었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소설에 따르면 어떤 마법에 인신 공양을 하기 위해 희생시켰다고 했는데 그 희생이 이 숲에서 써먹기 위해서였나?
그럼 숲 중앙에는 자반도 있겠군.
“쓰읍, 그럼 계획을 약간 수정해야겠는데.”
내 말에 야드는 마른침을 삼켰다.
“계획을 수정하신다면…?”
“원래는 안전하게 장거리에서 퇴마 신성 마법을 갈겨서 소멸시키려 했거든.”
내 계획에 야드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아, 걱정하지 마. 소멸이 아니라 봉인시키면 되니까. 그럼 당장은 괜찮겠지.”
강제로 언데드가 된 사람은 죽음의 광기에 파묻혀 미쳐버리고 만다.
때문에 보통 사령술사가 사람을 죽여 언데드를 만들면 영혼이 없는 하위 언데드로 만들거나 영혼의 이지를 제압해 꼭두각시처럼 부려먹는다.
야드의 말이 사실이라면 라일라가 야드에게 도망치라 경고한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안전한 계획이 다소 위험한 계획으로 바뀔 뿐이야.”
내가 장난스레 웃으며 말하자 야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죄송합니다.”
“내게 미안할 게 뭐 있나. 위험 부담을 대신 짊어질 프레시아와 제이드에게나 고맙다고 해.”
내 말에 야드는 울 것 같은 얼굴로 프레시아와 제이드를 바라봤다.
프레시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의 해후일 테니 진부한 세레나데나 준비해 두세요.”
프레시아의 농담에 제이드도 낄낄거리며 읭크했다.
“제 말을 따르길 잘했죠?”
두 사람의 말에 야드는 농담으로 받아치지 못하고 눈물이 고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믿어줘서 감사합니다…”
이 울음소리의 주인이 라일라라는 말을 믿지 않을 거라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하기야 보통 느닷없이 벤시의 목소리가 사별한 연인이라고 하면 보통 벤시에게 홀려도 단단히 홀렸구나 하고 넘어가지 동의해 주진 않았다.
야드의 감사 인사에 프레시아와 제이드가 동시에 말했다.
“도련님께서 충분히 가능하다고 하셨으니 당연히 믿습니다.”
“유안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으니 당연히 믿어야죠.”
같은 말을 한 두 사람은 서로를 살짝 노려봤다.
역시 둘이 죽이 잘 맞는다니까.
아니, 그런데 나에 대한 믿음이 너무 확고한 거 아니야?
나도 헛다리 짚거나 실수할 때도 종종 있는데.
“아, 그러고 보니 감사할 사람들이 더 있었지.”
지금쯤 폭발과 신나게 술래잡기를 하며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을 아르카나의 마법사들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지.
미끼가 되어줄 사람들인데 말이야.
* * *
아리사는 마력 회복 유도제를 삼키며 마녀의 숲을 바라봤다.
“냐하~! 더럽게 힘드네. 안 그래? 니벨?”
“꼬르르르-!”
지친 표정으로 전신에 땀을 흘리며 땅에 누워 있는 니벨은 입에 마력 회복 유도제를 머금은 채 대충 대답했다.
일단 마력 회복이 필요해서 입에 털어 넣긴 했지만 너무 지친 나머지 무언가가 목구멍 너머로 잘 안 들어갔다.
“냐하하하하! 꼬르르륵~! 이래! 되게 바보 같아!”
아리사는 폭소를 하며 니벨의 배를 때렸다.
“커윽! 꼬르륵! 커르륵!”
귀중하고 희귀한 물약을 뱉을 뻔한 니벨은 급하게 입을 닫고 옆으로 굴러 아리사의 손을 피했다.
그러고는 엎드린 채 억지로 물약을 꿀떡꿀떡 삼켰다.
“푸하! 죽을 뻔했잖아요! 아리사! 물 한 모금 찾을 수 없는 땅에서 익사라니! 그런 끔찍한 경험은 하고 싶지 않아요!”
“냐하하하하! 죽었으면 내가 리치로 만들어 부려줬을 텐데 아쉽네~!”
“뭐예요?!”
“냐하! 그러게 누가 대답도 안 하고 누워 있으래?”
아리사가 키득거리며 놀리자 니벨이 발끈했다.
“저는 당신같이 천하게 자라지 않아서 체력이 부족하다고요!”
“아앙~!? 귀하게 자란 몸뚱이에 달린 주둥이는 강냉이가 안 털린대? 냐하하! 어디 한번 확인해 봐? 그 하얀 강냉이가 털려도 푸른 피가 흐르는지 알아볼까?”
아리사가 마법 지팡이를 치켜들자 니벨이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왜인지 잘 몰랐지만 싸우다 보면 아리사는 자신의 취약점을 파고들어 한 방 먹이고는 했다.
인형술 학파의 현자인 게오르 계파의 적통인 니벨과 사령술의 조종(祖宗)으로 여겨지는 사사광도(死社曠禱)의 네크로맨서인 아리사.
둘의 실력은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음에도 항상 싸우면 니벨이 불리한 상황에 자주 직면했다.
아리사가 니벨의 보급형 인형을 빼돌려 마법을 분석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니벨은 일단 싸움은 피하고 봤다.
“냐하하하하! 겁먹은 거야? 귀족님도 별것 없네~?”
아리사의 놀림에 니벨은 발끈했지만 속으로 화를 삭였다.
“겁먹은 거 아닙니다. 그저 주어진 임무를 하기 위해서 쓸데없는 감정싸움은 불필요하다 여긴 겁니다. 어린아이 같은 당신과 달리 말이죠.”
니벨은 마녀의 숲을 바라봤다. 음차원의 마력과 검은 안개로 둘러싸인 탓에 외부에서 내부를 파악할 순 없었다.
하지만 간간이 들려오는 폭발음과 쐐기에 의해 숲 아래로 가라앉아 있어야 할 음차원의 마력이 하늘 위로 솟아오르며 소멸하는 모습을 보니 문제가 생겨도 단단히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냐하하하. 들어가기 싫다.”
“웬일로 마음이 통했습니다.”
두 사람은 한눈에 봐도 생지옥이나 다름없어 보이는 숲 앞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랜턴에 귀화를 지폈다.
“그래도 들어가야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네요.”
아리사와 니벨은 최대한 뭉그적거리며 숲으로 들어갈 준비를 했다.
* * *
관리 부대의 총책임자인 아르윈은 이마에 흐르는 피를 대충 소매로 닦아냈다.
그들을 숲 중앙으로 몰듯 터지는 폭발의 여파로 날아온 나무 조각에 맞아 생긴 상처였다.
아직도 숲 이곳저곳에선 정체를 알 수 없는 폭발이 계속되었지만 숲 중앙에 가까워질수록 폭발이 줄어들었다.
“얼마나 생존했는지 파악해라.”
아르윈의 명령에 휘하 부대장들은 관리 부대원들과 도로시의 빗자루를 노리고 들어온 마법사들 중 생존자를 파악했다.
“관리 2대 총원 80, 실종 9, 부상 8. 현 인원 63입니다.”
“관리 3대 총원 75, 실종 11, 부상 12. 현 인원 52입니다.”
실종자는 사실상 폭발에 휘말려 사망했다고 봐야 했다.
“부대 외 인원 대략 90여 명 생존으로 보입니다.”
관리 부대를 따라온 약 240여 명의 마법사 중 살아남은 사람은 절반에 한참 못 미쳤다.
사실상 ‘아르카나 01, 마술사’의 파벌 중 서부권은 전멸했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은 피해였다.
“다행인 점은 생존자 중 부상자가 적습니다.”
부하의 말에 아르윈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상자가 적은 이유는 혼란 상태에서 부상자를 구하지 않고 버렸기 때문이었다.
“오노러블 아산트를 비롯해 실력이 출중한 이들이 주로 살아남았군.”
아르윈이 살아남은 이들을 규합하고 부대를 임시 개편하려는 그때 강철 유체를 지닌 재앙이 그들을 찾아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