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5화. 허수아비의 기도 (6)
허수아비는 숲을 거닐었다. 매일같이 자신의 주인이 봉인된 숲을 지키기 위해 돌아다닌 지 몇 년이나 흘렀을까?
허수아비는 알 수 없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숲은 밤낮이 무의미했다.
어쩌면 허수아비의 주인이 봉인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벌써 수백 년이 지났을지도 몰랐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건 중요하지 않았다. 허수아비의 사명은 자신의 주인을 지키는 것.
그뿐이다.
허수아비는 랜턴에서 타오르는 푸른 귀화(鬼火)를 멍하니 바라보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허수아비의 의식은 때때로 지난 과거를 여행했다.
그 기억은 때로는 행복했던 시간일 때도, 때로는 슬펐던 시간일 때도 있었다.
허수아비의 멍한 눈가에는 검은 안개로 둘러싸인 어두운 숲이 아닌 푸른 하늘이 비쳤다.
* * *
쾅-! 콰앙-! 콰과과광-!
사방에서 연달아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올려다본 푸른 하늘은 떠 있는 구름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정지되어 있었다.
요동치는 마력의 폭풍에도 시간이 멈춘 듯한 현상은 공간 자체가 박리(剝離)되어 고정되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허수아비는 자신이 떠올린 이 기억이 가장 후회하는 과거임을 깨달았다.
어두운 숲에 갇혀 지내는 허수아비의 정신을 붙잡아 주는 회상(回想)은 허수아비의 의지와 상관없이 때때로 과거를 보여줬다.
오늘은 허수아비의 주인, 사계와 대비되는 사재의 마녀의 한 명, ‘뒤흔드는 지진의 마녀’와 아르카나의 전투가 벌어진 날.
허수아비가 주인을 지키지 못했던 날의 기억이었다.
“저 괴물이 가지 못하게 막아!”
허수아비 앞을 256명의 적이 가로막았다.
과거에는 몇 명이 가로막았는지 알지 못했지만, 몇 번이고 회상 속에 들어와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선두의 사내의 검에는 선명한 검강이 맺혀 있었다.
한 사람의 삶과 그 의지가 서려 있는 검강은 초인의 증거였다.
사내의 뒤로 보이는 한 명의 노인의 창과 여인의 두 주먹에도 마찬가지로 심상(心象)이 서린 검강이 선명했다.
세 명의 초인을 따르는 74명의 무기에도 미약하게나마 검강이 맺혀 있었다.
그들 하나하나가 시간이 허락한다면 자신의 의지와 역사로 심상을 바로세울 수 있는 재능의 무인(武人)들이었다.
그러나-
“비켜라, 버러지들아.”
그들 앞에 선 것은 그들의 시간을 수확할 농사꾼이었다.
허수아비의 과거는 허수아비의 의지와 관계없이 살기를 내뿜으며 자신의 키보다 긴 지팡이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지팡이에서 마력으로 이루어진 날카로운 날이 솟아올라 거대한 낫으로 변했다.
허수아비가 달리며 낫을 휘두르자 13명의 목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크윽! 이 괴물이!”
허수아비의 낫을 피한 초인이 전력을 다해 강기를 두른 주먹을 내질렀다.
콰앙-!
허수아비는 길쭉한 낫 손잡이로 그녀의 주먹을 흘리며 자연스럽게 낫날을 목 뒤로 향하게 만들었다.
“루실후르!”
그녀의 동료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 위험을 알렸으나, 허수아비는 그녀가 반응하기도 전에 너무나 가벼운 손놀림으로 낫 손잡이를 당겼다.
서걱!
초인의 죽음이라기에는 너무나 허무한 최후였다.
가장 선두로 달려오던 초인이 분노하며 허수아비에게 검을 휘둘렀다.
허수아비는 강맹한 일격에도 적에게 등을 보이며 다른 적을 향해 낫을 휘둘렀다.
“일어나라, 허수아비여.”
허수아비의 명령에 낫에서 푸른 귀화가 떨어져 나오더니, 방금 목이 베인 권사(拳士)가 일어나 주먹을 휘둘러 허수아비의 등을 보호했다.
“이이…! 감히!”
방금 전까지 동료였던 이가 듀라한으로 변해 적이 되자, 아르카나의 초인은 분노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섬세하고 강맹한 듀라한의 권격을 뚫고 허수아비에게 도달하진 못했다.
허수아비의 낫에 256명의 무인들이 듀라한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목숨을 바쳐 번 잠깐의 시간은 허수아비의 남은 삶을 후회로 만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으아아아아-!!”
허수아비는 자신이 늦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통과 분노에 찬 비명을 질렀다.
허수아비의 주인의 마력이 사라지며 마녀가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나무가 자라며 거대한 숲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온몸이 난도질당하더라도 뚫고 그녀에게 가야 했다.
팔이 잘려 낫을 들 수 없다면 낫을 놓고라도, 다리가 잘려 달릴 수 없다면 기어서라도 주인에게 가야만 했다.
끝끝내 죽더라도 그녀의 곁에서 죽었어야 했다.
마녀가 봉인된 숲의 한가운데서 허수아비는 후회했다.
* * *
허수아비는 멍하니 회상에 잠겨 있다 정신을 차렸다.
요즘 들어 옛 기억에 빠져드는 경우가 늘어난 것 같다고 생각하며 평소처럼 고요한 숲을 걸었다.
중간중간 그림자 짐승들이 허수아비의 곁을 스쳐 지나갔지만 허수아비도, 그림자 짐승들도 서로를 신경 쓰지 않았다.
울적한 마음에 소중한 낡은 오카리나를 꺼내 연주하려는데, 어딘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위화감의 정체를 곰곰이 생각하던 허수아비는 마주친 그림자 짐승의 숫자와 움직이는 경로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경우는 하나뿐이었다.
침입자.
침입자가 숲 안으로 들어온 거다. 그 사실을 깨달은 허수아비는 찐득한 살기를 줄줄 흘리며 감각을 확장했다.
오랫동안 돌아다닌 숲의 구조는 눈 감고도 알 수 있을 만큼 익숙했다.
“침입자는 두 곳. 하나는 은신처로 숨어들었나? 아직도 남아 있는 곳이 있었나 보군.”
아르카나가 마녀를 봉인하기 위해 숲을 만들면서 숲의 관리자들을 위해 마련해 둔 은신처가 몇 곳 존재했다.
허수아비는 마녀가 봉인된 이후로 숲에 들어온 아르카나를 죽이고, 그들이 숨어든 은신처를 파괴하는 데 온 힘을 들였다.
아르카나의 안전 가옥은 그 이름에 걸맞게 숲의 마력 흐름에 맞춰 모습을 감추고 이동했다.
그 탓에 허수아비도 쉽사리 발견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숲에 들어온 아르카나를 죽인 숫자만 벌써 네 자리에 육박하고, 안전 가옥도 여섯 곳이나 파괴했다.
그런데도 아르카나는 꾸준히 숲에 들어와 안전 가옥에 숨어들었다.
숨어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허수아비는 숨지도 않고 숲을 당당히 돌아다니는 침입자부터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찐득한 살기와 상반되는 차분한 발걸음으로 움직이는 허수아비는 침입자의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침입자들은 어떻게 알았는지 그림자 짐승들을 피해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신기했지만, 허수아비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침입자를 배제하는 것.
적을 죽이는 것뿐.
허수아비는 랜턴이 달린 지팡이에 마력을 불어넣어 지팡이를 거대한 낫으로 만들었다.
그러고는 침입자를 향해 달려들며 거대한 낫을 휘둘렀다.
가장 선두로 나선 유약해 보이는 인상의 소년의 목에 날이 박히려는 순간-
“도로시!”
허수아비는 소년에게서 느껴지는 익숙한 마력과 그리운 이름을 듣고 낫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 *
워메, 뒈질 뻔했네.
사재의 마녀 중 ‘뒤흔드는 지진의 마녀’, 도로시 플렘버르 게일의 권속인 허수아비의 낫이 내 목에 박히기 직전 멈췄다.
조금만 늦게 외쳤으면 진짜로 죽을 뻔했다.
음차원의 마력 탓에 정령들의 감각도 약간 노이즈가 낀 느낌이었지만, 제 기능을 상실한 건 아니어서 다행이다.
이 낫에 찔리고도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찔리면 굉장히 골치 아파졌기에 다행이다.
갑작스러운 허수아비의 기습에 프레시아와 길버트가 놀라서 검을 뽑았지만 허수아비는 두 사람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나를 노려봤다.
이 숲에서 전력을 낼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모양이다.
“넌 누구냐.”
허수아비의 물음에 나는 손을 들어 검을 뽑은 두 사람에게 괜찮다고 신호를 주며 대답했다.
“손님이다. 네 주인인 도로시 플렘버르 게일을 만나러 왔다.”
내 대답에 허수아비는 불쾌한 듯 미간을 좁혔다.
“놀리는 건가, 아니면 알지 못하는 건가?”
그 물음에 나는 싱긋 웃었다. 역시 뇌가 없는 허수아비답게 생각이 부족하구만.
“둘 다 아니다. 놀리는 것도 아니고, 도로시가 봉인당했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니야. 말한 대로 네 주인을 만나러 왔을 뿐이다.”
“봉인당하신 걸 알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허수아비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못 할 소리는 아니지. 봉인당해 못 만난다면 봉인을 풀고 만나면 될 일 아닌가?”
“…봉인을 풀 방법이 있다고?”
“물론. 풀 수 없는 봉인은 이 세상에 없어, 오직 풀지 못하는 사람만 존재할 뿐이지. 아, 물론 난 풀 수 있는 사람이고.”
내 당당한 목소리에 허수아비의 두 눈에 일렁이는 귀화(鬼火)가 흔들렸다.
“귀한 손님인데 이제 그만 이 낫은 치우지?”
내 말에 허수아비는 나와 내 일행들을 둘러보더니 내 목의 낫을 치웠다.
그러나 프레시아가 내 팔을 당겨 자신의 뒤로 감추며 당장이라도 허수아비를 벨 듯이 사납게 노려봤다.
“괜찮아. 아무리 머리가 비어 있어도 내가 죽으면 도로시의 봉인을 풀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겠지.”
숲이라는 환경만 아니었다면 프레시아는 충분히 허수아비의 기척을 잡아내고 대처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환경적 어드밴티지가 저쪽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만큼 싸우는 건 지양해야 한다.
물론 싸우게 될 경우의 대비책도 준비해 두긴 했지만.
“네 말이 진실이라는 걸 어떻게 확신하지?”
허수아비의 물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증거를 대라면 못 할 것도 없지만 네가 복잡한 마법 술식을 이해할 것 같진 않은데.”
허수아비는 낫으로 벤 자를 언데드로 만들어 조종하지만, 그 능력의 근원은 허수아비 자신이 아닌 주인인 마녀였다.
뇌가 없는 허수아비는 복잡한 마법을 알아볼 학식이 없다.
“음… 그럼 뭐가 좋을까? 아! 증거 대신 이 숲에 있는 아르카나의 안전 가옥 위치를 알려줄게. 그럼 내가 적어도 네 주인의 적과 같은 편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겠지?”
내 제안에 허수아비는 잠시 침묵했다. 생각을 정리한 듯하더니 날 똑바로 보며 천천히 물었다.
“네 마력은 분명 도로시의 것과 비슷하다. 정확히는….”
“메마른 가뭄의 마녀.”
“…그래, 메마른 가뭄의 마녀의 마력 같아. 어떻게 된 거지?”
궁금해할 만했다.
허수아비가 공격을 멈춘 건 내가 도로시의 이름을 알고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내 마력의 근원이 되는 힘은 과거 메마른 가뭄의 마녀, 아퀼라의 마력회로로 시작했기에 내 마력의 파장은 사재(四災)와 유사했을 테니까.
허수아비의 말에 제이드가 놀라서 날 바라봤다. 사재는 사계와 대립하면서도 때때로 힘을 합치기도 하는 이들이었기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일례로, 마녀였던 아퀼라는 당대 겨울나무의 현자에게 비전을 뺏어 왕궁 서재에 숨겨놓은 적이 있었다.
“마녀는 현자와 달리 제대로 된 재앙의 힘을 내려면 여성의 육신이어야 할 텐데?”
그 말대로였다. 내게 있어선 그저 마력일 뿐이었지만, 마녀의 마력은 여성의 몸이어야만 상호작용하며 재앙의 힘을 다룰 수 있었다.
때문에 내가 마녀의 마력을 이어받았다고 해서 마녀가 될 순 없었다.
“딱히 내가 마녀 후보가 된 건 아니야. 그저 연이 닿았을 뿐이지.”
현자가 일인전승으로 제자를 키운다면 마녀는 여러 제자를 두고 경쟁시킨다.
그 과정에서 제자들끼리 서로 상잔하는 것은 일상다반사였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우선 아르카나의 안가부터 부숴버리고 마저 이야기하자고.”
나는 유쾌하게 웃어 보였다.
일단 엿부터 먹여야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