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3화. 허수아비의 기도 (4)
고요한 숲속.
허수아비는 오늘도 귀화(鬼火)가 담긴 랜턴이 달린 지팡이를 짚으며 숲을 돌아다녔다.
이 고독은 얼마나 더 오래 지나야 사라지는 것일까.
서글픈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어둡고 검은 안개로 둘러싸인 숲에선 하늘을 볼 수 없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귀화가 타오르며 내뿜는 푸른빛에 반사되어 푸르게 빛나는 잎사귀와 귀화가 일렁이며 같이 요동치는 숲의 그림자뿐.
허수아비는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품 안에서 낡은 오카리나를 꺼내 불고는 했다.
고요한 숲속에 경쾌한 선율이 흐를 때면 소중한 추억이 떠오르곤 했다.
허수아비의 귓가에는 들릴 리 없는 그리운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술잔을 높이 들어라! 용맹한 전사들이여!
피 흘려 쓰러질지라도! 우리는 나아가리라!
술잔을 들이켜 비워라! 영광의 시대를 위하여!
어깨의 짐이 무겁더라도! 우리에겐 전우가 있으니!
기억 속의 노래는 잘 부르던 노래는 아니었다.
미성이 아닌 걸걸한 목소리가 거슬린다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허수아비에게는 너무나 그리운 목소리였다.
한 곡이 끝나고 어두운 숲은 고요를 되찾았다.
기분을 달랜 허수아비는 다시 랜턴이 달린 지팡이를 들고 숲속을 거닐었다.
* * *
“하암~!”
늦게 일어난 나는 침낭 안에서 두 눈을 비비적거리다가 기어 나왔다.
아침 체력 단련을 끝낸 듯 멱을 감던 길버트가 텐트에서 나오는 날 발견하고 인사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침 식사 준비해 드릴까요?”
다들 새벽같이 일어나 각자 훈련이나 연구 등을 해서인지 날 제외하고는 이미 아침 식사를 끝낸 모양이었다.
내가 늦게 일어나면 기다리지 말고 먼저 먹어두라고 이야기해 둔 덕분에 미안한 일도 없고 좋구만.
“어, 부탁할게.”
아침 식사는 어제저녁에 내가 만들어 둔 스튜와 딱딱한 빵, 그리고 꺼진 모닥불 아래 연잎에 감싸 파묻어 둔 고깃덩어리였다.
자는 동안 간접 열로 천천히 익은 고기는 굉장히 부드러웠다.
“아, 일어나셨습니까?”
아침 식사를 하는데, 소피아와 함께 치천사의 창각을 연구하던 제이드가 내게 다가와 옆에 앉았다.
“어때? 치천사의 창각에서 특별한 거라도 건졌어?”
내 물음에 제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신성력의 메커니즘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어서 그런지 당장의 성과는 없습니다. 아, 그 고기 조리법은 특이하더군요. 간단하고 맛도 좋고. 여행할 때 좋은 조리법 같습니다.”
그 말에 나는 고기를 삼키며 대답했다.
“아니, 이건 신선한 고기로 해야 하고, 조리 시간도 오래 걸려서 여행에는 그렇게 맞지 않아. 사냥도 쉽진 않잖아?”
나야 식자재 창고라는 희대의 식재료 보관 전용 아공간 마도구가 있어서 이런 요리를 하는 거지, 보존식이라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소금이나 향신료는 그렇다고 쳐도, 연잎 같은 재료는 보통 안 들고 다니지 않는가.
“아하! 과연,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납득한 제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제 마도서 같은 걸 읽느라 늦게 주무시는 것 같던데 무슨 책입니까?”
“아, 이거?”
나는 빌리의 사령술서를 꺼냈다.
전설적인 사령술사가 자신의 모든 것을 집대성해 저술한 책은 그 자체만으로도 강력한 마도구였다.
“저 숲에 들어가기 전에 익혀둬야 할 마법이 있어서 말이야.”
나는 손가락으로 허공에 간단한 마법진을 그려 푸른 도깨비불을 피워냈다.
기초적인 사령 마법으로, 불이 뜨겁지 않고 차갑다는 특징이 있었다.
“음차원의 마력으로 피워낸 불이군요. 귀화(鬼火)라고 하죠?”
역시 뛰어난 마법사답게 한눈에 알아봤다.
숲 안에선 보통 불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금방 꺼졌다.
하지만 귀화라면 오히려 숲의 마력을 잡아먹으며 오래도록 타올랐다.
마침 식사도 끝났으니 람의 힘으로 설거지를 하며 일행들을 모았다.
“저 숲에 들어가기 전에 주의 사항을 알려줄게. 저 숲은 기본적으로 마력 방출이 잘 되지 않아. 정확히는 마력을 방출해도 금방 흩어진다고 해.”
내 말에 아바스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숲에서 짙은 음차원의 마력이 느껴지는 걸 보면 사람이 방출하는 양차원의 마력과 융합해 소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이 기본적으로 다루는 마력은 양차원의 마력이었고, 사령술을 비롯한 몇몇 흑마술이 음차원의 마력을 사용했다.
보통 두 마력이 모이면 반발이 일어나 폭발하거나, 서로의 빈자리를 채우며 소멸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마녀의 숲은 환경적, 인위적 특성상 후자의 현상이 주로 일어났다.
“그런데 저렇게 마력이 짙으면 음차원의 마력을 사용하는 마법도 쉽사리 사용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정확하게 봤어. 숲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은 체외로 방출하지 않는 종류, 혹은 숲에 형성된 마력의 흐름에 거스르지 않을 정도로 작거나 몇몇 섬세한 흑마법 정도야.”
마력 밀도가 높은 곳은 마법을 사용하기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마법이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마력을 세상과 공명시켜 이적(異跡)을 발생시키는 행위다.
마력 밀도가 높다는 것은 자기주장이 강하다는 의미였고, 마법사의 심상으로 변질시키기 어려워진다는 뜻이다.
나와 아바스엘의 말에 소피아가 손을 들었다.
“신성력은?”
“신성력도 어지간해선 제약이 있을 거야. 그래도 너라면 직접 접촉해서 사용하면 치료는 가능할걸?”
검기나 검강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신체 내부에 마력을 가두는 기법을 사용하는 기사들의 연공법 특성상 가장 전력이 보존되는 건 프레시아와 길버트일 터였다.
내 추측에 소피아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못 사용해도 내 한 몸 정도는 지킬 수 있으니 난 걱정하지 마.”
소피아는 전투 사제인 몽크가 익히는 신성 격투술을 익히고 있으니 괜찮을 거다.
검성(劍聖)과 일기당천이 종종 자세를 봐줘서 어지간한 성기사들보다 맨손 격투술에 능했다.
물론 달인이라고 할 정도는 아닐 테지만.
“유안의 말대로라면 저희 마법사들은 전력 외겠군요.”
마력 방출이 안 된다면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의 수는 극히 적어진다.
제이드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완벽하진 않더라도 숲 안에서 마법을 사용할 방법이 몇 개 있으니까.”
저 숲의 검은 안개는 아르카나가 만들어 놓은 일종의 거대한 ‘봉인’이었다.
당연히 일부러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 놓은 만큼 숲 속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수단 정도는 있었다.
나는 키득거리며 덧붙였다.
“다만 그 방법을 위해선 숲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야. 그래도 꽤나 진귀한 경험일 거야. 아마도.”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경험은 아주 짜릿할 거다.
당연히 원격 조종인 실루아의 인형병대도 다루기 까다로웠다.
“대비책은 없습니까?”
프레시아는 당연히 나라면 준비했을 거란 눈으로 바라봤다.
“당연히 없진 않지.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을 몇 개 익혀놓으면 스스로는 지킬 수 있을 거야.”
마침 음차원의 마력을 사용하는 사령술서가 내 손에 들려 있지 않은가.
나는 어젯밤에 정리해 둔 기초 사령술을 아바스엘에게 건넸다.
이거 만든다고 밤잠까지 설치며 마도서를 읽었다.
“대충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마법을 정리해 뒀어. 한 시간 정도면 익힐 수 있지?”
“사령술에 근간을 둔 공격과 방어 마법…. 숫자도 꽤 다양하군요. 10분이면 충분합니다.”
아바스엘은 오만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역시 최연소 슈프림 메이지, 천재다운 대답이었다.
마법을 익힌 제이드와 실루아, 야드도 내가 정리한 것들을 살펴봤다.
“확실히 이 정도면 어렵지 않겠습니다.”
“간단하네요!”
제이드와 실루아와 달리 야드는 세 마법사를 무슨 괴물 보듯 바라봤다.
“죄송하지만 전 한 시간 만에 전혀 모르는 학파의 마법을 익힐 수 있을 정도로 마법에 재능이 있지 않습니다.”
곤란하다는 듯이 양손을 들어 보이는 야드를 보며 나는 상큼하게 웃었다.
“아, 괜찮아. 못 하면 몸으로 때워야지.”
그 좋은 몸이 있는데 쓸데없이 머리 아플 필요는 없다.
억지로라도 머리 쓰는 일은 나같이 몸뚱이가 허약한 녀석에게나 필요할 뿐이다.
“자자, 숲에 들어갈 준비 하자고. 저 안에선 아공간을 여는 것도 평소보다 마력이 많이 들어가니 자주 사용할 것들은 빼놓고.”
나는 아공간에서 도플갱어형 인형을 꺼냈다.
이것도 원격 조종이 기본이었지만, 그래도 흑마법으로 슈프림 메이지에 오른 괴물의 마력회로를 이식한 놈이라 다른 인형에 비해 숲 안에서 조작하기 수월할 터였다.
도플갱어형 인형 외에도 나는 여러 가지 물건을 꺼내 무장했다.
“도련님, 이건 처음 보는 건데 뭔가요?”
길버트가 내 허리춤에 매단 물건을 보고 묻자 나는 싱긋 웃었다.
“아, 이거? 재미있는 거야.”
그냥 재미있는 게 아니라 아주아주 재미있는 물건이다.
별자리 미궁에 대비해 만들어 둔 물건이었지만, 아쉽게도 쓸 타이밍이 나오질 않아 사용하지 못한 물건이었다.
슬슬 숙영지를 정리하고 숲 안으로 들어갈 준비가 끝나자 나는 가장 안전할 프레시아와 길버트 옆에 붙으며 말했다.
“숲 안에는 아마 그림자 괴물들이 돌아다니고 있을 테니 주의해.”
참고로 말하자면 그림자 괴물은 아르카나가 만든 괴물이 아니었다.
랜턴에 푸르스름한 귀화가 붙으며 차가운 빛을 흩날렸다.
우리는 마녀의 숲으로 들어갔다.
* * *
가면은 쓰고 후드 망토를 온몸에 두른 ‘아르카나 09, 은둔자’, 오스먼드는 마법 지팡이 끝을 땅에 내리찍었다.
-크르르르…!
오스먼드의 마법 지팡이에서 마력 파장이 퍼져 나가자 사방을 포위하듯 으르렁거리던 검은 그림자 짐승들이 살짝 고개를 떨구며 비틀거렸다.
상태 이상에 걸린 그림자 짐승들의 달려드는 속도가 줄어들자 ‘매달린 사람’이 방어막을 펼쳐 막았다.
-커엉!
-키잉!
느려진 속도 탓에 그림자 짐승들은 숲의 마력으로 약해진 방어막도 뚫지 못해 머리를 박고 주춤했다.
그때, 자반의 손에서 길게 뻗어 나간 가늘고 튼튼한 마력사가 숲의 나무와 그림자 짐승들을 단단히 속박했다.
“어둠에서 태어난 존재여, 저주받은 짐승들이여. 그 형(形)을 흐트러뜨려라!”
위대한 의사이자 저주술의 달인인 말레콥 제프리즈의 조카이자 제자인 로우어펠 제프리즈는 해주(解呪) 술식을 자아내며 그림자 짐승들을 연기처럼 소멸시켰다.
숲을 돌아다니는 그림자 짐승들은 숲의 중앙에 위치한 어느 ‘마녀’가 숲에 풀어놓은 형체를 지닌 저주였다.
“후우… 벌써 숙부님이 그리워지네요.”
로우어펠은 얼마 전 바스타유 산맥에서 전사한 말레콥을 그리워했다.
스스로 아직 미숙하다고 여기는 그가 이런 험지에 오게 된 것도 아르카나에서 말레콥 다음가는 저주술사이기 때문이었다.
말레콥이 살아 있었다면 이런 위험한 곳에는 결코 오지 않았을 터였다.
“그거 참… 뭐라 할 말이 없네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매달린 사람’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말레콥의 죽음에는 그녀의 지분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비록 그 당시 파견된 영혼 분신은 악마의 배 속에 들어가 버려서 극히 부분적인 일밖에 체감하지 못했지만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다.
그때 오스먼드는 지친 듯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매우 피곤.”
마법 지팡이에 매달리듯 기댄 오스먼드의 팔뚝에는 귀화(鬼火)의 푸른빛이 반사되는 하얀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아르카나가 인위적으로 음차원의 마력을 가득 차게 만든 공간 속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마도구였다.
전용 마도구가 있다고는 해도, 본래 마법을 사용하던 때보다 20퍼센트 이상의 마력이 더 드는 탓에 그들은 빠르게 지쳐갔다.
“진짜 인력 지원은 없는 건가요?”
로우어펠의 물음에 ‘매달린 사람’은 애매하게 웃었다.
“글쎄,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어서 뭐라 말 못하겠네.”
‘매달린 사람’의 대답에 자반은 다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지원이 중요한 게 아니야. 빨리 안전지대로 가지 못하면 숲을 지키는 그 ‘괴물’과 마주하게 될 거다.”
항상 여유롭던 그의 목소리에서 미약한 초조함이 느껴졌다.
자반의 품속에는 귀기(鬼氣) 어린 빛을 띠는 검은 보석이 담겨 있었고, 그는 애틋하면서도 서글프게 보석을 쓰다듬었다.
“자, 빨리 움직이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