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1화. 허수아비의 기도 (2)
듀플리온 왕궁, 왕의 집무실.
“드디어 일단락된 건가.”
왕은 왕후의 신변 거취로 시작된 정쟁(政爭)이 마무리되었음에 의자에 몸을 늘어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왕후의 탄핵 투표는 벌써 몇 달 전에 끝났음에도 탄핵만 부결 났을 뿐이었다.
왕후의 유폐 이후로 왕후가 쥐고 있던 이권과 왕후의 영향 아래 있던 이권을 둘러싼 수면 아래의 아귀다툼, 그로 인한 자잘한 정치적 분쟁과 소요를 해결하는 데 몇 개월이나 걸렸다.
귀족파, 그리고 아르카나라고 불리는 정체불명의 집단을 배후로 둔 왕후는 알게 모르게 손에 쥔 것들이 많았다.
그 때문에 모든 것을 해결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감축드립니다.”
왕후가 별궁에 유폐되고 왕실 살림을 관장하게 된 상선이 고개를 숙이며 축하하자 왕은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 축하할 일이지. 덕분에 많은 이득을 봤어.”
왕후가 남긴 것들을 두고 벌이는 아귀다툼의 배후에는 왕 또한 있었다.
이번 정쟁으로 인해 많은 이권을 가져온 것은 물론, 귀족파의 몇몇 귀족들을 처리하고, 약점을 쥐기도 했다.
이권보다도 정적들의 숫자를 줄인 것이 이번 정쟁의 가장 큰 이득이라 할 수 있었다.
“적의 몸체까지 쳐낼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말이야.”
아쉽게도 왕후의 오라비이자 귀족파의 수장인 후작과 그 파벌의 핵심까지는 닿지 못했다.
“그래도 덕분에 그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비밀 조직에 대한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꼬리 자르기를 당해 그저 실마리로 남을 건지, 아니면 살살 엮어낼 수 있을지는 봐야겠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상선의 말에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을 믿네.”
“망극할 따름입니다.”
왕의 말에 상선은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추며 집무실에서 나갔다.
혼자 남은 왕은 책상 위에 놓인 공식 문서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일부러 노린 건지, 아니면 우연인 건지.”
그 문서는 1왕자 유안의 인장이 박혀 있는 공식 문서로, 왕실에서 관리하는 유적 도시 바하나드의 별자리 미궁 속 유물 관리 청사에서 보내온 문서였다.
이 문서는 유안의 생존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문서였기에 유안의 실종을 죽음으로 연관 짓는 이들에게는 좋은 반박거리였다.
왜인지는 몰라도 귀족파의 거두 몇 명이 유안을 공식적으로 사망 처리하기 위해 뒷공작을 벌이기도 했다.
“1왕자의 암살 미수 사건과 관계되어 있는 건가?”
그는 알 수 없어 미간을 좁혔다. 물론 공식 문서가 존재한다고 유안의 생존을 확신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왕자의 인장을 죽여 빼앗고 멋대로 사용할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했기에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문서의 존재로 1왕자의 죽음을 확정 지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유안의 입장에선 나중에 왕궁에 복귀했을 때 생길 여러 귀찮은 일을 막은 셈이다.
하지만 이것도 몇 년이나 유지되지는 않을 터였다.
“1왕자는 뭘 하고 있으려나.”
호레이즌과 데미웨이를 통해 바스타유 산맥에 갔다는 것도, 그리고 얼마 전 호국공의 편지로 휴양 도시에 있었다는 것도 비공식적으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왕자가 뭘 하려 하는지는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무엇을 의도하든 1왕자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알게 모르게 왕국 정계에 큰 영향을 끼쳐왔다.
왕후의 탄핵 투표는 물론, 붉은 눈의 토벌로 인해 검귀가 이끄는 북방 군단의 족쇄가 풀렸다.
게다가 1왕자와 호국공과의 밀약이라니.
머리가 아파왔다.
“가뜩이나 일이 많은데 근심거리를 늘리다니….”
전대 현자의 부고(訃告) 소식과 위즐 백작의 그림자 마탑 숙청으로 마법계가 시끄러웠다.
게다가 태양 교단이 악마 숭배자 토벌을 벌이는 와중에 남부 지역에서 대규모 흑마법 의식이 벌어졌다는 정황이 드러나 전국이 어수선해진 상황이었다.
“하아아… 배고프군.”
유안이 떠나기 전 남긴 독을 조심하라는 경고와 왕후의 유폐 이후로 먹는 것도, 마시는 것도 자제하기 때문이었다.
“호레이즌은 언제 오려나.”
가장 믿을 수 있는 측근이자 아무도 모르게 기척을 죽이고 돌아다닐 수 있는 호레이즌이 은밀하게 왕이 먹을 식량을 구해 오곤 했다.
오늘도 왕은 배가 고팠다.
* * *
나뭇잎 사이로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숲속.
밀짚모자를 쓴 허수아비는 푸른빛의 귀화(鬼火)를 담은 랜턴이 걸린 긴 지팡이를 땅에 박아 세우고, 바위에 등을 기댔다.
그러고는 경건히 낡은 오카리나를 꺼내 불었다.
밝고 경쾌한 소리가 어두운 숲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 * *
뜨거운 여름 태양이 도시를 달궜다.
검마 아나스타샤와 검선 나유타가 유적 도시를 떠난 지 이틀쯤 되었을 무렵, 나는 창가에 걸터앉아 소피아에게 물었다.
“친구가 떠나는 것 같은데 배웅 안 해도 되겠어?”
은하의 눈으로 도시 외곽을 보는데, 아멜리가 성기사와 사제들을 이끌고 도시를 벗어나고 있었다.
내 물음에 치천사의 창각으로 열심히 사도의 힘을 주무르고 있던 소피아가 소매로 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어제 인사했어.”
얘도 참 철면피다. 유적에서 나온 뒤로 절친한 친구를 속이고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만나서 놀다 오곤 했다.
신경 쓰이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뭐라고 대답했더라?
어려서부터 서로 골탕 먹이고 놀아서 그거의 연장선상이라고 했던가?
뭐, 나도 아멜리에게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그래서 ‘장난’ 수준으로 끝낸 거기도 하고 말이다.
내가 마음만 먹었다면 바다 교단의 성녀와 용병왕을 죽이는 것쯤은 어려운 일도 아니다.
별자리 미궁의 온갖 기믹과 무려 ‘검마’라는 협력자까지 있었으니까.
아나스타샤에게 그들을 죽이라고 설득하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아니, 단순히 설득하는 걸 넘어 아예 일행으로 합류시키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다만 그러기에는 귀찮아지는 일이 너무 많아져서 그러지 않았을 뿐이다.
만약 별자리 미궁에 온 게 ‘아르카나 02, 여교황’이 아니라 ‘아르카나 05, 교황’이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였겠지만, 유적에 온 게 그녀여서 다행이었다.
귀찮은 일 없이 놀이 수준으로 일을 마쳤으니까.
“자, 그럼 슬슬 우리도 떠날까?”
내 말에 유물들을 어질러 놓고 돋보기로 분석하던 세 마법사들이 분주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보게, 자네.”
“안 돼요.”
나는 내게 말을 거는 데일호르그의 말을 거절했다.
그러자 늙은 성기사는 당황해서 물었다.
“내가 뭘 말할 줄 알고 대뜸 안 된다고 말하는가?”
그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었다.
“저를 불만스럽게 보던 영감님이 진지한 표정으로 할 말이야 하나뿐이죠. 제 여정에 함께하겠다는 것 아닙니까?”
아무리 모시는 신의 신탁이 있었다고 해도 결국에는 신탁을 해석하는 건 인간이다.
신과 달리 소피아의 해석을 완전히 믿을 수 없으니, 소피아만 내게 보내는 걸 불안해할 만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 신이라는 작자들도 영 맹탕이었지만.
“…자네 말이 맞네. 나도 자네의 여정에 함께하며 아가씨를 보필하고자 부탁하려 했네.”
“응~ 거절이요~”
“어째서인가? 내 비록 신 앞에 부족한 한낱 인간이라 하나, 나름 일기당천이란 허명(虛名)을 얻은 초인이다. 자네의 여정에 도움이 되리라 자신하네.”
바퀴벌레라 불리는 성기사면서 초인인 그가 여정에 함께해 준다면 확실히 큰 도움이 될 터였다.
하지만 안 될 일이다.
“그럼 영감님이 모시는 신의 이름을 걸고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시죠.”
“뭔가?”
“저를 비롯한 일행들과 제 여정에 대해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해 주십쇼.”
내 요구에 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야 당연했다.
성녀를 지키는 호위 기사인 그는 성녀의 안전을 위해 성녀의 여로(旅路)와 주변인의 신상에 대해 총본산에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내 신상을 흘리는 건 안 될 말이다.
아직도 아르카나가 내 몸에 전승된 봉인을 노리고 있다.
가뜩이나 예언가인 수레바퀴가 걸리는데 불안 요소를 늘릴 순 없었다.
“…다른 부탁은 안 되겠나?”
데일호르그의 부탁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영감님이 할 수 있는 선택지는 총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혼자 돌아가는 것, 다른 하나는 신탁을 무시하고 소피아를 데리고 돌아가는 것.”
“난 무조건 따라갈 거야!”
소피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나는 보란 듯이 소피아를 가리키며 웃었다.
“그렇다고 하네요.”
“마지막 하나는 뭔가?”
늙은 성기사의 물음에 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여기서 제압당한 뒤 한 보름쯤 잠들어 있다 깨어나는 것?”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일행들이 마력을 끌어올리며 데일호르그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그 선두에는 소피아가 있었다.
그녀의 두 주먹에는 선명한 신성력 오라가 맺히며 흩날렸다.
“…자네, 성격 나쁘군. 사실상 선택지가 하나뿐이지 않은가.”
독실한 성직자인 그에게 신탁을 무시하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보름쯤 잠들었다 깨어나는 것도 혼자 돌아가야 하는 것과 매한가지니, 그의 말대로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뭐, 어떱니까? 성녀가 교단 측 인사와 함께 움직이지 않고 여행을 다닌 사례는 꽤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 사례들 모두 가출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나?”
그의 되물음에 나는 너스레를 떨었다.
“오, 그렇습니까? 그래도 다행이군요. 이번에는 무려 ‘허락’까지 받고 떠나는 거잖습니까.”
신이 허락했는데 감히 교황 따위가 반대할 리 없지 않은가.
교황이 신보다 높아? 꼬우면 교황이 신 하든가.
“끄응…!”
데일호르그는 할 말이 없는지 앓는 소리를 냈다. 나는 그런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걱정 마시죠. 그래도 꾸준히 생존 신고는 해드릴 테니까.”
성수도 계속 사용하다 보면 다 떨어질 텐데 꾸준히 수급은 해줘야지 않겠나. 성녀가 있다고 성수가 필요 없는 건 아니었다.
대마법사라고 마석 필요 없다고 말하는 마법사 없듯이 성직자도 성수가 필요했다.
물론 성녀가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도 있지만, 가내 수공업보다는 역시 공장으로 돌리는 게 더 빠르고 양도 많지 않은가.
여행 다니며 짬짬이 만드는 것보다는 성소(聖所)에서 찍어내는 게 효율 면에서 압도적이다.
“왠지 시선이 불손하다.”
“하하하하! 기분 탓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먼저 가시죠. 괜히 몰래 뒤쫓아 올 생각하지 마시고.”
내 말에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늙은 성기사는 날 노려보았다.
“아가씨께 무슨 일이 생기면 널 죽이겠다.”
“네네, 그러시든가요.”
내 대수롭지 않은 반응에 그는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부디 무사하셔야 합니다.”
“걱정도 많으셔라. 일행들을 보세요, 얼마나 든든해요.”
소피아는 끝까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질척거리는 늙은 성기사를 내보냈다.
“하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가씨께 풍요로운 대지의 가호가 함께하시길.”
“아저씨도 풍요로운 대지가 함께하시길. 할아버지랑 검성 아저씨께 말씀 잘해주세요.”
“허흐흑!”
소피아의 부탁에 떠나가는 늙은 성기사의 어깨가 축 처졌다. 돌아가면 잔소리 엄청 듣겠구만.
데일호르그가 완전히 떠나는 걸 확인한 나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우리도 떠나자.”
“아, 잠시만요.”
그때 제이드가 내 말에 제동을 걸고 끔찍한 철제 구조물을 꺼냈다.
“이동하면서 하기에는 아직 불안 요소가 있으니 하고 가죠. 마력회로 개발.”
제이드의 말에 아바스엘과 야드가 내 양팔을 붙잡았다.
“자, 잠깐! 난 아직 준비가!”
“안 됩니다~! 열심히 만들었는데, 성능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아바스엘과 제이드의 눈이 광기 어린 미치광이 마법사처럼 번들거렸다.
철컥! 차르르륵-!
“으아아아아-!!”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