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화. 사기꾼과 성녀와 사기꾼 성녀 (8)
“그건….”
소피아의 부탁에 아멜리는 머뭇거렸다.
성신패는 함부로 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러나 성신패를 주지 않기에는 이미 과(過)를 신의 이름으로 모두 용서하겠다고 맹세해 버려서 지난 잘못을 따져 상쇄하자고 하지도 못했다.
게다가 앞서서 대지 교단 소속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약간의 죄책감을 유발하며, 수틀리면 아멜리가 아닌 대지 교단의 성녀에게 넘기겠다는 가능성을 가정하게 만들었다.
그 대지 교단의 성녀가 본인이었지만 말이다.
역시 종교쟁이는 종교쟁이가 상대해야 하는구나.
나였다면 결코 사용하지 못할 방법이었다.
내가 생각 못 해서는 아니었고, 아멜리가 내게 직접 뒤통수를 맞고 나라는 개인에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딜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탓이다.
반면 소피아는 신실한 성직자로서 내 뒤통수를 쳤다는 기믹으로 접근하니 충분히 호감을 살 수 있었고.
고민하던 아멜리는 여전히 굳어 있는 내 얼굴을 보고는 별수 없다는 듯이 안주머니에서 바다 교단의 성신패를 꺼냈다.
그때 내가 말했다.
“어쩔 수 없군요. 피보안느가 저리 강경하게 나서니 제가 양보하는 수밖에요. 대신 저 괴물의 마력 결정도 저희가 가지고 싶습니다. 그래야 저희도 위에 할 말이 있지 않겠습니까.”
“흐응~ 제 목표를 대신 이루어서 저에게 준다는 말은 역시 거짓말이었나 보죠?”
그녀가 꼬투리를 잡자 나는 웃어넘겼다.
“아하하하,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저 제가 위로 보내면 상부에서 성녀님께 전달할 계획이었습니다.”
내가 속한 파벌을 통해 아멜리에게 빚을 만들고 전달할 생각이었다는 의미였다.
그 빚은 성신패보더 훨씬 값비싸게 치러야 하리라는 건 명백했다.
내가 진짜 아르카나 소속이었다면 말이다.
내 말에 아멜리는 그럼 그렇지라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쯧쯧, 저렇게 순진해서야 원.
물론 각 잡고 속이는 내가 할 말은 아니었지만.
“싫다면요?”
괜히 떠보는 그녀에게 나는 바다 교단의 허가증을 꺼냈다.
“그럼 이것과 교환하는 건 어떻습니까?”
허가증을 본 아멜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다, 다, 다, 당신!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걸 믿었습니까?”
내가 놀란 척 놀리듯 묻자 그녀의 얼굴이 잘 익은 홍시처럼 새빨개졌다.
분노와 수치, 그리고 배신감에 할 말을 잃고 뻐끔거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속삭였다.
“기껏 바다 교단의 대주교님과 거래해서 몰래 빼내 주셨는데 성녀님께서 기어코 안으로 들어오시니 결국에는 의미가 없었군요.”
나는 허가증 도난 사건의 범인을 대주교에게 뒤집어씌웠다.
어스름 상회와 괜히 척질 일을 만드는 것보다는 깔끔하게 부패한 성직자 하나의 모가지로 끝내는 게 깔끔하고 좋지 않은가.
“…당신들도 별자리 미궁에서 나가려면 그 허가증이 필요할 텐데요?”
의심 가득한 그녀의 물음에 나는 반쯤 망가진 인형을 가리켰다.
“다행히도 반절은 인형이라 방위 마법이 작동하지 않아서 괜찮습니다.”
“인형… 그렇군요.”
이를 악무는 아멜리는 내 배후 파벌의 정체를 짐작한 듯 타오르는 눈빛으로 날 노려봤다.
그녀가 생각하는 파벌이라면 ‘아르카나 01, 마술사’의 파벌일 것이다.
마술사의 휘하에는 ‘아르카나 16, 탑’ 퍼펫 마스터 니벨이 있었으니까.
“알겠습니다. 마력 결정은 포기하죠. 그럼 이 구슬을 제 것이죠?”
“그렇습니다.”
아멜리는 순수하게 펜릴을 포기하며 유적 출입 허가증과 한 쌍의 구슬을 챙겼다.
“그럼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또 뵙죠.”
내 인사에 아멜리는 혀를 삐죽 내밀었다.
“베~! 당신이 내 사람이 된다면 모를까, 싫거든요!”
내가 다른 파벌 사람이라고 생각하고는 저렇게 삐죽거리는 건가? 귀엽구만.
로툴러스는 용병답게 아멜리의 선택에 아무 말 없이 따랐고, 바다 교단은 목표를 이루고 먼저 별자리 미궁 밖으로 향했다.
아이젤 탐험단도 바다 교단처럼 밖으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안으로 안 들어가시고 나가시는 건가요?”
내 물음에 탐험단의 부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정보다 훨씬 이르긴 하지만 얻은 바가 적지 않으니까. 덕분에 왕묘에서 많은 걸 얻은 데다 바다 교단과 연줄도 만들게 되었으니,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사례하지.”
“이야~!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야겠군요.”
내 말에 델레브헴은 껄껄 웃으며 자신의 이름이 적힌 아이젤 탐험단의 명패를 건넸다.
“성신패같이 좋은 물건은 아니지만, 나중에 탐험단 본부에 방문했을 때 내가 없어도 문전박대하진 않을 거다.”
“감사히 받도록 하죠.”
나중에 아이젤과 엮일 일이 있으면 나쁘지 않게 써먹을 수 있겠다.
* * *
바다 교단과 아이젤 탐험단을 떠나보내고 천천히 왕관자리 구역을 떠난 우리는 유적 입구 근방인 작은곰자리 구역에 도착했다.
오는 동안 당연히 유적의 괴물들은 아나스타샤와 나유타가 처리했다.
허가증 없이 들어온 두 사람이지만 대지 교단의 허가증에 등록한 덕분에 방위 마법이 작동하지 않았다.
펜릴은 당연히 인형들이 밧줄에 묶어 질질 끌고 여기까지 왔다.
일반적인 짐승이었으면 가죽이 상할 테니 못 할 짓이었지만 초인의 검강(劍綱)에도 간신히 흠집만 나는 괴물의 몸뚱이가 땅에 쓸린다고 상할 리가 없었다.
“자, 이쯤에서 이거 해체하자.”
내가 펜릴의 해체를 지시하자 아바스엘은 마법으로 아나스타샤가 낸 구멍에서 능숙하게 피를 뽑아내며 물었다.
“주군, 이거 그냥 가만히 놔두면 소멸할 텐데 굳이 해체해야 하는 겁니까?”
나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며 왕묘에서 나온 마법서들을 은하에게 기억시켰다.
“그건 안 사라져. 유적이 만들어 낸 가짜가 아니라 유적이 만들어지며 섞여 들어온 진짜 신화시대의 신수거든. 말하자면 유물과 같은 놈이지.”
내 말에 다들 놀라서 날 바라봤다. 심지어 서로 신경전을 벌이던 아나스타샤와 나유타까지 고개를 돌려 날 봤다.
“…이게 진짜라고요?”
“당연하지. 아무리 이 별자리 미궁이 대단한 유적이라지만, 천하십검이 두 사람이나 있는데 여유롭게 잡지 못할 괴물까지 구현할 정도는 아니거든.”
소설에선 펜릴 말고 미궁 최심부에 펜릴과 비슷한 신화시대의 괴물들이 몇 마리 더 있다는 떡밥이 있긴 했는데, 결국 어디에 있다는 정보는 없었다.
알고 있었으면 검마와 검선이 함께 움직이는 김에 사냥하는 건데 말이다. 아쉽게 됐다.
“그럼 바다 교단의 성녀는?”
“멍청하게 포기한 거지.”
펜릴의 부산물은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 입장에선 치천사의 창각에 비하면 펜릴의 마력 결정 따위 별것 아닌 물건이었겠지만 실물이라면 말이 다르다.
치천사의 창각과 펜릴의 부산물은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보물이었다.
아, 그래도 그녀 입장에서는 치천사의 창각이 더 값진 보물이겠구나.
눈앞의 괴물이 실재한다는 걸 깨달은 실루아와 제이드, 아바스엘은 눈이 벌게져서 열심히 해체하기 시작했다.
“프레시아 경! 조심해서 잘라야 한다! 털 한 올, 피 한 방울 놓칠 수 없다!”
“뽑아낸 피는 최대 마력으로 단숨에 얼리겠습니다!”
“마석! 마석! 와~! 신수의 마석!”
프레시아와 데일호르그는 무서운 기세로 닦달하는 세 마법사의 요구에 진땀을 빼며 검강으로 펜릴 가죽을 벗겼다.
“크흠! 소년, 우리도 저거 잡는다고 나름 고생했는데, 뭐 없나?”
나유타가 은근슬쩍 물었고 아나스타샤도 관심이 가는지 말없이 다가와 고개를 끄덕였다.
“송곳니로 만든 검 한 자루라도 맞춰드려요?”
내 물음에 두 사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검은 애검이 있으니 괜찮고….”
“가죽 망토.”
“그래! 가죽 망토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두 사람은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죽이 잘 맞았다.
펜릴의 가죽을 무두질해 망토를 만들면 내 ‘비델의 갑옷’에 견줄 만한 방어구가 될 터였다.
나는 두 사람의 부탁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뭐. 지인 중에 가공을 할 줄 알 만한 난쟁이 장인이 있으니 연락 방법을 주시면 만들어서 보내 드릴게요.”
두 사람이라도 펜릴의 가죽을 가공할 장인을 구하는 건 쉽지 않을 거다.
벨트라면 충분히 가공이 가능할 거다.
아니면 전대 검장인 비플레이오드 일족의 족장과 장로들까지 달라붙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쯤이면 내 영지에 모여 미스릴 광맥을 찾았겠군.
내 실종이 길어져 사망 처리되었을 경우, 영주 자격이 소멸하기 때문에 슬슬 생존 신고를 하는 겸 아바스엘이 유물 관리 청사에 내 명의의 명령서를 들이밀고 강탈, 아니 협조를 구했었다.
덕분에 어린 흡혈목을 구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었지.
잡생각을 하고 있는데 가죽 망토를 만들어 준다는 내 말에 나유타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와아! 정말이지?!”
기뻐하는 나유타를 향해 나는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아, 대신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뭔데?”
“하나는 제가 있는 데서는 서로 싸우지 말 것, 다른 하나는 제 호위 기사들에게 가르침 좀 내려주십쇼.”
프레시아는 대련 정도면 되겠지만 길버트는 아직 한참 배워야 했다.
“으음, 가르치는 거야 흔쾌히 하겠지만 싸우는 건….”
나유타가 망설이자 나는 한 가지 조건을 더 붙였다.
“대신 제가 알고 있는 마검에 대한 정보를 하나 넘겨드리죠.”
“좋다.”
아나스타샤가 바로 즉답하자 나유타는 버럭 소리쳤다.
“야! 장난해?!”
화를 내는 그녀를 보며 나는 싱긋 웃었다.
“왜요? 정보를 알면 선수 칠 수 있잖아요. 제가 알고 있는 마검 위치는 하나같이 얻기 힘든 곳에 있거든요.”
그리고 하나같이 막대한 인명 피해를 발생시키는 재앙의 씨앗이었다.
“그리고 언제까지 뒤만 좇아서는 평생 못 막을걸요? 앞서나가야죠.”
내 말에 나유타는 솔깃했는지 잠시 고민하더니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좋아! 그럼 그렇게 하지!”
반면 아나스타샤는 못마땅한지 날 지긋이 바라보며 무표정한 얼굴에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한 0.1밀리미터 정도?
계속 보다 보니 어느 정도 감정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주군, 펜릴의 해체가 완료됐습니다.”
마침 펜릴의 해체가 완료되었다. 피는 소분되어 급속 냉각되었고, 가죽은 벗겨 마법으로 뒤틀림이 생기지 않게 고르게 말렸다. 뼈와 근육, 각종 내장과 살도 분리해 가방에 담았다.
“유안! 신선도가 떨어지기 전에 빨리 밖으로 나가 보관 처리하고 싶습니다!”
“빨리 나가요! 유안 오빠!”
세 마법사의 닦달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가자.”
밖에 나가면 아공간에 보관할 수 있으니 별도 처리가 필요한 내장류 외에는 바로 아공간에 집어넣기로 하자.
나는 밖으로 향하며 소피아에게 물었다.
“아, 궁금한 게 있는데 바다 교단의 성녀에게 준 그 ‘가짜 구슬’은 어떻게 구한 거야?”
아멜리가 그래도 성녀인데 그녀의 눈을 속일 정도라니,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내 물음에 소피아는 악동같이 웃으며 가방에서 치천사의 창각과 사도의 기운을 가득 담은 마수정을 꺼냈다.
“이 방울을 사용해 봤지.”
평범한 구슬에 사도의 기운을 잘게 나눠 담았다는 소리였다.
저 방대한 사도의 힘을 세밀하게 조종하려면 치천사의 창각의 능력이 필수였다.
“푸하하핫! 친구를 등쳐먹다니 이런 악당을 봤나!”
진심으로 감탄하자 소피아는 낄낄거렸다.
“그치만 아무리 친구라도 이런 탐나는 보물을 그냥 넘겨줄 수는 없잖아?”
나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동료가 된 걸 환영해.”
소피아는 내 손을 마주 잡으며 한쪽 눈을 깜박였다.
“날 받아준 걸 후회하지 않게 해줄게.”
그렇게 나는 사기꾼, 아니 대지 교단의 성녀 소피아를 진심으로 동료로 받아들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