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사기꾼과 성녀와 사기꾼 성녀 (7)
“피해가 없다니요?”
아멜리는 로툴러스와 중상을 입은 성기사를 치료하며 미간을 좁혔다.
“지금 환자가 몇이나 되는데 그런 말이 나와요? 아~ 당신 일행들은 피해가 거의 없어서 그런 말을 하신 건가?”
따지듯 묻는 그녀의 말에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사망자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위대한 성녀님께서 계시는데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실제로 로툴러스와 성기사의 치료를 끝낸 그녀는 곧바로 신성력으로 탈진한 이들을 북돋아 주고 아이젤 탐험단의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숨 쉬듯 자연스러운 치료에 과연 성녀는 성녀구나 싶었다.
부패한 사제들에게서 신성력을 강탈하며 키운 신성력의 크기가 장난 아니었다.
나는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는데, 내 물음이 도발처럼 느껴졌는지 아멜리는 나를 노려봤다.
“당신, 일부러 용병왕 님과 저희 교단을 저 괴물의 정면에 세웠죠?”
“하하하, 오해입니다. 저는 그저 최적의 인선을 골랐을 뿐입니다.”
“최적이요?”
그녀는 불신의 시선으로 날 바라봤다. 너무하구만.
“그럼요. 밧줄로 저 괴물을 억제해야 했는데 다리는 마법으로 계속 공격하느라 쉽지 않고, 결국 목에 걸어야 하는데, 그럼 정면에서 상대해야지 않습니까. 그리고 용병왕께서 성녀님의 일행이시니 함께 움직이는 게 더 편하시지 않았겠습니까?”
성기사들과 로툴러스를 따로 떨어트리고 싸우는 틈에 용병왕을 처리할 수도 있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와 노련한 앵무새 수인은 내가 입에 담지 않은 말을 짐작했는지 인상을 썼다.
“아, 여러분들은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제 동료들이 했어도 괜찮지 않았냐는 말씀은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내 지적에 아멜리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 지적을 하려 했던 모양이구만.
“그리고 솔직히 사제분들과 성녀님의 보조를 받은 정예 중의 정예이신 성기사분들이 아니었으면 목줄을 죄는 건 불가능했을 거란 계산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워낙 강하시지 않습니까.”
내 말에 성기사들은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기분이 좋아 보였다.
“크흠! 저희 성기사분들이 강하긴 하죠. 그래도 갑자기 저런 괴물을 달고 오는 게 정상이란 소린 아니에요. 저 괴물로 저희를 공격하려 한 건 아닌가요?”
아멜리의 정론에 나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오해십니다. 제 목표는 유적 초입의 방위 마법으로 저 괴물을 죽이는 것이었지, 일부러 성녀님이 있는 곳으로 끌고 온 게 아닙니다.”
거짓말이다. 일부러 아멜리와 검선에게 묻혀둔 정령의 표식을 따라 움직였다.
그녀라면 분명 아나스타샤와 마검의 기척을 추적해 왕관자리로 온 나유타를 포섭하려 했을 거라 판단했다.
물론 아직도 왕관자리에서 미적거리고 있을 줄은 예상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아마 날 뒤쫓아 잡기 힘들 거라 생각하고 내가 돌아오는 길을 매복할 생각이었겠지. 꽤 현명한 전략이었다.
검마는 유적을 나가기 전에 마검을 먹고 싶어 했을 테니 안전지대를 거칠 거라 판단했다는 의미였고. 꽤 정확했다.
펜릴만 안 쫓아왔다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
“아, 물론 나유타 씨를 보자마자 이곳에서 차륜전을 펼치면 큰 위험은 없겠다고 판단해 계획을 다소 바꾼 것은 사실입니다. 허나 믿어 주십시오. 저는 결코 성녀님을 다치게 할 생각은 결코 없었습니다.”
내 선량한 눈빛에 아이젤 탐헌단의 부단장 델레브헴이 동조했다.
“이안 씨라면 분명 그럴 겁니다, 성녀님. 그의 신앙심은 진짜입니다.”
캬아~! 그를 속여두길 잘했다. 역시 보험은 들어두고 볼 일이라니까.
아멜리는 순간적으로 델리브헴을 귀찮은 방해꾼처럼 보다 온화한 표정을 지었다.
“호호호, 그렇군요. 그러고 보면 부단장님이 말하기로는 제 대신 목표를 이루기 위해 미궁 깊숙이 들어간다고 하던데, 참 신앙심이 깊으시군요.”
날이 서 있는 그녀의 목소리에 나는 곁눈질로 바다 교단의 성직자들을 훑으며 견적을 짜봤다.
아멜리의 신성력 치료를 받았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지친 상태였다.
신성력은 상처를 봉합하고 치유하는 힘을 지녔다고는 해도 시간을 되돌리듯 부상이나 탈진을 없었던 일로 만들지는 못했다.
그저 회복하는 시간을 단축해 줄 뿐이다.
음, 그래도 로툴러스는 어느 정도 전투도 가능할 정도로 회복한 듯하군.
바다 교단의 전력 중 가장 중요해서 특별히 신성력을 쏟아 부은 건지, 초인 자체의 자연 치유력이 뒷받침 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검마 아나스타샤와 검선 나유타도 펜릴과 싸우고 난 뒤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소강상태인 것 같고.
나는 대충 견적을 마치고는 싱긋 웃었다.
“물론 그렇습니다. 성녀님께서 드디어 제 마음을 알아주시는군요.”
내 대답에 아멜리의 표정이 순간 썩어 들었지만 빠르게 평온을 가장했다.
“호호호, 그래서 …당신은 제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말이군요?”
왠지 날 사기꾼이라 부르려다 당신으로 바꾼 것 같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글쎄요. 사실 성녀님의 안전을 위해 움직였던 바라 정확하게는 모르고 있습니다.”
“호오! 그런데도 감히, 크흠! 저를 위해 움직이신다고 자신하시는 거군요?”
아멜리는 하나둘씩 깨어나는 아이젤 탐험단의 눈을 의식했다.
“하하하하, 그야….”
내가 적당히 받아치려는데 소피아가 나를 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목소리를 변조시켜 달라는 거군.
나비의 힘으로 소피아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살짝 바꾸게 한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오호호호, 그야 정확하게 모를 뿐, 어느 정도는 유추하고 있답니다.”
소피아의 미성에 피치가 살짝 내려가며 중성적인 목소리가 나왔다.
은하의 힘으로 얼굴과 키도 바꾼 덕분에 아멜리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를 알아보지 못했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아멜리의 물음에 소피아는 성호를 그으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대지의 축복이 있기를. 풍요로운 대지의 종, ‘피보안느’가 바다 교단의 성녀님을 배알합니다."
격식을 차린 종교식 인사에 아멜리도 성호를 그으며 인사를 받아줬다.
“바다의 은총이 있기를. 은혜로운 바다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는 딸, 아멜리라고 합니다.”
나를 대하는 것과 달리 가식이 아니라 진짜로 온화한 표정을 짓는 걸 보면 성직자라고 차별하고 있었다.
너무하네.
“그런데 제 목적을 유추할 수 있다고요?”
아멜리의 물음에 소피아는 마치 성녀같이 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아, 맞다. 재도 성녀였지. 대화를 하다 보면 종종 잊게 돼서 말이지.
“성녀님께선 혹시 목동자리 구역에 볼일이 있지 않습니까?”
소피아의 능청스러운 물음에 아멜리가 놀랐다.
“그걸 어떻게 알았죠?”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는 알아도, 목표물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는 소피아는 자연스럽게 날 바라봤다.
나도 그에 맞춰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그야 저희도 같은 ‘운명’을 믿고 걸어가는 이들이니 귀동냥을 했을 뿐입니다.”
아멜리는 ‘운명’이라는 말에 반응했다.
“…당신도?”
“모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운명이란 워낙 넓고 방대하며, 때로는 제멋대로 굴기도 하는 법이죠.”
내 말에 아무것도 모르는 소피아는 깊이 공감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연덕스러운 연기에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든 걸 안다는 듯이 굴다니, 진짜배기 종교쟁이는 달라도 크게 달랐다.
내가 은연중 아르카나 소속이란 것을 언급하자 아멜리는 놀라는 한편 혼란스러운 듯 로툴러스를 바라봤다.
혼란스러운 건 그도 마찬가지인 듯 아멜리를 바라봤다.
서로를 바라봐 봤자 나오는 답은 없었다.
그때 소피아가 기도하듯 경건한 태도로 말했다.
“‘어머니 사도가 가로되, 길을 걷는 행인의 걸음걸이는 중요치 않나니, 그 걸음이 향하는 바를 볼지어다. 하니 군중은 그제야 절름발이의 행로를 궁금히 여기노라.’ 사실 ‘어떻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째서’인 법이죠.”
“…옳은 말씀이시나, 결국 이렇게 한 이유가 선하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실제로도 저희는 목동자리 구역까지 다녀왔습니다. 그저 예기치 못한 사고로 목양견에게 쫓겨 급히 달려왔을 뿐이죠.”
소피아의 말에 아멜리는 축 늘어진 펜릴의 사체를 돌아봤다.
“그럼 저게 설마 산사태양들을 지킨다는 전설의 신수?”
그녀의 시선이 펜릴의 목덜미로 향했다. 아마도 아르카나에 있는 기록과 수레바퀴의 예언을 떠올리며 치천사의 창각을 찾는 거겠지.
그러나 펜릴이 차고 있던 개 목줄은 이미 저기 구석에서 망연한 얼굴로 소피아를 바라보는 늙은 성기사가 진작 끊어버렸다.
거참, 성녀가 성녀를 상대로 사기 좀 칠 수 있지. 뭘 저렇게 퇴직금을 떡락 하는 주식에 꼬라박아 노후를 망친 탓에 신세 한탄하는 노인네처럼 죽상을 하고 있대?
“그렇습니다. 저 괴물이 바로 전설의 신수죠. 성녀께서는 목장을 지켜야 할 저 신수가 왜 저희를 죽어라 쫓아왔다고 생각하시나요?”
“…소중한 것을 빼앗아서! 맞죠? 당신은 저 신수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뺏은 거죠!”
아멜리는 흥분해서 내 멱살을 붙잡으며 물었다.
그녀의 뒤로 보이는 소피아가 눈짓으로 자신에게 끝까지 맡겨달라고 말했다.
무슨 생각일까? 일단 재미있을 것 같으니 그냥 둬볼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성녀님께서 찾는 목표가 바로 이것 아니십니까?”
소피아는 품 안에서 한 쌍의 구슬을 꺼냈다. 구슬에서는 무언가 신성스러우면서도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아멜리는 그 두 개의 구슬을 보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맞는 것 같군요. 아니, 맞아요.”
그녀의 눈동자는 탐욕으로 빛나다가 이내 진정한 듯 깊은 눈동자로 나와 소피아를 바라봤다.
“어렵게 얻은 보물을 이렇게 내보인다는 것은 원하시는 바가 있다는 말이겠죠? 무엇을 원하시나요?”
계산이 빠른 그녀는 우리가 아르카나의 일원이라는 말과 소피아가 순순히 그녀가 노리는 보물을 내보인 이유를 추론해 물었다.
소피아는 어쩔 거냐고 묻듯 날 바라봤고, 나는 네 마음대로 하라고 눈짓했다.
“이러한 보물은 응당 고귀하신 성녀님께 기쁘게 바치는 게 옳은 일임을 알지만, 성녀님께서 이 부족한 소녀를 그리 가엾이 여겨 주신다면 몇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나는 일부러 배신을 당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 표정을 본 아멜리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말해보세요. 무리한 부탁이 아니라면 들어드리겠습니다.”
“우선 성녀님을 위해서였다고는 하나, 성녀님께 죄를 지었으니 저희를 용서하여 주시고 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소피아의 부탁에 아멜리는 날 보며 살짝 망설이더니 마음에 안 드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하겠습니다. 은혜로운 바다께 맹세코 그대들의 죄를 용서하겠습니다.”
음, 이걸로 도망치듯 도시를 벗어날 일은 없겠구만.
“또 있습니까?”
아멜리의 물음에 소피아는 살짝 애처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는 대지 교단의 사제입니다.”
소피아의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아멜리는 바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이 보물의 값에 걸맞은 금액을 대지 교단에 헌금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혹시 감히 청컨대, 저희의 공을 생각하여 성신패(聖信牌)를 내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성신패는 말하자면 바다 교단의 귀빈(貴賓)을 나타내는 신분패로, 내보인다면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게다가 필요하다면 성신패를 반납하는 조건으로 바다 교단은 그에 걸맞은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물건이었다.
소피아, 친구를 제대로 뜯어먹으려고 작정했구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