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6화. 사기꾼과 성녀와 사기꾼 성녀 (6)
“메에에에에~!”
산사태양은 우렁차게 외치며 왕관자리 구역 문을 박살 내듯 열어 재끼고 들어섰다.
“주군! 양이 형상을 오래 유지하지 못할 듯합니다!”
아바스엘의 외침대로 산사태양의 몸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유적에 의해 구현된 가짜는 해당 구역을 벗어나면서 조금씩 그 힘을 잃기에 어쩔 수 없었다.
비유하자면 동영상을 재생하는데 각 구역마다 코덱이 바뀌는 것과 같았다.
이렇게 소멸하면 마력 결정도 얻지 못했다.
구역을 벗어나고도 움직일 수 있는 이유가 마력 결정의 마력을 사용한 덕분이었다.
“괜찮아. 덕분에 목적지까지 잘 도착했잖아. 장하다. 조금만 더 버티자, 버스 4호.”
“메에에에~!”
내가 산사태양의 머리를 쓰다듬자 양은 기분 좋은 듯 울었다. 보다 보니 귀엽구만.
데려다 키울 방법이 없는 게 아쉬웠다.
“커억!”
“어억!”
그 울음소리에 견디지 못한 아이젤 탐험단의 몇몇 단원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긴 했지만 말이다.
저렇게 몸이 허약해서야 밥 빌어먹고 살겠나.
그래도 다행히 산사태양의 힘이 줄어든 만큼 죽은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계속 산사태양 위에 앉아 있었고 인형과 일행들은 양에서 내렸다.
“이야~! 이렇게 또 보는군요. 잘들 지냈습니까?”
내 능청스러운 인사에 아멜리와 그녀를 보필하는 성직자들은 어이없다는 듯이 날 바라봤다.
“너…!”
아멜리는 내 인사에 뭐라고 하려 했지만 검선 나유타가 먼저 나섰다.
“하하하하! 이렇게 또 보는구나, 소년.”
“또 뵙는군요, 나유타 씨.”
“바다 교단의 성녀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땐 혹시나 했는데 역시 소년이었군. 꽤나 악동이야.”
나유타의 인사에 아멜리와 로툴러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보아하니 나와 안면이 있는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내게 인사를 한 나유타의 시선은 바로 아나스타샤에게로 향했다.
“오랜만이야, 아나스타샤.”
“…오랜만이다. 나유타.”
걱정 어린 눈으로 아나스타샤를 본 나유타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못 본 사이에 또 마검을 잔뜩 처먹고 다녔나 보네. 이기적인 씨X년.”
“걱정을 끼친 점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아나스타샤의 사과에 나유타는 으르렁거렸다.
“걱정을 끼친다는 사실을 알면 그 지랄을 떨지 말던가! 이 X같은 년아!”
“내가 지옥에 가지 않는다면 누가 가리.”
“염병 떨지 말고 검이나 뽑아. 사지를 잘라서 얌전해질 때까지 골방에 처박아 버릴 테니까.”
깊은 빡침을 느낀 나유타가 검을 뽑자 아나스타샤도 자신의 애검을 뽑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나는 손뼉을 쳐 두 사람의 주의를 끌었다.
“서로를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은 잘 알겠습니다.”
“애틋하긴! 염병!”
“…옳지 못한 표현이다, 소년.”
나는 두 사람의 반발을 깔끔히 무시하며 내 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서 말이죠. 잠시 힘을 합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아나스타샤는 동의하며 침묵했고 나유타는 인상을 구겼다.
“무슨 개소리….”
“아우우우우-!”
개소리가 울려 퍼지며 목동자리 구역의 목양견 펜릴이 강림했다.
“이야~! 저 질긴 놈이 계속 따라오지 뭡니까. 이대로는 미궁 밖의 민간인들도 피해를 볼 테니 일단 함께 해치우고 나서 생각하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힘든 건 나누면 반이 된다고들 하지 않은가.
그러니 이 자리에 있는 모두 내 힘든 일을 함께 나눠 가져야겠어.
싫다고? 싫으면 알아서 살아남아 보든가.
“크르르르르!”
자신의 애장품을 도난당한 펜릴은 모든 것을 찢어발길 기세로 살기를 내뿜었다.
살기에 허약한 아이젤 탐험단원들 중 반절이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나 참, 연약한 나도 버티는 살기를 견디지 못하다니. 은퇴해야 하는 거 아닌가?
로툴러스는 검을 뽑으며 경악했다.
“저 괴물은 뭐야?!”
그뿐만 아니라 펜릴을 처음 마주하는 모두가 질겁했다.
“이 미궁엔 저런 괴물도 살고 있는 건가?!”
나는 경악하는 로툴러스의 뒤로 산사태양을 움직이며 외쳤다.
“자자! 빨리 쓰러트립시다! 아나스타샤 씨! 계속 견제하며 움직이면서 왼쪽 측면 5번 늑골을 노려주세요! 나유타 씨는 뒤에서 견제해 주시고요! 힘을 아끼세요!”
큰 피해 없이 잡으려면 힘을 합쳐야 한다는 걸 느낀 듯 나유타는 내 지시에 재빨리 움직였다.
두 사람이 움직이자 나는 바로 다음 지시를 내렸다.
“용병왕은 정면! 영감님은 오른쪽에서 주의를 끌어주세요!”
“쳇! 알겠다!”
데일호르그는 혀를 차면서도 펜릴에게 검기를 날리며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뭐?! 내가 왜, 으앗!”
반면 내 갑작스러운 지시에 따지려던 로툴러스는 갑자기 달려드는 펜릴에 놀라 강기를 두른 검을 휘둘렀다.
캉!
산도 무너트릴 힘을 지닌 검격에도 펜릴의 질긴 가죽에 가벼운 흠집만 날 뿐이었다.
펜릴이 노리고 있는 건 로툴러스가 아니라 산사태양을 타고 있는 나였지만, 그런 상황을 파악하기엔 펜릴의 이빨이 너무 위협적이었다.
“이 개새끼가!”
로툴러스가 살기 위해 전력으로 싸우면서 펜릴의 시선을 피해 움직일 때마다 나는 그의 뒤로 움직이며 피리 소리로 시선을 끌었다. 어딜 내빼려고.
“전투 사제들! 용병왕에게 전력으로 가호를! 성기사들은 용병왕 뒤에서 백업하며 결계로 용병왕을 지켜주세요! 정면의 용병왕이 무너지면 전체가 휩쓸립니다!”
콰아아아-!
펜릴이 로툴러스, 정확하게는 날 노리고 입에서 폭풍 같은 숨결을 내뱉었다.
로툴러스가 살벌하게 공격당하자 사제들과 성기사들은 로툴러스를 지키기 위해 내 말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나도 성기사들의 결계에 보호받았다.
갑작스러운 지시였는데도 우왕좌왕하지 않고 안 따르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파악한 모양이다.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게 과연 바다 교단의 정예다웠다.
“으아아아아!!”
성기사들의 결계로 브레스를 막아내자 온갖 버프로 강화된 용병왕은 힘껏 뛰어오르며 십여 미터에 달하는 검강을 내리쳤다.
사제들의 힘을 받았다기엔 너무 강했다.
아, 그렇군. 아멜리가 신성력으로 보조하고 있는 거구나.
공격 마법은 광역기라 못 사용하지만, 보조 마법은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을 테니 다행이었다.
펜릴은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나유타가 검강으로 강하게 뒷다리를 후려쳐 물러나지 못하도록 막았다.
나유타의 검강에 뒷다리가 베이며 큰 자상을 입은 펜릴은 포위하고 있는 네 명의 초인 중 가장 약한 데일호르그가 있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로툴러스의 검강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양을 타고 있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똑똑한 멍멍이답게 방울을 훔친 도둑의 우두머리가 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독한 새끼.
“‘제이’, ‘엘’! 집요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다리만 노려! ‘프렛’, 영감님을 도와서 오른쪽 측면을 견제해!”
나는 제이드와 아바스엘, 프레시아의 가명을 부르며 지시했다.
펜릴이 도망치면 귀찮아진다.
사제와 성기사들의 보조를 받는 로툴러스보다 데일호르그 혼자 견제하는 오른쪽이 부실해 프레시아를 보조로 붙였다.
“알겠습니다!”
제이드가 펜릴의 종아리를 얼려 움직임을 멈추면 아바스엘이 허벅다리를 불태워 상처를 입혔다.
세 사람이 추가로 펜릴을 상대하기 위해 뛰어든 사이, 실루아의 인형들은 기절하고 부상을 입은 사람들을 구역 구석으로 옮기고, 소피아가 치료했다.
“델레브헴 씨! 밧줄 같은 것 있습니까?”
입가에 흐르는 핏물을 닦아낸 델레브헴은 내 물음에 가방에서 밧줄을 꺼냈다.
“있다!”
“있는 대로 꺼내서 성기사들에게 주십쇼! 성기사들은 신성력으로 밧줄을 강화해 저 개새끼의 움직임을 봉쇄하세요! 손 남는 인원은 전부 화살이라도 쏴요!”
아이젤 탐험단이 튼튼한 밧줄에 고리를 만들어 성기사들에게 넘기는 사이, 남는 인원과 실루아의 인형들이 마력을 담은 화살을 날려 펜릴을 공격했다.
실루아의 실력이 어느새 이렇게 일취월장했는지, 화살에 담긴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활을 쓰던 초인인 새벽별 교단의 11사도 도노반의 마력혈도를 연구한 덕분인가?
사방에서 다섯 초인과 두 명의 대마법사가 차륜전을 벌여 움직임을 봉인하고 여기저기서 화살을 쏴 전신을 두드리는 사이 성기사들은 사제의 축성을 받은 밧줄을 던졌다.
그들이 노리는 건 주로 머리였다.
“됐다! 묶였다! 잡아당겨!”
“크르르르르!”
성기사들은 펜릴의 머리에 밧줄 몇 개를 걸고 전력을 다해 잡아당겼다.
아멜리는 성기사들이 끌려가지 않도록 성기사들에게 축복을 뿌렸다.
펜릴은 이빨로 밧줄을 물어 끊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용병왕이 정면에서 강기를 두른 검으로 미간을 내리치면서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커엉!”
그때 이마에 두개골이 보일 정도로 깊게 패인 펜릴이 전력으로 마력을 끌어올리는 게 보였다.
브레스인가? 아니다!
“전 방위 마력파다! 모두 대비해!”
“아우우우우-!”
내 경고가 끝나기 무섭게 펜릴은 마력을 내뿜으며 마력파를 일으켰다.
나는 나비의 힘으로 내 일행들을 보호했고, 아멜리는 신성력으로 로툴러스와 자신의 부하들, 그리고 아이젤 탐험단을 보호했다.
“크윽!”
“커흑!”
아멜리의 신성력으로 보호되었음에도 아이젤 탐험단과 몇몇 사제들은 마력파를 견디지 못하고 날아가며 석상에 처박히거나 요란하게 땅을 굴렀다.
“울어라! 버스 4호!”
“메에에에에~!”
산사태양이 가진 마력을 전부 다하며 힘껏 울었다.
나는 바람의 정령의 힘으로 소리가 퍼지지 않고 펜릴에게 직격하도록 조율했다.
전력을 다한 탓에 이제는 유령으로 보일 만큼 반투명해졌지만, 그 덕분에 펜릴이 평형 기관에 타격을 입은 듯 비틀거렸다.
“용병왕! 다시 한 방 부탁합니다!”
“내가 네놈에게 고용된 줄 아느냐!”
로툴러스는 내 지시에 분노하면서도 다시 한번 높이 뛰어오르며 십여 미터의 강기를 휘둘렀다.
“성기사들! 오른쪽으로 당겨요! 영감님! 최대한 시선 끌어요!”
성기사들은 있는 힘껏 밧줄을 오른쪽으로 당겨 펜릴의 고개를 미세하게나마 끌어당겼고, 데일호르그는 있는 힘껏 검강을 날렸다.
펜릴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오른쪽을 신경 썼다.
펜릴이 데일호르그가 주는 고통을 감내하며 위협적인 로툴러스의 검강을 상대하기 위해 머리 쪽에 마력을 모았다.
브레스였다. 상황 판단 끝내주는구만.
기를 수 있다면 기르고 싶었지만, 펜릴을 테이밍 하는 방법을 모르는 게 아쉬웠다.
괴수왕이라면 알고 있으려나?
펜릴의 모든 신경이 우측과 로툴러스의 검강에 모두 몰린 그때 나는 외쳤다.
“지금입니다!”
내 외침에 왼쪽에서 자잘하게 검강을 날리며 견제만 하던 아나스타샤가 잔상을 남길 정도로 빠르게 움직여 내가 처음 지시했던 대로 왼쪽 5번 늑골을 노리고 검을 내질렀다.
천하십검의 전력을 다한 검강이 가죽을 뚫고 깊숙이 박혔다.
“끼잉! 케헥!”
“으아아아!”
펜릴은 브레스와 함께 피를 토했고 정면에서 펜릴의 마지막 숨결을 맞은 로툴러스는 피투성이가 되어 땅을 굴렀다.
나는 사라지는 산사태양의 머리를 마지막으로 쓰다듬어 주며 현 상황을 파악했다.
아이젤 탐험단. 부단장을 비롯한 다섯 명만 서 있고 나머지는 중상을 입은 채 기절. 서 있는 다섯 명도 중상을 피하지 못했다.
바다 교단. 24명 중 6명 기절, 13명 탈진, 2명 중상, 나머지는 조금 지쳤을 뿐이다. 중상 2명 중 방금 가열차게 땅을 구른 로툴러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 일행. 인형 5체 경미한 파손, 1체 중대한 파손, 산사태양 소멸. 그사이 정이 든 산사태양이 소멸하다니, 우리 피해가 가장 심각했다.
“뭐, 이 정도로 펜릴을 잡았으면 피해는 거의 없는 건가.”
참 다행인 일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