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사기꾼과 성녀와 사기꾼 성녀 (5)
산사태양보다 몸집은 많이 작지만 어지간한 대형 몬스터쯤은 한입 거리로 만들 크기의 전설의 신수 펜릴은 코를 킁킁거리며 우리의 냄새를 맡았다.
목양견(牧羊犬)답게 후각으로 우리가 적인지 아닌지를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크르르릉~?”
우리에게서 아무 냄새도 나지 않자 펜릴은 당황한 듯 보였다.
냄새란 공기로 전파된 냄새 분자들이 후각 세포와 접촉함으로써 일어나는 생체 신호를 뇌가 받아들인 결과다.
바람의 정령의 힘으로 주변 공기를 통제하면 냄새를 감추는 것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전설의 신수인 펜릴에게도 통할 줄은 몰랐다.
“유안, 저 목줄에 달린 방울이 그거야?”
소피아는 개목줄에 달린 치천사의 창각을 알아보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 큰 개에 매여진 목줄에 달린 방울에 걸맞게 크기가 사람 머리보다 컸지만, 저런 귀물은 어지간해서 크기 조절이 가능했다.
“저 목에 걸린 방울을 어떻게 뗄 거야?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도 아니고 펜릴 목에 달린 방울 떼기라니.”
“그야 평화로운 방법으로 얻어야지.”
목양견을 공격하는 순간 평화롭게 풀을 뜯던 양들이 산사태를 일으키며 폭주하기 시작할 거다.
반대로 양을 공격하면 저 사나운 펜릴이 흉폭한 이빨을 들이밀 거고.
소설에서는 그 사실을 모르고 평화롭게 달려오던 양을 프레시아가 일도양단했다가 대환장의 파티가 벌어졌었다.
“방법이 있어?”
“당연히 다 준비해 왔지.”
나는 인형이 메고 있는 가방에서 작은 피리를 꺼냈다.
마탑에서 산 마법 피리였다.
기능은 별것 없고 한번 연주한 곡을 마력이 다 떨어지거나 가동을 중지하기 전까지 계속 연주하는 재생 마법이 걸려 있을 뿐이다.
일단 다섯 가지 방법을 준비해 왔는데 모두 안 통하면 저 신수를 사냥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검마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피리를 입에 물고 나비의 힘으로 소리를 증폭했다.
-삐리리리~♪
내가 피리를 불자 펜릴과 산사태양들은 날 바라봤지만, 큰 반응은 없었다.
어디 보자, 이 곡조가 아니면 이 곡조인가?
나는 멜로디를 바꾸며 펜릴의 반응을 확인했다.
무국구왕 중 한 사람인 괴수왕(怪獸王)은 몬스터를 테이밍 할 때 소리를 통해서 길들였다.
소설 권말 부록에 괴수왕의 악보가 있어서 마력을 담아 차례차례 따라 연주하는데 펜릴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악보뿐만 아니라 특수한 주법이나 마력 운용이 필요한 건가?
다른 방법으로 갈아타야 하나?
가급적 평화롭게 해결하고 싶었다.
일단 밑져야 본전이니 계속 연주했다.
그러다 5번째 악보대로 연주하는데 갑자기 마력이 쭉쭉 빠져나가더니, 내 마력을 흡수한 산사태양이 엉덩이를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메에에에~!”
“메에에에~!”
신이 난 듯 모여든 양들이 원을 그리며 춤을 추는 걸 보아하니 연주가 통하긴 통하는 모양이었다.
5번 곡은 아닌 듯했지만, 악보 자체가 산사태양에게도 통하는 걸 보니 펜릴에게도 통하겠네.
확신하며 기분 좋게 피리를 부는데, 합창하듯 우는 산사태양의 울음소리에 땅이 공명하며 거대한 흔들림을 만들어 산 이곳저곳에 산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쿠르르르… 콰아아아-!
“와오….”
일행들은 대규모로 일어나는 대장경에 넋을 잃고 바라봤다.
연주를 멈추자 양들은 춤을 멈추고 두리번거리더니 풀을 뜯기 시작했다.
“주군, 설마 이거 마율보(魔律譜)입니까?”
“어… 아마?”
마율보란 리듬을 통해 마법적 현상을 일으키는 마법으로, 고대 제사에 사용되다가 지금은 거의 사장된 옛 마법이었다.
“주군의 학식이 넓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놀랄 것까지야.”
나는 이번에는 소리를 증폭시키지 않고 우리가 타고 있는 산사태양에게만 들리도록 피리를 불어봤다.
-삐리리리~♪
그러자 확실히 마력 소모량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피리 소리를 들은 산사태양은 게걸음으로 왼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주변에 영향을 끼친 만큼 마력이 소모되는 건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음률을 타고 공간을 채우던 마력이 사라졌으니 사라진 만큼 마력을 내뿜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비효율적이라니, 마율보가 왜 사장되었는지 알겠다.
그러고 보면 괴수왕도 연주는 길들일 때만 사용했지, 길들이고 난 다음에는 그냥 조종했었다.
-삐리리리~♪
다시 5번 곡의 다른 일부만 연주하자 뒤로 걷기 시작했다.
-삐리리리~♪
이번에는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그렇게 악곡의 부분부분만 연주하며 실험해 본 끝에 산사태양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테이밍 할 방법은 전혀 모르겠다.
“대충 이런 식이군. 생각보다 마력 소모가 큰데?”
재미는 있는데 힘들다.
“그야 신화 속에 등장하는 전설의 짐승을 조종하는 거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 그런가.”
나는 마력을 회복하고는 6번 곡부터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그렇게 연주하던 중 12번 곡에서 펜릴의 귀가 쫑긋하고 바로 섰다.
좋아, 반응이 있다. 개과에겐 이 악보구나.
나는 부록에 실린 12번 곡의 변형을 번갈아 연주하며 졸음을 유도하는 악보를 찾았다. 그러고는 마력을 담아 연주했다.
한 곡을 다 연주한 나는 피리의 마법을 가동해 반복 재생시키고는 마력 조율에 더 힘썼다.
마력이 담긴 피리 소리에 펜릴은 나른한 표정으로 하품을 하더니 천천히 제자리에 앉았다.
괴수왕이었으면 한 곡이 끝나기도 전에 잠들었을 텐데 역시 특수한 마력 운용법이 있는지, 효과가 작았다.
이거 오늘 안에 재울 수 있으려나?
다른 방법을 써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아바스엘이 내게 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마력 흐름을 만져봐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해봐.”
나는 곧바로 마력을 거둬들였다. 아무래도 나보다는 천재로 유명했던 슈프림 메이지인 아바스엘이 더 잘하겠지.
“감사합니다. 사실 제 후배 중에 고대 마법 복원을 전공으로 삼은 녀석이 있어서 도와준 적이 있습니다.”
아바스엘은 능숙하게 마력 흐름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소리를 타고 사방으로 흐르는 마력파장에 펜릴이 졸린 듯 비틀거렸고 심지어 양들도 하품을 하기 시작했다.
“이야! 역시 엘이야. 이게 되네.”
천재는 괜히 천재가 아니었다. 내 감탄에 아바스엘은 별것 아니라며 겸손하게 말했다.
“제가 한 건 별것 없습니다. 마율보에서 중요한 건 마력보다도 효과를 나타내는 악상(樂想)이라 펜릴에게도 통할 음률을 만든 주군께서 더 대단하십니다.”
진심으로 말하는 듯했지만 이 악보는 내가 만든 게 아니었다. 하지만 설명하기 귀찮았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졸음에 비틀거리던 펜릴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느긋하게 누워 졸기 시작했다.
“영감님, 저 녀석이 깨지 않게 조용히 저 목에 달린 방울 좀 가져오시죠. 신성력을 불어넣지만 않으면 울리지 않아서 괜찮을 겁니다.”
“내가… 알았다.”
불만 가득한 눈으로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반문하려던 늙은 성기사는 저 방울을 소피아가 사용할 거란 걸 떠올리고는 묵묵히 산사태 양에서 뛰어내렸다.
기척을 죽이고 허리보다 길게 자란 목초지 풀 속에 숨어든 늙은 성기사는 목양견이 깨어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일기당천이란 이명으로 유명한 초인이었지만 그래도 펜릴을 상대하는 건 목숨을 걸어야 했다.
그는 은밀하게 접근해서 단숨에 개 목줄을 끊어내고 방울을 챙겨 다시 돌아왔다.
“여기 있습니다. 아가씨.”
산사태양 위로 올라온 데일호르그는 내 허락이 있기도 전에 바로 소피아에게 방울을 넘겨버렸다.
소피아의 손에 닿은 치천사의 창각은 소피아의 성흔과 공명하며 맑고 청아한 소리를 울렸다.
딸랑-! 딸랑-!
“어?!”
갑자기 방울이 울릴지 몰랐던 소피아와 데일호르그는 당황했고, 치천사의 창각은 새로운 주인의 몸집에 맞춰 크기를 줄였다.
“아, 망했다.”
청아한 방울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목양견은 자신의 목에 달려 있던 방울이 사라졌음을 깨닫고 사납게 이를 드러냈다.
“방울이 아가씨 손에 들어가면 바로 울린다는 건 왜 말 안 했나!”
늙은 성기사의 분노에 나는 유쾌하게 웃었다.
“아하하하! 실수.”
설마 장갑을 뚫고 성흔과 공명할 줄은 몰랐지.
나라고 모든 걸 아는 건 아니다.
“크르르르르!”
“아하하하! 바로 튄다! 다들 꽉 잡아!”
나는 피리로 5번 곡을 부르며 타고 있는 산사태양을 조종했다.
전력으로 달리는 산사태양을 타고 재빨리 거문고자리 구역으로 넘어갔지만, 날렵한 사냥꾼이기도 한 펜릴은 구역과 구역 간의 경계인 문이 닫히기 전에 비집고 들어와 계속해서 우리 뒤를 쫓았다.
유적 초입이었으면 구역과 구역 사이에 설치된 각종 방위 마법이 끝없이 쏟아지며 펜릴을 공격해서 따돌릴 수 있었을 텐데 아쉽구만.
“벤다.”
아나스타샤의 말에 나는 연주를 멈추지 않고 제이드와 프레시아에게 눈짓했다.
“얼어라!”
“도련님께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제이드는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강 위로 얼음을 만들어 산사태양이 뛸 디딤판을 만들었고 프레시아는 내 뜻을 검마에게 대신 전달했다.
저런 괴물과 싸우느니 튀는 게 더 현명한 일이었다.
검마라면 충분히 저 개새끼를 죽일 순 있겠지만, 그녀도 만만치 않게 다칠 수도 있었다.
왜냐? 저 펜릴은 유적이 만들어 낸 가짜가 아니라 ‘진짜’였으니까.
저 전설의 신수는 별자리 미궁이 만들어졌을 때 휘말려 들어온 괴물이었다.
별자리 미궁이 구축되며 휘말려 들어온 유물이 있다면 당연히 생물도 휘말려 들어올 수 있는 법이다.
보통 섞여 들어온 생물은 먹을 게 없어 굶어 죽기 마련이었지만, 몇몇 ‘진짜배기’는 유적의 마력을 먹으며 살아남았다.
아니, 살아남는 수준이 아니라 더욱 강해졌다.
산사태양은 얼음 위를 폴짝폴짝 뛰며 빠르게 강을 건넜고, 제이드는 산사태양이 밟고 지나간 얼음을 다시 녹여 없앴다.
그러나 펜릴은 그냥 강물을 밟고 강 위를 달렸다.
이 방법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는데 별수 없구만.
-삐리리리~♪
더 빨리 달려! 따라잡힌다!
* * *
조심스러운 듯하지만 끈덕지게 유적에서 돌아갈 것을 권하는 델레브헴을 떼어낸 아멜리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의 신앙심은 존중했지만, 아멜리의 입장에선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가 귀찮게 구는 사람일 뿐이었다.
단호하게 내치지 못하는 이유는 식량을 지원받은 것과 미답 구역까지 가는 데 유능한 탐험가와 고고학적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노리는 성유물, ‘치천사의 창각’이 있는 목동자리 구역은 아직 ‘공식적’으로는 아무도 가보지 못한 미답역이었다.
아르카나에선 오래 전 한 번 목동자리에 도달해 산사태양을 사냥한 적이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아르카나가 보낸 60명의 탐사대 중 생존자는 단 1명, 당시 천하십검 중 한 사람이었다.
목동자리 구역에 있는 산사태양의 울음소리에 의해 비전투 인력 10명은 즉사, 20명은 기절, 20명은 중상을 입어 실질적으로 10명의 인원으로 펜릴과 날뛰는 양 떼와 싸울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게 섣불리 얌전하던 산사태양을 사냥한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계속 내부를 바꾸는 미궁 속에서도 목동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알 수 있었다.
산사태양에게서 나온 마력 결정 덕분이다.
로툴러스는 델레브헴을 떼어낸 아멜리에게 다가가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성녀는 그 사기꾼이 정말로 우리랑 같은 목표물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의 물음에 아멜리는 싱긋 웃었다.
“반반이요. 사실 반보다는 낮다고 생각하는데, 제 감 좋은 친구가 유적에 들어오기 전에 한 말이 걸려서요.”
‘도둑을 조심해라.’ 이미 벌어진 일이었지만, 왠지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그녀의 친구만큼 육감이 발달하지 못했지만, 직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그리고 목표물이 같지 않더라도 미궁 심부에서 고생했을 테니, 분명 중간에 쉬어갈 만한 길로 잡을 거예요. 그럼 이곳만 한 곳이 없죠.”
아멜리와 로툴러스는 아직 왕관자리 구역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검선에게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검마와 마주칠 수 있을 거라 말한 건가?”
“가능성은 높잖아요?”
그녀의 말에 로툴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강한 힘을 지닌 마검을 흡수할 검마라면 분명 휴식을 취할 터였으니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그 사기꾼에게 집착할 필요가 있나?”
“혼내주고 싶은 건 사실이지만… 제가 말했잖아요. 저희와 목표물이 같을지도 모른다고요. 움직이더라도 그건 확인하고 움직여야 한다고 봐요.”
아멜리의 고집에 로툴러스는 두 손을 들었다.
“마음대로 해라. 이 탐사대의 리더는 성녀니.”
용병왕의 항복에 아멜리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구역 구석에서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던 검선 나유타가 눈을 번쩍 뜨며 벌떡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 느껴지지 않던 마검의 기척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네?! 얼마나요?”
아멜리의 물음에 나유타는 대략적으로 거리를 가늠했다.
“여덟 구역, 아니 여섯, 다섯? 셋? 둘? 하….”
콰앙!
“메에에에에~!”
“…나.”
거대한 산사태양이 육중한 몸으로 문을 열어 재끼며 강림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