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3화. 사기꾼과 성녀와 사기꾼 성녀 (3)
마력 결정을 긁어모으는 제이드와 아바스엘은 금광을 발견한 사람처럼 신이 났다.
“이 정도면 당분간 마석 걱정 없이 연구에 매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게 유적의 괴물을 쓰러트리고 나온 마력 결정은 유적 밖으로 나가도 소멸하지 않았다.
“그러게 말이야. 정화나 추출 과정도 없이 사용할 수 있으니, 제이드 공이 연구 중인 고중력 상황에서의 시간 동결 실험을 몇 번이고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밖에서 구할 수 있는 마석과 달리 불순물이 없고, 정순하고 특징적인 속성도 가지고 있어서 무궁무진한 연구 거리인 데다가 마력을 뽑아내 마법에도 활용할 수 있었다.
가령 유적 초입, 카시오페아자리 나온 리버스 인어공주 쏨뱅이들은 바다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고, 도마뱀자리 구역에서 나온 코모도 도마뱀 같은 놈들은 늪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마력에 속성을 부여하는 건 실력 있는 마법사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전공 분야가 아니면 특정 속성을 불어넣을 수도 없어서 더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너무 위험한 데다가 공간계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탓에 얻을 수 있는 수도 한정되어서 사냥을 다니는 탐사대는 없었다.
굳이 별자리 미궁의 마력 결정이 아니어도 마탑을 통해 구할 수 있는 데다 유물을 발굴하는 게 더 돈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저분이 없었으면 바로 도망쳤을 것 같은데.”
두 마법사가 앞으로 할 실험 연구에 대해서 떠드는 와중에 소피아는 힘든 기색 하나 없이 무표정하게 신화 속 괴물들을 썰어버리는 검마 아나스타샤를 보며 감탄했다.
“그야 천하십검이니까.”
천하십검이란 괴물들은 모두 하나같이 저렇게 강했다.
프레시아의 스승인 호레이즌과 바스타유 산맥으로부터 왕국을 지키는 데미웨이도 마찬가지로 괴물들이었다.
데미웨이가 내 인형 수리 청구서에 호달달 떨던 모습을 떠올리면 그가 저 괴물 같은 무용을 펼치는 아나스타샤와 동급이라는 사실에 괴리감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동격의 괴물인 건 맞았다.
“와, 검성(劍聖) 아저씨도 이렇게 강할까?”
소피아의 물음에 마찬가지로 넋 놓고 아나스타샤의 무위를 바라보던 데일호르그가 정신 차리며 나 대신 대답했다.
“당연합니다! 제 제자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검성은 천하십검 중에서도 특히 강하다고 봅니다!”
“그 푼수 아저씨가요?”
소피아가 믿지 못하자 늙은 성기사는 당황했다.
“그렇습니다! …그 녀석이 좀 푼수 같은 면이 있긴 하지만 결코 무위가 약하진 않습니다.”
데일호르그의 말에 검을 휘두르던 아나스타샤가 잠시 멈추고 말했다.
“검성이라면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아나스타샤의 말에 데일호르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레 물었다.
“제… 제자 녀석은 어땠습니까?”
“강했지. 마검을 두고 가볍게 손속을 겨뤘을 뿐이라 십검 중 특히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평온한 아나스타샤의 대답에 데일호르그는 자신의 팔불출 같은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얼굴을 붉혔다.
“미, 미안하오. 내가 부족한 눈으로 실언을 했소.”
늙은 성기사의 사과에 아나스타샤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 정도면 충분히 평가할 수 있으니 사과할 필요는 없다.”
무심한 그녀의 말에 데일호르그의 얼굴은 더욱 빨개졌다.
“아니오, 진심으로 사과드리오. 평가할 눈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자존심 때문에 제대로 보지 않고 말하였소. 부끄럽구려.”
그러고는 소피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제가 늙어서 어리석어졌나 봅니다. 풍요로운 대지의 가르침에서도 교만하지 말라 하였는데, 이를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늙은 성기사가 진심 어린 고해(告解)를 하자 그의 전신에서 밝은 신성력이 폭발적으로 튀어나왔다.
“뭐여? 각성이여?”
“뭐야? 각성이야?”
나와 소피아는 육성으로 당황했다.
따사로운 신성력에 휘감긴 늙은 성기사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별 이상한 타이밍에 각성을 하네. 보통 위기 상황에 각성해서 적을 물리쳐야 하는 거 아니야?”
내 물음에 소피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러게. 좀 깬다.”
“너무하십니다!”
소피아의 솔직한 평가에 늙은 성기사는 진심으로 상처받았는지 훌쩍였다.
소피아는 인생에 몇 없는 순간에 홀대받아 삐친 노인을 달래기 위해 진땀을 뺐다.
아나스타샤는 그런 두 사람을 보다 다시 검을 들고 검강을 날렸다.
그녀는 저 멀리서 날아오는 지금까지의 거대 고니보다 십여 배는 거대한 고니를 반 토막 내며 내게 말했다.
“소년, 이름이 어떻게 되지?”
“굉장히 일찍 물어보시네요.”
난 진심으로 놀랐다. 적당히 헤어질 때쯤이 되어서나 물어보거나 아예 내게 관심도 없을 줄 알았는데 말이다.
내 말에 아나스타샤는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히 의아해했다.
“그런가?”
나는 피식 웃고는 드래곤만 하던 고니가 소멸하며 떨구는 거대한 마력 결정을 붙잡기 위해 제이드와 아바스엘이 신이 나서 달려가는 걸 보며 대답했다.
“유안입니다.”
이름 외에는 별다른 소개가 없었지만 아나스타샤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안 소년,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말씀하시죠.”
“제이드 소년은 어째서 이곳에 있는 거지?”
그녀의 물음은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제이드와는 그저 통성명만 했다고 들었는데 제이드가 품고 있는 겨울 현자의 마력, 예카트리체에게 물려받은 성, 이계의 구멍의 존재 등의 이유로 제이드가 이곳에 있어선 안 될 사람이란 걸 유추한 듯했다.
“정확히는 제이드가 왜 이곳에 있는 건지가 아니라 예카트리체 씨의 생사가 궁금한 거겠죠.”
내 추측에 아나스타샤는 입을 닫았다.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에 미세하게 초조함과 불안감이 느껴진다면 착각일까?
“나는….”
“유안! 큰일 났습니다!”
제이드는 초거대 고니의 마력 결정과 무수히 많은 마력 결정을 마법 그물 안에 담아 끌고 오며 호들갑을 떨었다.
덕분에 아나스타샤의 말이 끊겼다.
“주군! 더 이상 마력 결정을 챙길 가방이 없습니다!”
열심히 마력 결정을 쓸어 담은 제이드와 아바스엘은 울상을 지었다.
마법 그물 안에 담겨 있는 것들 외에도 인형들이 메고 있는 제 몸집보다 다섯 배는 큰 가방들이 모두 마력 결정으로 꽉꽉 들어차 있었다.
짐꾼으로 쓰는 인형 열일곱 체가 메고 있던 가방 중 식량과 잡다한 도구, 유물이 담긴 가방이 3개였으니, 14개의 가방이 마력 결정으로 가득 찬 거다.
“어떻게 합니까? 가방을 몇 개 비워야 할까요?”
아쉬움과 욕심이 뚝뚝 묻어나는 제이드의 물음에 나는 인형들을 조종해 가방에 담겨 있는 마력 결정들을 내 앞에 모두 쏟아내게 했다.
“아니, 그런 아까운 짓을 할 순 없지. 나비, 람, 비암. 부탁할게.”
내 부탁에 세 정령들은 마력 결정 더미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고는 내 몸에서 마력이 쭉쭉 빨려 나가더니 마력 결정 더미가 종류별로 뭉치고 압축되었다.
카득! 카득! 카득!
산처럼 쌓인 마력 결정이 농구공 크기 몇 개로 줄어들었다.
한 번에 너무 많은 마력을 통제하려 하다 보니 무리가 됐는지 내가 급성 빈혈 환자처럼 비틀거리자 프레시아와 길버트가 날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아, 괜찮아. 그냥 마력이 딸릴 뿐이야. 나비야.”
-냐옹~!
나비는 뭉치지 않은 마력 결정 하나에 앙증맞은 발을 올리더니 그 안에 담긴 바람 속성을 삼켜 마력으로 치환한 다음 내게 다시 공급해 줬다.
“휴우, 살 것 같네.”
역시 마력회로를 개발할 필요가 있겠다. 적은 마력을 연달아 사용할 때는 큰 무리 없이 마력 회복과 병행이 가능했지만 큰 마력을 한 번에 다룰 때는 힘들었다.
비유하자면 마력회로는 마력을 저장할 수 있는 물탱크다.
물탱크가 작으면 작을수록 한 번에 내뿜는 물의 양도 줄어들 뿐만 아니라 고갈도 빠르다.
특히 나 같은 경우는 마력회로가 정령들이라는 별도의 물탱크와 연결하는 고무호스의 역할도 하기 때문에 원활한 순환을 위해 마력회로 개발이 중요했다.
지금 고민해 봤자 여기서 마력회로 개발을 할 순 없으니 나중으로 넘기기로 하고, 나는 아나스타샤를 바라봤다.
제이드가 오자 그녀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건가?
“빨리 거문고자리로 가자. 별자리 이동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으니까.”
내 말에 일행들은 바쁘게 걸음을 옮겨 다음 구역인 알파성지 베가로 넘어갔다.
베가에 도착하자 앞선 구역처럼 괴조들이 몰려들었다.
“이 구역은 까마귀, 아니 까치인가?”
배가 하얀 거대 까치들의 공격에 검마가 앞장서서 베어내었다.
아바스엘과 제이드는 땅에 떨어지는 마력결정에 신이 나서 쓸어 담았다.
제이드가 떨어지자 다시 입을 열까 싶어 아나스타샤에게 눈길을 줬지만, 그녀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로 묵묵히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뭐, 알아서 하겠지.
나는 천체 시계를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음, 시간 왜곡이 변수네.”
내 중얼거림에 늙은 성기사를 달래느라 진땀 빼고 다시 내 옆으로 온 소피아가 물었다.
“뭐가 변수야?”
“네 친구 말이야. 시간 왜곡 때문에 또 만나면 귀찮거든.”
내게 속은 델레브헴이 방해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시간 벌이밖에 안 되는 데다 시간 왜곡 탓에 멀리 돌아올 아멜리가 일찍 도착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래봤자 나보다 일찍 도착하지는 못할 테지만.
“그런데 유적에 들어오기 전부터 궁금했는데, 아멜리를 굳이 속인 이유가 뭐야?”
소피아는 순수하게 궁금한 듯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었다.
“편하게 오려고. 덕분에 중간까지 엄청 편하게 왔거든.”
내 대답에 소피아는 날 파악했는지 물었다.
“그리고?”
역시 이유가 더 있다는 걸 눈치챘나. 소피아는 아르카나에 대해 알지 못했지만 알려주긴 해야지.
당연히 지금은 아니고 유적을 나가고 난 다음에 말이다.
“내가 노리는 것과 그쪽이 노리는 게 같은 물건이거든. 경쟁자는 빨리빨리 쳐내야 편하게 움직이지.”
내가 노리는 유물 ‘치천사의 창각(昌珏)’은 두 개가 한 쌍을 이루는 작은 보옥으로, 하나는 신성력을 증폭해 주고, 다른 하나는 신성력을 세밀하게 나눠주는 보물이었다.
부패한 사제들의 신성력을 강탈해 온 아멜리에게 신성력을 증폭해 주는 힘은 별로 필요 없었다.
하지만 신성력을 세밀하게 나눠주는 능력은 누구보다 탐낼 힘이었다.
바다의 성녀는 편법으로 쌓은 신성력이 너무 많아서 일반 공격을 광역기로밖에 사용하지 못하는 탓에 아군이 있을 때는 신성 공격은 못 했다.
내 설명을 들은 소피아는 신성력 증폭에 관심을 보이다가 불현듯 떠오른 듯 안주머니에서 사도의 힘이 가득 담긴 마수정을 꺼냈다.
“잠깐, 세밀하게 신성력을 나눠준다고? 그럼….”
“맞아. 그것도 신성력이잖아.”
너무 거대해서 사용할 수 없는 사도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된다는 말이었다.
“아, 다 도착했다. 아슬아슬했네.”
우리가 거문고자리 구역으로 넘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적의 마력이 요동치며 별자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