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1화. 사기꾼과 성녀와 사기꾼 성녀 (1)
검마의 등장에 다시 한번 분위기가 급변했다.
그녀가 내 손에서 낚아챈 마검을 쥐고 제압하는 짧은 과정에서 보인 숨을 쉴 수 없을 날카롭고 서늘한 기세에 모두가 압도되었다.
아멜리는 그녀를 보며 긴장하며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아멜리의 물음에도 아나스타샤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나와 내 옆에 서 있는 제이드를 응시했다.
제이드와 만났다고 하더니, 얼굴을 바꿨어도 마력의 형질로 알아보는 건가?
“그 마검은 제가 이 별자리 미궁에서 얻은 유물입니다. 당연히 소유권은 제게 있죠.”
내 말에 아나스타샤는 미간을 좁혔다.
백옥같이 하얀 얼굴에 흑단같이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순간의 모습이 제이드의 스승인 예카트리체와 많이 닮아 보였다.
“이 마검은 위험하다. 보아하니 알고 있던 것 같은데, 왜 뽑았지?”
돌려달라는 내 말에 아나스타샤는 동문서답하듯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당신이 이 왕관자리 영역에 도착하고 나서도 몰래 숨어서 보고 계셨잖습니까.”
“…내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게 하려고 검을 뽑았다? 날 감지했다고?”
아나스타샤는 드물게 미세하게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감정을 거의 표출하지 않는 그녀에게 있어선 경악과도 같은 반응이었다.
“제가 감각이 조금 뛰어난 편이라.”
정확히는 필요할 때마다 정령들의 감각을 끌어다 쓸 수 있어서였지만, 어쨌든 뛰어난 감각인 건 사실이다.
솔직히 나도 천하십검 중 한 사람의 은신을 꿰뚫어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뭐, 은신술은 못하나 보지. 천하십검이라고 모든 걸 잘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위험했다.”
“그렇긴 했지만 저도 나름 대비는 하고 뽑은 거라 크게 위험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내 대답에 아나스타샤는 다시 한번 미간을 좁혔다.
“참과 거짓을 이렇게 가르기 힘든 사람은 굉장히 오랜만이군. 소년은 마치 평생 거짓말을 일삼아 오거나 진실만을 말해온 사람 같다.”
검마는 검선과 같은 말을 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아니면 오랜 친구라 그런가?
검마 아나스타샤와 검선 나유타는 어려서부터 서로 알고 지낸 소꿉친구였다.
“아니, 조금 다른가. 아예 틀리진 않겠지만 너는 뭔가 다르다. 마치 운명이 비껴 나가는 사람처럼….”
아나스타샤가 말끝을 흐리자 무시당한 아멜리가 발끈해서 뭐라 소리치려는 걸 로툴러스가 말리며 대신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보오! 검마 아나스타샤 하이트필!”
로툴러스가 검마의 이름을 외치자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간 공포에 경직되며 숨을 쉬는 것마저 잊었다.
그녀의 흉명(兇名)은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었다.
“크리요오 학살 사건의 그 검마?”
“록산느 왕가를 멸망시켰다는 괴물?”
수군거리던 아이젤 탐험단과 바다 교단의 성직자들은 아나스타샤의 눈길에 움츠러들며 시선을 피했다.
언제나 마검을 쫓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아나스타샤는 그만큼 여러 사건에 휘말렸다.
마검과 연관된 사건인 만큼 언제나 유혈이 낭자했고, 사건의 중심지에는 항상 그녀가 있었기에 대륙에 그녀의 흉명이 퍼질 수밖에 없었다.
아나스타샤와 엮인 사건들은 하나같이 굵직하고 규모가 컸지만, 개중 가장 유명한 건 크리요오 학살 사태와 록산느 왕조 멸족 사건이었다.
동쪽에 위치한 한 국가에 속해 있는 크리요오 지방에서 벌어진 사태는 유명한 타바코(tobacco:담배) 농장에서 발굴된 마검에서 비롯되었다.
발굴된 마검 ‘분열하는 광기(狂氣)’는 검을 쥔 자를 피에 미치게 만들며, 어린아이라도 마력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기사급의 힘을 선사했다.
그저 그뿐이었다면 많아야 수백 명에 이르는 피해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열하는 광기’는 일정량의 피를 먹이면 똑같은 마검이 하나 더 생기며 계속 수를 늘려가는 특성을 지녔다는 게 문제였다.
원본이 어느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복제된 마검은 또다시 마검을 낳았고, 순식간에 2천 자루가 넘는 마검과 약 3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마검의 기척을 느끼고 뒤늦게 온 아나스타샤는 그날 밤, 마검을 쥔 숙주를 모두 죽여버렸다.
자칫하면 대영지 하나가 아니라 국가 단위의 사태로 발전할 수 있었던 일을 아나스타샤 덕분에 빠르게 해결했다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공포의 대상이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마검에 의해 강화된 숙주들 중에는 갓 벽을 넘었다고는 하지만 초인 하나와 그에 준하는 기사단 한 개 중대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
다른 하나는 숙주가 된 어린아이마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양팔과 목을 베어 버렸다는 점이었다.
그녀의 막강한 힘뿐만 아니라 비정한 손속은 공포를 주기 충분했다.
록산느 왕조 멸족 사건은 크리요오 학살 사태와 비교하면 별것 아니었다.
그저 나라 하나가 지워졌다는 이유로 크리요오 사건과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건이었다.
과거 록산느의 왕이 고대의 마검을 전쟁 병기로 이용해 먹으려다 검마와 검선에게 걸려서 두 사람이 힘을 합쳐 관련자를 싹 다 모가지를 친 사건이었다.
사전에 알아차려서 인명 피해는 고작 백여 명에 불과했다.
다만 마검의 전쟁 병기화 실험에 왕의 모든 친인척이 연관되어 있어서 그대로 왕조의 대가 끊겨버린 탓에 새로운 나라가 들어섰을 뿐이다.
참고로 록산느 왕조 멸족 사건에서는 검선이 사람을 더 많이 죽였다.
하지만 검마의 흉명이 늘어난 이유는 크리요오 사태 이후 두 달 뒤에 벌어진 사건이라 아나스타샤에게 시선이 몰린 탓이 컸다.
“오랜만이다, 용병왕. 리프텔에서는 신세를 졌다.”
아나스타샤의 인사에 아이젤 탐험단원들의 시선이 로툴러스에게 몰렸다.
검마 아나스타샤만큼은 아니어도 그 역시 전 세계에 명성을 떨치는 검객이었던 만큼 그의 정체에도 놀랐다.
“그저 돈 받고 행한 의뢰였을 뿐이오. 허나 조금이라도 감사를 느낀다면 이곳에는 왜 왔는지 알 수 있겠소?”
로툴러스의 뻔한 질문에 아나스타샤는 내 손에서 낚아챈 마검을 들었다.
“마검의 기척을 느꼈기에 왔다. 그뿐이다.”
정확히는 왕묘에 들어갈 방법을 찾지 못해서 다른 별자리 구역으로 갔다가 내가 왕묘의 문을 열자 그것을 느끼고 돌아온 걸 거다.
소설에서도 그랬으니 당연히 올 거라 확신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온 걸 보면 가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마검을 손에 넣었으니 볼일은 다 본 것 아니오.”
로툴러스는 극도로 긴장하며 아나스타샤에게 다른 구역으로 가줄 것을 정중히 부탁했다.
“어허! 마검의 소유권은 어디까지나 저에게 있습니다. 저는 아직 양도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내가 제이드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이죽거리자 무표정했던 아나스타샤의 눈썹이 미세하게 살짝 움찔했다.
“그렇군. 원하는 바가 있나? 소년.”
아나스타샤는 세간의 인식과 달리 비정하거나 인간의 감정을 모르지 않았다.
선의에는 선의로 보답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저 무표정하고 한번 마음먹으면 철저하게 비정해져서 그렇지.
“저와 제 친구를 죽이려 하는 저 용병왕을 죽여달라고 하면 들어주실 건가요?”
내 물음에 아나스타샤는 로툴러스를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용병왕은 식은땀을 흘리며 긴장했다.
“…거절하지. 소년의 말이 사실이란 증거가 없다.”
역시 그런가. 내 예상대로였다.
차라리 로툴러스가 검을 뽑았다면 편했을 텐데 아쉽다.
“허억! 허억!”
한참 동안 고민하던 아나스타샤의 거절에 로툴러스는 숨통이 막혔다 트인 것처럼 거친 숨을 내뱉으며 휘청거렸다.
반응을 보아하니 아나스타샤가 진짜로 로툴러스를 죽이려 간을 본 모양인데?
“뭐, 농담이었습니다. 아, 그렇게 보지 마시죠. 먼저 절 그 살 떨리게 무서운 종교 재판에 회부하려 한 건 당신이지 않습니까.”
종교 재판은 기본적으로 이단 심문관이 피고를 고문부터 하고 보는 무식하고 야만적인 재판을 말했다.
이 연약한 몸을 종교 재판에 회부하겠다는 말은 날 심문 중에 사고사 처리하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날 살벌하게 노려보는 로툴러스를 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음, 그런데 저 시선은 증거가 안 됩니까?”
내 물음에 로툴러스가 다시 긴장하며 경직되었다.
“살기는 없다, 소년.”
아나스타샤의 대답에 로툴러스는 다시 멈췄던 숨을 크게 내쉬었다.
놀리는 맛이 있는 앵무새구만.
마음에 들었다. 왠지 친해지고 싶어졌다.
“그거 아쉽네요.”
“빠드드득!”
내 농담에 로툴러스는 부리를 갈았다.
“그럼 별자리 미궁 안에 있는 동안엔 저와 제 친구들을 지켜주십쇼.”
검마에게 호위를 요청하자 날 노리고 있던 아멜리가 입술을 깨물었다.
“고작 검 한 자루로 천하십검을 고용하겠다고요?”
그녀의 방해에 나는 가소로워서 그만 피식 웃었다.
“고작 검 한 자루가 아닙니다. 에랑칼의 12대 숲지기인 데벰버브를 칠무신 중 하나로 만들어 준 마검, ‘백 마리 악마의 뿔’입니다. 별자리 미궁에 흘러들어 오면서 열화도 거의 안 된 만큼, 오히려 거스름을 내야 하는 건 아나스타샤 씨죠. 안 그렇습니까?”
내 물음에 아나스타샤는 자신의 손에 쥔 마검을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거스름으로 원하는 게 있나?”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 친구를 봐서 팁 정도로 생각해 주시죠.”
내가 제이드의 어깨를 두드리자 아나스타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의 반응에 제이드는 이해가 안 가는 듯 내가 눈짓으로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나중에 대답해 주겠다며 넘어갔다.
“자, 자, 잠깐만! 칠무신 데벰버브의 마검? 그게 얼마나 귀한 유물인데 검마에게 넘기겠다고?!”
부단장은 놀라서 내게 물었고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넘기려는 게 아니라 이미 넘긴 겁니다. 그리고 제가 무슨 배짱이 있다고 저분의 손에 쥐어진 걸 되찾습니까? 그냥 순순히 넘기고 안전이나 확보하는 게 낫습니다.”
검마의 수중에 넘어간 마검치고 소멸하지 않은 마검이 없으니 아쉬워할 만했다.
“아니, 그래도… 잠깐.”
잠시 눈알을 굴리던 그는 내게 따지듯이 물었다.
“데벰버브면 대지의 여신의 사도이자 이 왕묘의 주인인 드루이드 왕, 칠링링의 심복 아닌가? 저거 왕묘에서 나온 거 아니야?”
오, 예리해. 역시 명성이 자자한 아이젤 탐험단의 부단장인가.
“그럴 리가요. 저 안에선 계속 함께이지 않았습니까? 제가 보물을 먼저 터는 것 보셨습니까?”
내 되물음에 그는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희가 이곳까지 오면서 불행하게도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저희가 미답 영역을 발견했고, 그 피해를 입은 끝에 얻은 검입니다.”
그 말에 델레브헴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피해를 입고도 왕묘에 들어가려 했던 이유도?”
그는 알아서 착각해 줬다. 역시 쓸데없이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을 속이는 게 더 쉽다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저 마검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죠.”
“흐음… 그렇군.”
나는 애써 울음을 참는 표정을 지으며 부단장에게 말했다.
“저는 대지 교단 소속이지만, 모든 성인은 고귀하며 안전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여전히 성녀님께서 위험한 미궁에서 한시라도 빨리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미운털이 박혀버린 모양입니다.”
“그야 그렇게 과격한 수를 썼으니 당연하지.”
“그래서 말인데 저희는 성녀님을 대신해 성녀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을 대신 이루기 위해 심부로 들어갈 생각입니다. 델레브헴 씨는 협력하는 척하며 성녀님을 막아주시지 않겠습니까?”
내 부탁에 그는 생각에 잠긴 듯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저의 죄는 미궁에서 살아 돌아오거든 청하고자 합니다. 부디… 부디 성녀님을 부탁드립니다.”
내가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잡자 그는 무언가 결단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내 힘써보겠네.”
“감사합니다. 아, 성녀님께서 의지가 완고하셔서 거짓말까지 하며 심부로 들어가려 하실지도 모릅니다.”
“유념하지.”
나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아멜리의 바로 옆을 지나며 말했다.
“그럼 기회가 있다면 또 봅시다.”
“…꼭 다시 볼 겁니다.”
아멜리는 이를 악물며 으르렁거렸고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럼 뺑이 치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