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별자리를 거니는 히치하이커 (16)
서로를 보고 놀란 나와 아멜리는 기묘한 침묵을 유지하며 대치했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헤어질 때는 인형들을 포함해 여섯뿐이었는데, 지금은 그 열 배 이상이니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물론 열이 나도록 머리를 굴리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내 예상대로라면 아멜리는 후퇴를 선택해야 했다.
그 선택을 유도하기 위해서 식량을 훔치고, 구조 신호도 받을 수 없게 아바스엘에게 유물 관리 청사의 수신 마도구를 고장 내라고까지 시켰다.
잠시 생각한 나는 어렵지 않게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34명 중 이곳에 있는 건 24명, 아멜리의 성격, 별자리 미궁의 특성 등을 고려했을 때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그저 저들이 운이 좋았다.
나는 재수가 없었고.
아바스엘이 말하기로는 사흘 정도는 수리해야 할 거라고 했지만, 구역마다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탓에 아멜리가 후퇴를 결정하기 전에 작은곰자리 구역의 청사에서 마도구를 고쳤다.
연락이 닿자 아멜리는 허가증의 보호를 받는 20명과 성녀와 용병왕의 힘으로 보호할 수 있는 최다 인원인 4명을 더해 강행 돌파를 선택한 거다.
남은 10명은 아마 남아서 구조를 기다리겠지.
여전히 지쳐서 숨을 헐떡이는 성기사들과 로툴러스를 보니 내 예측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큭큭큭, 고생 좀 하신 모양입니다.”
내가 웃음을 참으며 묻자 바다 교단의 성녀 아멜리는 울컥해서 외쳤다.
“누구 때문인데!”
“글쎄요 누구 때문일까요? 전 분명 중간까지만 같이 간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요.”
나는 바다 교단의 성기사들을 호위로 고용한다고는 했지만 끝까지 같이 간다고는 말 안 했다.
그걸 알았기에 그녀도 별자리 미궁 입부에서부터 내게 선택권을 주는 척하며 수작을 부리려 하지 않았는가.
“이…! 이 도둑놈이!”
“도둑이라니, 너무하네요. 저는 나름 정당한 분배라고 생각하고 저희 몫을 챙겼을 뿐이랍니다.”
내 능글맞은 말에 성기사와 사제들도 분노에 차서 부들거리기 시작했다.
“식량까지 탈탈 털어 갔잖아! 유물은 몰라도 식량을 가져가 놓고 뭐? 너희 몫을 챙겨?!”
아멜리의 외침에 뒤에서 소피아와 데일호르그가 놀란 눈으로 날 쳐다봤다.
그러고 보면 저 둘에게는 말 안 했었지.
두 사람은, 특히 늙은 성기사는 내게 무슨 짓을 했냐며 멱살을 잡고 싶어 하는 게 뻔히 보였다.
나는 별것 안 했다는 의미로 한쪽 눈을 찡긋거리며 웃어넘겼다.
다행히도 절친한 친구인 소피아가 이 자리에 있음에도 아멜리와 휘하 성직자들은 은하가 만든 가짜 얼굴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지금 내 얼굴도 가짜긴 했지만, 알아본 사람이 그저 모른 척했을 가능성도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도둑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아이젤 탐험단의 부단장, 델레브헴이 물었다. 그는 지금의 대치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듯 당황했다.
특히 도둑이라는 말에 민감히 반응했다.
이곳저곳을 탐험하다 보면 가장 경계해야 할 건 도둑이었을 테니 어쩔 수 없었다.
“작은 오해가 있었습니다. 이런 유적에선 흔히 있는 사소한 오해죠.”
내 말에 아멜리의 목에 핏대가 섰다.
“뭐가 사소한 오해라는 거냐고!”
분노한 그녀의 주변에 짙은 신성력 섞인 마력이 요동치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로툴러스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잡아 진정시키며 귓가에 뭐라고 속삭였다.
“진정해라, 성녀. 앞뒤 재지 않고 분쟁을 일으켰다가는 곤란한 건 우리다. 일단 쪽수를 생각해야지.”
나는 바람의 정령인 나비의 힘으로 로툴러스의 목소리를 훔쳐 들었다.
역시 노련한 용병답게 상황 파악이 빠르다.
그의 시선이 프레시아와 데일호르그에게 고정되었다.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바다 교단에서도 손꼽히는 강자들이라고 해도 초인이 아니라면 쪽수에 장사 없다.
프레시아나 데일호르그 둘 중 하나에게만 그의 발목이 잡혀도 그들이 전멸하리라는 건 어렵지 않게 계산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럼 지금 가만히 놓아주란 거예요?”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대듯 속삭인 아멜리의 물음에 로툴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진정하고 저들을 자세히 봐. 싸운다면 우리의 뒤통수를 친 여섯 명뿐이면 되지 않나. 특히 저 미역 머리 외투를 잘 봐라.”
로툴러스의 말에 아멜리는 심호흡하며 델리브헴에게 눈길을 줬다.
그녀는 외투 소매에서 낡아 흐릿해진 아이젤 탐험단의 상징, 펼쳐진 책 뒤로 교차하는 세 자루의 검 문양을 발견한 듯 미소를 지었다.
“분노에 눈이 멀어 무턱대고 싸우기보다는 일단 저들을 갈라놓으란 말씀이군요. 특히 저 책과 검 문장을 쓰고 있는 이들은 40명이나 되니 우선적으로 설득하고요.”
아멜리의 말에 로툴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모두 당신을 위한 거였습니다!”
나는 아멜리의 말을 자르며 애통한 목소리로 외쳤다.
내 외침에 다들 날 바라봤다.
나는 살짝 감정이 과하게, 그러면서도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당신같이 귀한 분이 이런 위험한 유적 깊숙이 들어갔다가 봉변이라도 당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겠습니까?”
이럴 때는 선수를 쳐야 했다.
괜히 대화의 주도권을 넘겼다가는 귀찮은 일이 발생할 수 있었다.
내 말에 아멜리는 다시 울컥했는지 화를 냈다.
“그러니까 식량은 왜 가져갔냐고! 네가 내 봉변이잖아! 이 망할 도둑놈아!”
그녀의 분노에 나는 가볍게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신은 필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지 않고 유적 깊숙이 들어가려 하셨겠죠. 분노하시는 건 당연합니다! 저를 미워하시는 것 또한 당연합니다! 그러나 부디 통촉하여 주십시오! 당신은 이런 위험한 곳에 있어선 안 될 분이십니다!”
내 말에 아멜리는 기가 막히는지 입을 뻐끔거렸다.
경험 많은 로툴러스도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지 당황했다.
“델레브헴 씨!”
“어? 어어.”
“저분이 누구신지 아십니까?”
내 물음에 부단장 델레브헴은 아멜리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별자리 미궁에 들어오는 탐사대의 얼굴들은 대략적으로나마 아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군.”
“저분께서는 바다 교단의 성녀이신 아멜리 님이십니다!”
나는 아멜리가 스스로의 신분을 밝히기 전에 내가 먼저 밝혀버렸다.
이런 건 상대가 밝히고 나서 대처를 하려 하면 늦는다.
아멜리가 직접 밝힌 다음에 내가 이미 알고 있었고,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항변해 봤자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성녀라는 말을 들은 이 자리의 모두는 놀라서 아멜리를 바라봤다.
“저는 고귀하고 또 고귀한 성녀님께서 이런 위험한 곳에 오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유르페 씨.”
“에?”
갑자기 내게 지목당한 아이젤 탐험단의 갈색 단발머리의 소녀는 당황했다.
“당신의 신앙심에 걸고 대답하여 주십시오. 성녀님께서 이 위험한 미궁에 발을 들인다고 했을 때 당신은 찬성할 것입니까, 반대할 것입니까!”
내가 압박하며 묻자 유르페는 어버버 대답했다.
“그, 그야 반대…하죠, 보통?”
“그렇습니다! 그 누가 위대한 신의 총애를 받으며 만인의 사랑을 받는 성녀님의 안전과 목숨을 담보로 잡겠습니까! 신앙심이란 것이 티끌만큼이라도 있다면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반 호흡 쉬고 바로 공격하듯 성녀 옆에 서 있는 사제에게 물었다.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의 신앙이! 가슴이! 마음이! 정녕 성녀님을 위험으로 몰아도 된다고 시켰습니까!?”
성직자라면, 아무리 성녀에게 충성심이 깊다고 하더라도 당연히 반대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그건….”
선동은 8할이 기세고 2할이 감정 호소다.
논리? 그런 건 필요 없다.
사람은 이성과 감성이 싸우면 감성이 이기곤 했다.
그게 집단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아멜리가 뭐라 반박하려 입술을 들썩거리자 나는 틈을 주지 않고 외쳤다. 아직 내 턴이다.
“그렇다면 바로 옆의 성기사님께 묻겠습니다! 신께 맹세코! 성녀님께서 위험해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까?!”
“그럴 리 없지 않소!”
감정은 한번 불을 지르면 들불처럼 번지기 마련이었다.
“그렇다면 성기사님께선 어째서 이 위험한 곳에 성녀님과 함께이십니까! 당신이 진정한 성직자라면! 신의 앞에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위해서라면 성녀님께서 유적에 들어가겠다고 했을 때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아야 하지 않았습니까!”
내 비난에 성기사와 사제들은 순간 움찔했다.
나는 지금 그들의 감정을 호도(糊塗)하며 신앙심을 오도(誤導)했다.
내 말에 아멜리도 위기감을 느꼈는지 신성력을 내뿜으며 외쳤다.
“이들은 충분히 이곳에서 저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합니다! 바다 교단에서도 손꼽히는 이들이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습니다!”
걸려들었다.
아멜리는 나랑 논쟁으로 끌고 가면 안 됐다.
무조건 내 말을 무시하고 자신의 신분과 힘을 내세우며 어떻게든 강압적으로 날 제압해야 했다.
입씨름으로 맞상대한다면 나는 그저 진흙탕 싸움으로 끌고 갈 뿐이다.
“맞습니다! 저분들은 감히 저 따위에게 평가받을 분들이 아니죠!”
내가 그녀의 말에 동의하자 아멜리는 다시 한번 당황했다.
그녀를 두려워하며 오냐오냐하는 늙은이들과만 기 싸움 하던 구중궁궐 아가씨가 대놓고 개기며 더러운 개싸움으로 끌고 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을 리가 있나.
차라리 귀족들을 많이 상대해 본 닳고 닳은 종교인이었으면 상대하기 어려웠을 텐데 이래서 부침 한 번 겪어보지 못한 엘리트들이란.
“그러나! 제가 아니어도 그들 스스로가 이러한 의문을 가졌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신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방법이기 때문이죠! 위험을 알고 있음에도 그저 감수하겠다는 윗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이 과연 옳다 할 수 있겠습니까!”
순간 프레시아가 네가 그런 말을 할 입장이냐는 듯이 바라봤지만 나는 가볍게 무시했다.
“성녀님의 명령에 따르고 목숨을 거는 것은 명예로운 일입니다! 허나 그렇게 한목숨, 한목숨이 스러지고 나면 어쩔 생각입니까? 모두 죽고 나면 홀로 남을 성녀님은 생각하지 않고 미궁 심부로 모시는 게 정녕 옳다 할 수 있습니까!”
“그거랑 당신이 제 식량을 가지고 튄 거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죠!?”
아멜리의 최후의 발악에 나는 경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큰 상관이 있습니다. 식량이 없다면 자애로우신 성녀님께선 필히 마궁 밖으로 나가실 테니까요! 저는 눈물을 머금고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연히 거짓말이다. 유적 밖으로 내쫓아 봤자 또 기어들어 올 텐데 그럴 리가 있겠나.
아멜리는 할 말을 잃었는지 입을 뻐끔거렸다. 결국 보다 못한 로툴러스가 나섰다.
“그건 종교 재판에서 말할 이야기고, 결국 네 행동은 성녀님을 위험하게 만들었다. 자네가 그렇게 신앙심이 깊다면 순순히 포박당하면 될 일이다.”
로툴러스의 말에 아멜리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에요! 그렇게 신앙심이 깊다면 아이젤 탐험단 뒤에 숨지 말고 순순히 저희를 따라오세요!”
오~! 좀 하는데?
그래도 경험 많은 용병이라고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나쁘지 않은 판단을 내렸다.
다만 나쁘지 않았을 뿐 좋은 판단이라고 할 순 없었다.
그 정도쯤이야 선동과 날조로 더 질척질척한 진흙탕 싸움으로 끌고 가면 상대하기 어렵지 않다.
본격적으로 아가리를 털어보려 했는데 아쉽게도 시간이 다 된 모양이다.
예상보다 빠르네.
나는 허리춤에 멘 마검을 뽑아 들었다.
“도련님?!”
그러자 지독한 마기(魔氣)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내 팔을 타고 오려 했다.
“검을 뽑은 건 어리석은 짓이다, 소년.”
마기가 내 몸을 침범하기도 전에 흑단 같은 머리칼을 흩날리는 아리따운 미녀가 내 손에서 마검을 낚아챘다.
검마(劍魔) 아나스타샤 하이트필.
내 다음 버스 기사의 등장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