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9화. 별자리를 거니는 히치하이커 (15)
“에고고, 삭신이야.”
나는 소피아의 신성 치료를 받으며 골골거렸다.
피를 토한 걸로 보아 아무래도 갈비뼈가 부러져 폐를 살짝 찌른 듯했다.
다행히 갈비뼈가 깔끔하게 부러지고 크게 엇나가지 않아 소피아의 신성력 한 방에 멀쩡해졌다.
역시 파티에 힐러가 있으니 편하긴 하네.
“쓰읍, 이렇게 몸이 허약해서야. 앞으로 갈 길이 멀구만."
내 푸념에 소피아는 피식 웃었다.
“그 마력 파장을 맞고 고작 뼈 하나 부러진 거면 허약한 건 아니지.”
“아니긴, 사제인 너도 마법사인 제이드도 코피 조금 흘리고 말더만.”
프레시아야 워낙 몸이 튼튼하니 코피도 안 흘렸다.
소피아와 제이드는 어이없다는 듯이 날 보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왜?”
“아닙니다. 생각해 보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아서요.”
쩝, 자각하고 있지만 그렇게 확인사살까지 하다니. 서운하구만.
“그나저나 역시 그 디바이스 사기 아닙니까? 술식이 복잡해서 보통 몇 시간은 걸리는 마법인데.”
“헤헷! 역시 그렇지? 내가 만든 거지만 사기템이라니까.”
마법이 오래 걸리는 이유는 보통 둘 중 하나다.
마력이 더럽게 많이 필요하거나, 술식이 더럽게 복잡하거나.
보통 마력이 많이 들면 위력이 강하고, 술식이 복잡하면 견고했다.
조금 전 싸우면서 제이드가 사용한 마법, ‘겨울의 속삭임’은 전자의 마법이었고 내가 사용한 봉인 마법은 후자의 마법이었다.
“그거 유안이 만든 거야?”
소피아는 왕의 보물을 선별하며 놀라 물었고 나는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핸드폰같이 생긴 디바이스를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설계만 내가 한 거고, 제작은 아는 난쟁이가 해 줬어. 솔직히 벨트가 일을 다 했지.”
소피아가 선별한 칠링링 왕의 묘실에서 가지고 나갈 수 있는 보물을 찾아 가방에 집어넣은 나는 보물 더미에서 양피지를 꺼내 은하에게 내용을 기억하게 했다.
고대어로 적혀 있어서 당장 읽을 수 없지만, 해독하면 정령술에 쓸 만한 정보가 있을지도 몰랐다.
마지막으로 칠링링 왕의 직속 전사인 왕의 검, 데벰버브의 검을 집어 들었다.
“이것도 가지고 나갈 수 있어.”
내 말에 소피아는 거무튀튀한 검을 살펴봤다.
“이 검에선 촉이 안 오는데?”
“그야 이 검은 대지의 여신이나 신성력과는 거리가 먼 물건이니까.”
오히려 정반대의 물건이었다. 이 검은 생전의 데벰버브를 칠무신(七武神), 지금으로 치면 천하십검에 해당하는 힘과 명성을 준 마검이었다.
당연히 마검이므로 소피아의 직감이 잘 통하지 않는 물건이기도 했다.
“마검이면 위험한 거 아닌가요?”
프레시아의 걱정에 나는 손을 내저었다.
“검집에서 뽑지만 않으면 괜찮아. 자, 그럼 가자.”
검을 허리 벨트에 매단 나는 앞장서서 묘실 문을 열었다.
드르륵-
“아, 이런.”
드르륵-
그러고는 다시 문을 닫았다. 묘실 밖에는 소피아가 싸우면서 흘린 신성력에 이끌린 언데드가 바글거렸다.
나는 다시 문을 열며 외쳤다.
“너로 정했다! 소피아!”
“예이, 예이.”
언데드 학살 병기 소피아가 출격했다.
* * *
바퀴벌레 떼처럼 바글거리는 언데드들을 처리하기 위해 선두에 선 소피아에 의해 언데드들은 빠르게 뼈 무더기가 되었다.
제이드는 소피아의 바로 뒤를 따르며 바닥에 나뒹구는 뼈 무더기를 마법으로 치워버렸다.
완전히 정화하거나 박살 내면 가루가 되어 소멸할 테지만 칠링링과 싸운 탓에 피곤해서 최소한의 신성력만 사용해 언데드의 구성 요소인 사기(死氣)만 지워버렸다.
영혼이 없는 스켈레톤 무리는 그것만으로도 무너져 내렸다.
소피아는 멀찌감치 떨어져 뼈다귀가 치워진 쾌적한 길을 걷는 유안을 흘끔 보며 제이드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그 마력 폭풍 있잖아. 유안의 보호가 없었으면 어땠을 것 같아?”
그녀의 물음에 제이드는 잠시 고민하다가 쓰게 웃었다.
“지금 수준으로는 머리와 중요 장기만 간신히 보호했을 것 같군요.”
간단히 넘겨 버렸지만 칠링링의 영혼을 쥐어짠 마력 폭풍은 그야말로 최후의 발악이었다.
육체적으로나 영혼적으로나 극한까지 몰아넣은 상태로 강령시켰기에 어떻게든 봉인에 성공했을 테지만 그 과정은 처절했을 거라고 제이드는 생각했다.
“나는 간신히 즉사를 면하는 정도였을 것 같거든. 뭐, 난 즉사만 아니면 어지간해서 멀쩡히 살아날 자신 있지만…. 그런데 유안은 우리 모두를 완벽하게 보호했단 말이지?”
소피아는 유안을 괴물 보듯 바라봤다.
반면 제이드는 자신이 칭찬이라도 받은 듯 미소 지었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요. 부상도 당했고요.”
“그것도 이상해. 원래 그런 보호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가장 강하게 보호하지 않아?”
“가장 강하게 보호했습니다. 혼자 옷 아래로 방어 마도구가 감싸기도 했거든요. 바로 옆이라 느꼈습니다.”
제이드의 대답에 소피아는 놀랐다.
“뭐? 그럼….”
“그 강한 힘으로 보호하고도 다쳤다는 거죠. 그래서 제가 말했잖습니까,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고요.”
소피아는 실소를 터트렸다.
“하핫! 진짜 허약한 거였다고?”
그렇게 강한 힘을 사용하면서 몸이 허약하다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흥미를 느꼈다.
“뭐야, 왜 몰래 수군거려? 내 뒷담?”
어느새 뒤에서 다가온 유안의 장난스러운 물음에 제이드는 싱긋 웃으며 말을 돌렸다.
“유적에서 나가면 유안이 몸보신할 수 있게 약이나 만들까 이야기했습니다.”
“그래? 역한 맛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역하게 만들어도 유안이 먹는 약보다는 덜할 테니 걱정 마세요. 조금 쓰고 말 겁니다.”
유안이 먹는 보조제는 상상을 초월하는 역함을 자랑했다.
“그럼 다행이고.”
“아, 곧 도착합니다.”
제이드는 아바스엘의 마력을 감지해 말했고 유안은 빛의 정령의 힘으로 모습을 감췄다.
* * *
제이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퉁이 사이로 아이젤 탐험단의 단원들이 보였다.
“열심히들 싸운 모양이구만.”
앞장서서 싸우는 이들의 모습을 보니 가죽 갑옷 이곳저곳이 찢어졌고 자잘한 상처를 입었다.
다행히 성수 덕분에 죽은 사람이나 큰 부상을 입은 사람은 없어 보였다.
우리는 기척을 죽이고 샛길로 빠졌다가 탐사단이 길목을 지나자 자연스럽게 내 환영 분신을 지우고 끼어들었다.
우리가 돌아왔다는 것을 눈치챈 늙은 성기사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아가씨,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데일호르그의 걱정스런 물음에 소피아는 목소리 낮추라며 손짓하며 대답했다.
“다친 곳은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제가 저놈을 확 그냥…!”
소피아를 멋대로 데려가서인지 늙은 성기사가 무섭게 날 노려보자 소피아가 말렸다.
“그러지 좀 마세요. ‘이안’은 약속대로 했을 뿐이니까요.”
영악한 소피아답게 누가 들을까 봐 내 이름이 아니라 가명으로 말하며 늙은 성기사를 달랬다.
“약속 말씀입니까.”
약속, 대지의 여신이 내린 신탁을 말했다.
“예, 약속이요. 얻은 것도 얻은 거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크게 배웠어요. 위험이 없지는 않았지만, 어머니께서 제게 굳이 ‘직접’ 말씀하신 의미가 있었어요. 원래 약속의 대상이었던 ‘동생’이 아니라 제가 약속을 이행하게 돼서 다행이라 생각될 정도로요.”
성인 반열에 오른 전사들이 어떻게 영혼과 마력을 운용하는지 가까이서 관찰하고,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사도의 힘을 온몸으로 경험했으니 중요한 경험이 됐을 거다.
소피아가 진심으로 말하자 그도 뭐라 할 말이 없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데일호르그가 얌전해지자 아바스엘이 내게만 들리도록 마법으로 물어왔다.
-원하시는 바는 모두 이루셨습니까? 주군.
그의 물음에 나는 씨익 웃었다.
-깔끔하게 털어 왔지.
-다행입니다. 가셨던 사이 이곳에 있었던 일을 보고드리겠습니다.
내가 세 사람을 데리고 자리를 떠난 사이 탐사대는 언데드와 죽어라 싸우며 왕묘를 돌파했다.
그러고는 이 왕묘가 고대 전설 속의 왕국인 드루이드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알려진 위대한 왕 칠링링의 왕묘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흥분한 아이젤 탐험대는 언데드와 싸우면서도 숨겨져 있던 왕의 오른손 일루갈드를 포함해 다섯 개의 묘실을 발견해 보물들을 챙겼다고 한다.
-그리고 아무래도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보니 아이젤 탐험단 측에서 보물 지분의 65퍼센트를 요구해 왔습니다.
-그래서?
보물 중 어느 게 진짜 유물인지 모르는 이상 발굴한 보물은 모두 챙겨 가는 게 기본이었다.
묘실에서 얻을 수 있는 진짜 유물들은 내가 전부 챙겼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소피아의 직감을 피해 간 유물이 있을지도 몰랐다.
-그냥 넘겨주면 위화감을 느낄 것 같아서 감정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지분을 늘렸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38퍼센트, 저쪽이 62퍼센트를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잘했어.
비록 사라질 것들이긴 했지만, 별자리 미궁 안에 있을 때는 소피아와 데일호르그가 그 안에 담긴 힘을 뽑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바스엘이 나름 비중을 늘린다고 했지만 반도 아니고 40퍼센트 미만으로 지분을 받기로 했으니 이걸 빌미로 뭔가를 더 뜯어낼 수도 있었다.
-아, 제 개인적인 욕심으로 마법과 관련된 물건을 우선해서 분배받았는데 다시 협상할까요?
-아니야, 어차피 사라질 것들이니 아루도스의 돋보기로 잘 살펴봐.
솔직히 고대 마법은 술식적인 측면에서는 굉장히 주먹구구식이나 다름없었다.
학문으로서 마법이 막 태동한 시점인 데다가 혈통에서 나오는 강한 힘을 휘두르기만 해도 강력하니 발전이 더딘 시기기 때문이다.
마법 학교 교재에 따르면 마법이 본격적으로 발전한 건 고대로 분류되는 신화시대 말기나 그 이후로 보는 게 학계의 정설이었다.
“이곳이 왕묘의 끝인 것 같군.”
왕묘의 끝, 칠링링 왕의 묘실에 들어선 아이젤 탐험단의 부단장은 묘실을 지키는 경비 미라가 잠에서 깨어나 덤비자 능숙하게 처리했다.
“언데드의 숫자가 많아서 그렇지, 강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짧은 갈색 머리의 여자 탐험 단원의 말에 부단장은 가루가 되어 무너진 미라를 발로 밀어 치우며 대답했다.
“그게 이 유적의 특성이지. 언데드는 영혼이 없으면 생전의 제힘을 내지 못해. 아마 이 왕묘의 원본의 탐사 난이도는 특 2급 이상일 거다.”
“그렇게나요?”
부단장의 말에 단원들은 놀랐다. 탐험단은 난이도를 아홉 단계로 나눴다.
유적은 보통 일반 1, 2, 3급, 위험 1, 2, 3급, 특1, 2, 3급 순으로 난이도가 어려워졌다.
물론 분류하는 기준은 탐험단마다 제각각이라 영세 탐험단에게 특급이라도 아이젤 탐험단에게는 일반급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절대적인 분류 기준을 두기엔 탐험 업계의 시장 규모가 작은 탓이다.
“여기도 묘실의 주인이 없군.”
부단장은 허탕을 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최대한 내부를 기록했다.
그사이 아바스엘과 아이젤 탐험단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보물들을 분배했다.
“아쉽지만 자세한 탐사는 다음 기회에 해야겠다. 이런 왕묘 탐사에 맞는 장비도 없을뿐더러, 관련 기록도 찾아봐야 하니까.”
부단장은 그렇게 말하며 나와 아바스엘의 눈치를 봤다.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이유도 내가 정보를 푼 덕분이었던 데다 대놓고 교단을 등에 업고 있으니 눈치를 보는 것도 당연했다.
“어쩔 수 없군요. 저희도 정보를 확인해 보는 차원에서 한번 시도해 본 것뿐이니 너무 부채감을 가질 것은 없습니다. 그저 준비가 부족했을 따름입니다.”
당연히 부채감을 가지라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부단장 델레브헴도 빚을 졌다는 걸 느끼고 있는지 살짝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감사할 것까지야. 오히려 내가 감사하지.
“자, 정했으면 어서 이곳을 나가죠.”
내 말에 아이젤 탐험단은 다시 앞장서서 왕묘를 빠져나갔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반딧불 같은 정령 불빛에 의지하다가 다시 밝은 곳으로 나온 나는 기겁했다.
“어?!”
“이안?!”
바다 교단의 성녀가 성기사들을 데리고 왕묘 앞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