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화. 별자리를 거니는 히치하이커 (14)
나의 부름에 왕의 미라가 누워 있는 황금 관이 요동치다 못해 금이 가기 시작했다.
“와오, 수천 년이 흘러도 사도는 사도라는 건가.”
드루이드 왕국의 가장 위대했던 왕의 영혼은 너무나 거대하고 위압적이었다.
그의 가장 현명한 신하가 괜히 영혼의 힘을 감출 수 있는 마도구를 만들어 바친 것이 아니었다.
육신의 힘이 뒷받침되지 못한, 반쪽만도 못한 힘에 전신이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마력을 황금 월계수 관에 불어넣으며 외쳤다.
“왕이여! 일어나라! 이곳에 강림하여라!”
쩌저적- 콰앙-!
왕의 미라에 그 방대한 영혼이 강령되자 힘을 버티지 못하고 육신을 보호하던 마법의 황금관이 터져 나갔다.
-으아아아악-!!
거대한 왕의 영혼은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그가 안착한 육체는 그의 부하들이 열심히 힘을 뽑아낸 껍데기에 불과했다.
위대한 사도의 영혼을 버티기에는 받쳐줄 힘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했다.
“대단하군. 그래도 사도였던 몸뚱이라고 저 영혼을 버티는 건가.”
사람으로 치면 온몸의 뼈가 사라진 상태에 피가 줄줄 새고 있는 상태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칠링링 왕의 미라는 영혼을 받아내고 안착시켰다.
다행이다.
왕의 직속 전사들이 미라에서 사도의 힘을 완전히 쪽 빨아내기 전에 멈추게 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왕의 영혼을 강령하지 못할 뻔했다.
그럼 갈 곳 잃은 저 영혼은 원래 있던 진짜 미라로 향할 거고, 깨어난 칠링링 왕은 분노해서 왕묘가 파묻힌 땅 일대의 모든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인신 공양을 한 다음에 날 죽이러 올 터였다.
“아슬아슬했습니다.”
제이드는 꾸중하는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확실히 내가 프레시아에게 칠링링 왕의 직속 전사들을 공격하라 신호를 보낸 게 아슬아슬하긴 했다.
“그래도 성공했잖아. 저놈이 육신의 힘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휘두른다고 생각해 보라고.”
“그건 확실히 끔찍하긴 하군요.”
지금 칠링링 왕의 육신은 그 거대한 영혼을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하고 있었다.
약간이라도 여유가 있었다면 그 힘을 이용해 회복을 꾀할 수도 있었기에 아슬아슬할 때까지 힘을 빼내는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죽었어도 일곱 주신 중 하나의 사도였다.
-으아아아아!! 이게 무슨 일이더냐! 나의 눈이여! 꾀주머니여! 어서 설명하라! 설명하라고! 망할 뒤뚱거리기만 하는 오리 새끼야!
칠링링은 분노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그로밋을 찾았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보다가 재미있는 생각이 나서 씨익 웃었다.
“그 불안한 미소는 뭡니까?”
“이상한 생각 하시는 건 아니시죠?”
제이드와 프레시아는 불안한 눈초리로 날 바라봤다.
“쉬잇. 빨리 끝내고 가자고. 내가 신호하면 전투 준비해.”
곧 죽어도 사도라고, 몸뚱이가 붕괴하는 게 내 예상보다 너무 느렸다.
그래서 조금 더 가속할 생각이었다.
“흠흠!”
목을 가다듬은 나는 두어 걸음 나아가며 말했다.
“왕이시여! 나의 왕이시여! 소신 여기 있나이다! 당신의 눈이자 꾀주머니, 동부 전선의 사령관, 짐승들의 호민관, 영민한 바다 오리가 여기 있나이다!”
-크으으으…! 이상하구나, 어찌 네 영혼의 색이 보이지 않는 것이냐.
고통에 머리를 부여잡으며 비틀거리는 칠링링의 물음에 나는 진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제가 당신께 바친 황금 월계수 관을 썼기에 그렇나이다.”
-월계수 관. 그래, 대업의 시작은 가장 먼저 죽음에서 깨어난 나의 눈이 우리의 영혼과 연결된 황금 월계수 관을 쓰고 우리를 깨우는 것이었지. 한데 어찌 이리 고통스러운 것이더냐!
칠링링의 분노 어린 목소리에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야 제가 당신의 힘을 찬탈했기 때문이지 않겠나이까, 왕이시여. 왕의 영혼을 담기에는 그 육신은 너무나 하찮아졌나이다.”
-…뭐?
칠링링은 고통에 부들부들 떨면서도 내 말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는지 고통에 찬 신음성도 멈추고 날 바라봤다.
“제가… 아니, 내가 네놈의 힘을 찬탈했다 말하였다, 쇠락하고 영락한 왕이여. 나는 새로이 살아 있는 육신을 얻었고, 네놈을 대신하여 위대한 왕이 될 것이다.”
내 담담한 선언에 칠링링은 당혹스러워하다가 이내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로밋 아우쿤스웨잇! 네, 네놈이 감히! 고의 은혜를 저버리고 왕이 되겠다고?!
분노가 영혼의 힘을 증폭했고, 얼마 남지 않은 육신의 힘마저 방출했다.
그로 인해 말라비틀어진 미라의 몸의 붕괴가 가속했다.
“그렇다, 실패한 왕이여! 네놈은 수많은 백성을 비탄에 빠트렸고! 외적의 침탈을 막지 못하였으며! 종국에는 나라마저 멸하게 하였다!”
-…나라가, 나라가 망했다고?
“그렇다! 무능한 왕이여! 그 멸국의 원인이 정녕 무엇으로 비롯되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더냐! 모두 네놈의 망집으로 인한 결과지 않느냐!”
대지의 여신의 사도인 칠링링이 군림하는 드루이드 왕국은 강력한 국가였다.
그러나 그것이 세계 최강의 국가냐 하면, 전혀 그렇지 못했다.
드루이드 왕국과 떨어진 남쪽에는 달의 여신의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가 있었고, 바로 동쪽으로 이웃한 나라 또한 바다 신의 사도가 다스리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신화시대 초기.
그 당시는 신의 혈손 따윈 발에 치일 정도로 많았고, 반신도 그렇게까지 희귀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고작해야 신의 사도라 해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아니, 정확히는 일곱 주신의 사도쯤 되면 어지간한 하위 신의 자식보다는 더 나은 존재긴 했다.
죽을 만큼 노력하면 하위 신으로서 신계로 올라갈 수도 있는 존재였으니.
하지만 그게 곧 최강이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이 달의 여신의 아들이 대제국을 세웠으니까.
심지어 그 반신은 지금 전쟁과 공포의 신이라 불린다.
그래서 칠링링과 열세 명의 직속 전사들은 훗날을 기약하기 위해 왕묘에 자신들의 영혼과 언데드로나마 되살아날 육신을 준비한다.
모든 것은 자신들의 왕국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들이 신화시대가 끝나도록 깨어나는 일은 없었다.
아마 별자리 미궁에 휘말린 탓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럴 리 없다! 네 이놈! 오리 새끼야! 어디서 간사한 혀를 놀리는 것이냐!
“네놈이 믿기 싫을 뿐이겠지! 그리고 오리라고 부르지 말라! 나는 고고하고 자유로운 바다 오리일지니!”
-설령 네놈의 말이 사실일지라도 그게 네놈의 배신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으리! 나의 눈아! 나의 꾀주머니야! 나와 함께 왕국을 이끈 것이 바로 네놈이 아니더냐!
맞는 말이다.
솔직히 칠링링보다는 그로밋이 드루이드 왕국을 위해 더 많이 일했다.
칠링링은 좋게 말하면 카리스마로 모두를 단결시키는 역할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바지 사장이었다.
-망국의 책임을 져야 한다면 내 바로 다음은 네놈일진저!
분노한 칠링링은 육신의 붕괴에도 거침없이 몸 밖으로 거대한 영혼의 팔을 꺼내 휘둘렀다.
몸뚱이에 힘이 없으니 그나마 있는 영혼의 힘이라도 쓰는 수밖에 없긴 했다.
내가 뒤로 크게 도약하며 신호를 주자 프레시아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순순히 죽어라! 옛 망령아!”
프레시아의 검에 선명한 검강이 맺히며 사도의 영혼을 베어냈다.
-으아아아! 감히!
영혼이란 육신이 있어야 보호를 받을 수 있었기에 미라 밖으로 삐져나온 거대한 칠링링의 영혼에 그대로 데미지가 들어갔다.
칠링링의 영혼의 팔이 프레시아를 짓눌러 죽이려 휘두르자, 제이드가 한껏 마력을 끌어올려 그의 영혼을 얼려버렸다.
-이따위 마법으로 감히 고의 영혼을 속박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쩌저적-!
제이드의 얼음이 박살 난 사이 프레시아가 빈틈을 놓치지 않고 칠링링의 미라를 노렸다.
가뜩이나 몸이 부실해서 전력을 내지 못하다 보니 칠링링도 다급하게 프레시아를 막았다.
“저랑도 놀아 보시죠! 선배님!”
소피아가 신성 마법으로 나무 넝쿨을 일으켜 다시금 칠링링의 영혼을 속박하며 프레시아에게 각종 보조 마법을 걸었다.
-방금 마법보다도 하찮다!
소피아의 신성 마법은 약간 주춤거리게 만들 뿐 큰 효과가 없었다.
그러나 소피아의 보조를 받은 프레시아는 그 찰나의 주춤거림을 놓치지 않고 칠링링의 영혼을 베어냈다.
-크아아악!
육신의 보호를 받지 못한 영혼은 신성력이 섞인 검강에 무수히 많은 상처가 났다.
칠링링은 영혼의 팔을 휘둘러 프레시아를 쳐냈지만, 프레시아는 그 팔을 사뿐히 밟고 높이 튀어 올라 묘실 천장에 거꾸로 서듯 발을 짚었다.
그러고는 튀어 오르듯 다시금 칠링링에게 뛰어들며 그의 영혼을 베어냈다.
-이 날파리 같은 것이!
프레시아는 핀볼처럼 벽과 천장 이곳저곳을 박차며 칠링링의 영혼을 깎아냈다.
칠링링은 프레시아를 처리하기 위해 거대한 영혼의 주먹을 휘두르며 드루이드의 마법을 펼치려 했지만, 그때마다 제이드와 소피아의 방해로 번번이 마법이 풀려버렸다.
-으아아아!!
분노 어린 영혼의 외침에 마력이 요동치자, 우리 네 사람은 그 압력에 밀려 벽에 처박혀 버렸다.
“커흑!”
내 연약한 몸이 충격에 못 이기고 피를 토했다.
숨쉬기가 살짝 가쁜 걸 보니 폐가 다친 듯했다.
내가 바람의 정령의 힘으로 재빨리 온몸을 감싸는 공기층을 형성해 나와 친구들을 보호하지 못했다면 크게 다칠 뻔했다.
“망할, 쉽지 않네. 죽어도 사도는 사도인 건가.”
내 투덜거림에 제이드는 무심하게 코피를 소매로 닦으며 말했다.
“그래도 방금 외침으로 마력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저게 고작해야 생전에 지닌 힘의 극히 일부라니, 소름 돋는군요. 생전의 힘에 몇 분의 일 정도 되는 것 같습니까?”
제이드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었다.
“글쎄? 한 20분의 1 정도밖에 안 될걸?”
“그럼 지금의 200배는 강했다는 소리군요.”
힘의 총량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수단이 많아지고 수단이 다양해진다는 건 그만큼 상황 대처에 능하다는 의미였다.
지닌 힘이 20배 많으면 상대하긴 200배 까다로워진다는 말이었다.
“뭐, 살아 있었을 때의 이야기고 내가 수작을 안 부렸을 때라면 50배 정도밖에 안 되지 않았을까?”
소설이라 체감은 잘 안 되지만 내가 느끼는 힘은 대충 그 정도였다.
아, 그것도 유적 내부의 가짜 미라보다 세월에 훨씬 풍화된 몸으로 내던 힘이었으니 이곳에서는 더 강하려나?
이곳은 그래도 신화시대의 환경을 그대로 구현한 덕에 세월에 따른 풍화가 훨씬 덜 되었을 터였다.
“그만 떠들고 어떻게 좀 해봐!”
식은땀을 흘리며 소리치는 소피아에게서 강력한 신성력이 요동쳤다.
신성력을 감추는 장갑의 힘을 뛰어넘어서까지 힘을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프레시아가 초고속으로 움직이며 격전을 치르고, 소피아가 신성력으로 프레시아의 뒤를 받쳐주며 칠링링의 최후의 발악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렇다는데, 그래서 준비는?”
내 물음에 제이드는 “잠시만요.”라며 기다려 달라고 했고, 십여 초가 지나자 제이드의 마법 지팡이가 빛나기 시작했다.
“다 됐습니다.”
“좋아, 프레시아!”
내 외침에 프레시아는 전력으로 일격을 날리고 뒤로 빠졌다.
-으아아아아!!
산도 무너트릴 공격에 부실한 육신의 칠링링은 피하지도 못하고 전력을 다해 그것을 맞받아칠 수밖에 없었다.
“디바이스 술식 기동.”
내 디바이스에 저장된 술식이 다시금 함수식을 그리며 사도 칠링링의 영혼을 봉인하기 위한 마법진을 펼쳤다.
“이윽고 순백의 시간이 파고들지어다! 겨울의 속삭임!”
마법진이 완성되기 전, 제이드의 마력이 칠링링의 육신에 파고들며 극한의 냉기를 방출했다.
-이, 이럴 순 없다! 대업이! 고의 백성들이 기다리…!
쩌저적-!
미라가 얼어붙으며 산산 조각나 무너져 내렸다.
미라가 소멸하며 그 육신을 이루고 있던 마력 결정이 땅에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내 디바이스의 봉인 술식이 위대한 드루이드의 왕이자 대지의 여신의 사도인 영혼을 옭아매 봉인했다.
“소피아.”
“예이! 알겠습니다요!”
다소 지쳐 보이는 소피아는 힘을 내서 바닥에 굴러다니는 보물들의 힘과 마수정에 담긴 사도의 힘을 추출해 봉인 위로 신성력 봉인을 덧대어 견고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열심히 영혼을 깎아내긴 했다지만, 사도의 힘이 빠져버린 마력 결정은 그 영혼을 봉인하기에는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일단 봉인한 뒤, 다시 마력 결정에 사도의 힘을 불어넣어 튼튼하게 만들었다.
갓 잡은 영혼은 마력 결정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부들거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잠잠해졌다.
나는 땅에 떨어진 마력 결정을 줍고 어느 수렵꾼처럼 외쳤다.
“칠링링, 넌 내 거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