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187화 (187/214)

제187화. 별자리를 거니는 히치하이커 (13)

우리는 그로밋의 안내를 따라 숨겨진 지름길을 통해 다른 직속 전사들의 묘실로 향했다.

이번에는 소피아가 묘실에 대지의 신성력을 불어넣지 않아도 그로밋이 알아서 문을 열고 묘실을 지키는 언데드들을 잠재웠다.

-이상하군요. 수호 전사들에게서 영혼의 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묘실을 지키는 언데드들은 왕의 직속 전사들의 정예 부하들이었다.

소설에서는 후반부에 등장한 덕분인지 하나하나가 초인급의 힘을 자랑했었다.

“그래서 고가 이상 사태가 발생하였다 하지 않았느냐.”

나는 무슨 당연한 말을 하는 거냐며 황금 관 옆에 있는 보물 상자들을 엎었다.

-왕이여?!

“내 새로이 신하가 된 이들에게 원하는 것들을 몇 개 주기로 약속하였다.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 보거라.”

“황공하옵나이다, 왕이시여!”

소피아는 능청스레 내게 맞춰주며 보물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러하다면 소신이 가장 좋은 것을….

“그만. 스스로 고르는 안목을 보고자 함이니 나서지 말라.”

-알겠나이다.

좋은 보물을 골라주려는 그로밋을 말렸다.

우린 좋은 보물을 찾는 게 아니라 가지고 나갈 수 있는 보물을 찾는 거다.

강력한 보물도 있었으면 좋겠지만, 유적 밖에 있는 원본 보물들은 대부분 세월에 풍화되어 못 쓰게 되었다.

칠링링은 삭아버린 신의 힘이 깃든 보물들을 보고 자신의 계획이 잘못되었음과 이미 오래 전 신화시대가 끝났음을 깨닫게 된다.

“소신은 이 정도면 충분하옵나이다.”

소피아의 장난기 가득한 말에 나는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물러나라 명했다.

그러고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보석을 주워 마력을 일깨웠다.

“일어나라, 나의 활이여!”

나는 머리에 쓰고 있는 그로밋의 황금 월계수 관의 힘으로 묘실 중앙의 미라를 일깨웠다.

흔들리며 들썩이는 황금 관을 본 그로밋은 감탄을 내뱉었다.

-역시 대단하십니다! 충격을 줘서 과하게 봉인된 영혼을 일깨우시는군요! 마치 어디 멀리서 영혼을 끌어오는 것 같습니다!

것 같은 게 아니라 그런 거다. 눈치가 빠른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

-으으으…! 누가 감히 나의 왕을 참칭하는… 그로밋?

충격받은 듯 부들거리는 미라가 몸을 일으키더니 그로밋을 보고 당황했다.

-예를 갖춰라, 아칵. 왕의 앞이다.

그로밋이 날 가리키자 열세 전사 중 하나인 아칵은 머리를 짚었다.

-우욱…! 누가 영혼을 끌어다 내팽개친 느낌이야. 그런데 정말 …왕이십니까?

“그렇다, 오줌싸개야.”

-아니! 언제 적 일을 아직도! …하핫! 그렇군요. 소장(小將)이 왕을 배알하나이다.

황금 관에서 비틀거리며 나온 아칵은 내 몸이나 뒤에 있는 내 일행에 대해 일언반구하지 않고 내 앞에 부복하며 예를 갖췄다.

“일어나라. 아직 깨워야 할 이들이 많으니.”

-다음 묘실로 가시지요, 왕이시여.

그로밋은 앞장섰고, 아칵은 땅에 널브러진 자신의 활과 화살 꾸러미를 챙기고 뒤따랐다.

그로밋을 깨워놓으니 크게 설득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구만.

* * *

별자리 미궁 심부 전갈자리 구역 중에서 숨겨진 미답역(未踏域) 안타레스 알파성지(星地).

그곳에서 검마 아나스타샤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손에는 저주의 마력이 흐르다 못해 액화(液化)되어 뚝뚝 떨어지는 마검이 들려 있었다.

“이걸로 다섯 개.”

앞섶을 풀어헤친 그녀는 가슴을 찌르듯 마검을 포식했다.

“으윽…!”

백옥처럼 새하얀 피부 위로 검은 저주가 혈관처럼 도드라지며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현기증을 느끼는지 비틀거리는 사이, 거대한 본 드래곤이 사기(死氣)를 내뿜으며 그녀에게 아가리를 벌리며 달려들었다.

아나스타샤는 신화시대의 괴물의 공격에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가슴을 부여잡으며 마검을 소화하기 위해 애썼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드래곤의 이빨이 그녀를 짓이기려는 찰나, 백여 미터의 본 드래곤이 반으로 갈라지며 마력 결정을 남기고 소멸해 버렸다.

어느새 검집에서 뽑혀 나온 칠흑의 검신이 소멸하는 본 드래곤의 마력광에 반짝였다.

“후우… 단기간에 다섯 개는 조금 무리였나.”

신화시대에 악명을 떨친 전설적인 마검 다섯 개가 다시금 세상에 빛을 보기 전에 소멸했다.

그만큼 그녀의 마력이 날카로워지고 방대해졌지만, 동시에 위험하기도 했다.

“후후.”

아나스타샤는 몸에 느껴지는 부담에 한 소년을 떠올리며 웃었다.

“제이드 소년…인가. 좋아했으면 좋겠는데.”

마검을 포식하는 것을 보고 위험하다 말리던 잿빛 머리의 소년은 너무나 그리운 마력을 품고 있었다.

소년을 떠올린 그녀는 땅에 떨어진 주먹보다 큰 마력 결정을 챙겼다.

그러고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점성술로 다음 목표물을 점치던 그녀는 눈을 반짝였다.

“문이 열렸나. 흔치 않은 기회니 돌아가야겠군.”

아나스타샤는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 * *

“이번이 마지막 묘실인가.”

-그렇나이다, 왕이시여.

그로밋의 안내를 따라 전사들의 묘실을 돌아 보물들을 챙기고 칠링링 왕의 열세 심복들을 기나긴 잠에서 깨웠다.

별자리 미궁이라는 신화시대의 환경 덕분인지 그 누구도 지금이 신화가 끝난 시대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살아 있는 몸이 아니라 감각이 많이 둔해지고, 원래 영혼이 잠들어 있었을 왕묘에서 시공간이 왜곡된 이곳에 강제로 강령되느라 타격을 받은 탓이 컸다.

“이곳이 고가 잠들어 있는 곳이구나.”

내가 아련하면서도 씁쓸하게 말하자 칠링링 왕의 부하들은 고개를 숙이며 날 위로하였다.

-소장이 미욱한 탓에 끝까지 보필하지 못하였나이다. 벌하여 주시옵소서.

-소신이야말로 위대한 대업을 완수하지 못하였나이다. 저를 벌하여주시옵소서.

-아니옵니다. 저야말로….

앞다투어 자신의 잘못을 청하는 미라들에게 나는 손을 들어 말렸다.

“그만. 누구를 벌하고자 꺼낸 말이 아니었노라.”

그리고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저 지난 일이 불현듯 떠올라 그러할 따름이니 그대들이 죄책감을 가질 일이 아니다.”

-왕이시여….

-왕이시여….

칠링링 왕의 검, 데벰버브와 왕의 눈, 그로밋은 아련하게 날 바라봤다. 그렇게 바라보니 살짝 양심에 찔리는구만.

“굳건한 대지의 새로운 성인(聖人)이여.”

“소첩은 여기 있나이다. 하명하소서, 왕이시여.”

소피아는 능숙하게 허리를 숙이며 깍듯한 신하처럼 굴었다.

“그대가 문을 열라.”

내 말에 열세 위의 미라들은 놀라 나와 소피아를 바라봤다.

수군거리지 않고 침묵했지만 대충 나와 소피아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자신들보다 총애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는 것이 뻔히 보였다.

“명을 따르겠나이다.”

소피아는 엄숙히 문에 손을 얹고 대지의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그로밋이 열 때와 달리 내부의 경비용 언데드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왕이 잠들어 있는 왕묘의 중심지에는 다른 곳보다 휘황찬란한 보물들로 가득 쌓여 있었다.

“나의 눈이여.”

-하명하소서, 왕이시여.

내 부름에 그로밋은 허리를 숙이며 내 말을 기다렸다.

“고의 옛 육신에는 아직 강대한 힘이 담겨 있노라.”

-그러하옵나이다.

“새로운 육신으로 넘어올 때 영혼만 간신히 이동한 탓이지. 당장이라도 저 힘을 다시금 이 육신에 불어넣고 싶으나 이 연약한 육신은 버티지 못할 터.”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이드가 큼지막한 마수정(魔水晶)을 꺼냈다.

아바스엘이 내가 정한 경로로 오면서 숨겨진 곳에서 찾아온 거대한 마력 탱크였다.

지금은 아무 마력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신화시대의 물건인 만큼 저장 용량은 현 시대의 것과 차원이 다르다.

“일단 이곳에 넣고 천천히 시간을 들여 새로운 육신에 흡수할 생각이다.”

-혜안이시옵니다. 소신들이 기쁘게 행하겠나이다.

꾀주머니 소리 듣던 양반답게 내가 말을 꺼낸 이유를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무려 일곱 주신 중 하나의 사도씩이나 했던, 괴물의 성해(聖骸)였던 만큼 힘을 뽑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가 굳이 잘 자고 있던 놈들을 깨워서 데려온 이유기도 했다.

열세 위의 미라들도 생전에는 대지의 여신의 성인 반열에 오른 성직자이자 하나하나가 경천동지할 괴물들이었으니까.

“여기 있노라.”

내가 직접 마수정을 건네자 공손히 받은 그로밋은 칠링링의 유해, 정확히는 유해의 복제 앞에 마수정을 놓고 마법진을 그렸다.

그러고는 다른 열두 위의 미라들을 한곳에 모아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아함-아산느-브흐브뉴-로프….

열세 위의 미라들은 있는 힘을 다해 그로밋의 인도를 따라 칠링링 왕의 미라에서 신성한 힘을 뽑아냈다.

제아무리 성인 반열에 오른 열세 괴물이라 해도 사도의 힘을 다루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칠링링의 힘을 뽑아낼수록 왕의 직속 전사들이 품고 있던 힘도 한껏 깎여 나갔다.

살아 있는 육신이었다면 땀범벅에 당장이라도 탈진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마력이 쪼그라들고, 힘겨운 듯 몸을 비틀거렸다.

-이제 끝이다!

거대한 마력 탱크가 가득 차오르고 강대한 힘을 지녔던 미라가 그 힘을 대부분 상실한 순간, 한 줄기의 섬광이 그들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어?

스르르릉.

그들의 몸이 상반신과 하반신으로 나누어지며 무너져 내렸고, 프레시아는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그로밋이 당혹과 분노, 그리고 치욕을 담아 외치자 프레시아는 담담히 대답했다.

“당신들의 대업이란 게 무고한 이들을 인신 공양하는 것이라면 하게 할 순 없습니다.”

프레시아의 말에 바들바들 떨며 땅을 짚는 미라들은 미친 듯이 분노하며 살기를 내뿜었다.

-어찌 그런 같잖은 정의감으로 왕과 우리를 배신한단 말이냐!

-왕이시여! 저 무례한 년을…!

나는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아, 실례. 나는 너희들의 왕이 아니거든.”

내가 황금 월계수 관을 벗으며 신사처럼 인사하자 그들은 경악했다.

-그, 그럴 수가! 분명 다른 이들은 모르는 왕과의 추억이었는데!

-가, 감히 왕을 참칭하다니!

-씹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사기꾼이!

반응을 보아하니 그들의 눈에 비치는 내 영혼의 색이 칠링링 왕과 많이 다른 듯했다.

“뭐래? 속은 놈이 병신인 거지. 인신 공양이나 하는 야만인들이.”

-이 개새…!

나는 더 이상 들어주기 싫어서 디바이스에 저장 카트리지를 갈아 끼우고 미리 저장해 둔 봉인 술식을 가동했다.

-으아아아악!!

굉장히 복잡하고 마력이 많이 드는 마법이었지만, 다행히 이곳에는 유적의 힘으로 만들어진 보물들이 많은 데다 거대한 용량의 마력 탱크를 가득 채운 사도의 힘이 있었다.

-감히! 감히!

-네놈을 저주하고 또 저주할 것이다!

-굳건한 대지의 저주가 있으라!

악에 받친 저주에도 유적이 만든 몸뚱이는 소멸하며 씨알 굵은 마력 결정만 남겼다.

내가 가동한 디바이스의 봉인 술식은 열세 위의 영혼을 옭아매고 땅에 떨어지는 마력 결정에 단단히 봉인했다.

저들의 영혼은 원래 있던 곳으로 가지 못했으니 나중에 천천히 저들의 진짜 육신만 처분하면 미래의 재액을 하나 막은 셈이다.

“멍청이들, 여기에 대지의 여신이 총애하는 성녀가 있는데 저주는 개뿔이.”

그들이 언데드가 된 시점에서 생명을 관장하는 대지의 여신과는 인연이 다한 지 오래였다.

차라리 대지에서 달로 개종하거나, 죽어서 아예 신의 곁으로 갔으면 신계에서 떵떵거리며 잘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후 세계라는 게 있다면 말이다.

“자, 이제 마지막 골수까지 빨아먹어 볼까?”

나는 건어물처럼 힘을 다 빨린 우리의 위대한 드루이드 왕의 미라를 보며 미소 지었다.

“일어나라, 왕이여.”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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