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6화. 별자리를 거니는 히치하이커 (12)
강대한 기운과 살기에 나를 제외한 세 사람은 본능적으로 각자의 무기를 움켜쥐며 전투태세를 갖췄다.
나는 세 사람이 공격하기 전에 앞서 나가며 엄숙히 말했다.
“어리석도다. 죽음으로 눈이 흐려졌는가! 나의 눈이여!”
내 외침에 세 사람은 당황하기보다는 또 뭘 하려는 건가 궁금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뭐라?!
“네가 바친 이 월계수 관이 보이지 않는가! 짐승들의 호민관, 동부 전선 사령관, 피 대신 철이 흐르는 상국(相國), 그리고 나의 꾀주머니여!”
나는 내 머리에 쓴 월계수 관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관을 열고 일어난 미라를 다독이듯 말했다.
“그도 아니면 내가 그대를 뭐라 불러야 하겠는가? 바다 오리여.”
‘바다 오리’라는 호칭에 미라를 둘러싼 짙은 사기(死氣)가 크게 흔들렸다.
극소수만 아는 칠링링의 오랜 벗을 부르는 애칭을 듣자 혼란을 느끼는 듯했다.
막 죽음에서 깨어나 머리도 제대로 안 돌아가는 언데드 하나쯤 속여먹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로밋의 황금 월계수 관에는 고대 드루이드의 마도서 말고도 한 가지 기능이 더 있었으니, 바로 마력을 숨겨주는 기능이었다.
고대 드루이드의 마법 이론에 따르면 마력이란 영혼의 색이라고 했다.
즉, 마력을 숨겨주면 저 헛똑똑이 언데드는 내가 칠링링인지 아닌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허, 허나. 지금 이곳이 묘실이란 것은 왕도…!
“죽었지. 아직도 잠에서 덜 깬 것이냐? 어찌 그리 뒤뚱거리는 게냐, 오리야.”
-크흠…! 내가 오리라고 하지 말랬지! 바다 오리라고!
“허, 오리나 바다 오리나.”
-날지도 못하는 것과 비교하지…! 큭, 크하하핫! 이런 대화가 얼마 만인가!
그로밋은 유쾌하게 웃더니 언데드의 몸이 익숙하지 않은 듯 중심을 잘 잡지 못하며 관에서 빠져나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왕국에 영원한 번영이 있으리. 상국 그로밋이 위대한 왕을 다시금 배알하나이다.
“그래, 이제 정신이 좀 드는가?”
내 물음에 그로밋은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송구하옵게도 아직 정신이 없나이다. 마치 영혼이 한 번 빠져나가 멀리 이동한 듯한 충격이라도 받은 것 같습니다.
역시 고대의 현자다. 정답을 맞혔다.
별자리 미궁은 실제 있던 것을 구현한 신화시대의 유적이다.
그 말인 즉, 이 세상 어딘가에 칠링링 왕의 묘소가 존재한다는 말이었다.
지금 그로밋의 육신은 신화시대의 힘으로 만들어진 진짜 같은 가짜 육신이었고, 영혼은 진짜 육신과 함께 봉인되어 있다가 이곳으로 갑자기 끌려오게 된 거다.
그러니 정신이 없지.
이 유적은 육신은 구현할 수 있어도 영혼은 만들어 내지 못했다.
이곳이 제아무리 신화적인 공간이라도 한계는 있다는 의미였다.
나는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예상보다 더 많은 시간이 지난 탓이다. 우리 사후에 계획한 대업이 무너져 내렸다.”
대업이 무너져 내렸다는 말에 그로밋은 큰 충격을 받은 듯 놀라서 내 허락이 있기도 전에 고개를 들었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충격적인 일이라.
다시 고개를 숙이려는 그를 손을 들어 제지했다.
“되었다, 나의 벗이여. 편히 있으라.”
-알겠나이다, 왕이시여.
“대업이 무너진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깨어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그, 그럴 수가! 우리를 깨워야 할 후손들은 무엇 하고!
붕대에 돌돌 말려져 있었지만 충격받은 기색이 가득했다.
“그것은 알 수 없다. 그저 후손들이 우리를 깨우지 못했다는 사실만 짐작할 뿐이다.”
나는 부들부들 떠는 그로밋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아직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 하였지. 그러니 확인 차 묻겠다. 우리의 대업은 무엇이냐.”
내 물음에 그로밋은 주먹을 움켜쥐며 대답했다.
-다시금 드루이드 왕국의 영광을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적들을 죽이고 공양(供養)하여 왕국을 넘어선 대제국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이 미친 야만인은 적들을 사냥해 인신 공양하겠다고 당당히 선언하고 있었다.
이런 것도 현자라 불리는 시대라니, 신화라는 게 말만 그럴듯하지 미친 시대라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왕국이 무너졌다면 어찌 할 것이냐?”
-왕국이 무너졌다니! 왕이시여! 어찌 그런 참담한 말씀을 하시나이까!
“나의 눈아, 나의 꾀주머니야! 정신을 아직도 차리지 못하였구나! 대업이 무너졌음은 최악의 상황마저 가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의 꾸지람에 그로밋은 황송하다는 듯이 고개를 땅에 박았다.
-송구하옵나이다! 소신이 먼저 고민하였어야 하건만 그러하지 못하였나이다. 미욱한 신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용서하마. 아직 죽음이란 달콤한 잠에 취하였을 뿐일진저, 죄가 없다. 나의 눈은 질문에 답하라.”
-만일 왕국이 무너졌다면… 다시 세워야 함이 옳겠나이다.
“어찌 다시 세워야 할까?”
-감히 참람하게도 아국의 영토를 범한 적들부터 그 목을 베어 신께 바쳐 힘을 기르는 것이 옳음이라 알고 있나이다.
그로밋의 말에 내 뒤에 선 세 사람이 움찔했다.
드루이드의 왕국은 이미 먼 고대에 망해 사라졌으니, 저 야만인이 할 만한 짓이 무엇인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칠링링이 대지의 여신의 사도였으니 당연히 그 제물을 받는 건 대지의 여신이었다.
여기 신은 죄다 미친놈들이라니까.
그걸 준다고 받고 힘까지 내려주다니 말이야.
“나의 눈의 말이 참으로 옳구나.”
신화시대였으면 그랬겠지. 하지만 지금은 신화가 끝나다 못해 한참 지난 시기라 아무리 사람 모가지를 가져다 바쳐도 대답해 주지 못한다.
정확히는 대답해 주기 힘들다.
신화시대의 적이라고 하면 어지간해선 반신이나 신혈, 그도 아니면 특수 혈통이었으니 바치는 족족 그만큼의 힘을 내려줄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망극할 따름이나이다.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한 미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와 내 뒤의 세 사람을 바라봤다.
-왕이시여, 이 미욱한 신이 여쭙고 싶은 것이 있나이다.
“무엇이냐.”
-어찌 왕께서 생육신(生肉身)을 짊어지시고 소신이 모르는 자들과 함께 계시나이까?
그의 물음에 나는 별것 아니라며 대답했다.
“이들은 고를 보필하는 새로운 신하들이다. 특히 이 여아는 굳건한 대지의 성은을 입은 아해지.”
내가 소피아를 가리키자 그로밋은 소피아를 주시하였다.
-…그렇습니까?
영 모르겠는지 고개를 갸웃하자 소피아는 내 눈치를 보다가 내가 손에 눈짓을 주자 장갑을 슬쩍 벗었다가 다시 꼈다.
그 잠깐 사이에 성녀의 힘을 읽어낸 그로밋은 감탄했다.
-오! 확실히 그렇군요. 굳건한 대지의 사도이신 왕만큼은 못하나 그럭저럭 쓸 만한 아해입니다.
평가가 박했지만 신이 신화시대에 내릴 수 있는 힘의 크기랑 현세에 내릴 수 있는 힘의 크기가 다를 테니 어쩔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소피아도 시대를 잘못 태어났다.
신이 신탁까지 내리며 살리려는 걸 보면 신화시대에 태어났으면 사도 수준이 아니라 새로운 하위 신으로까지 격상해 줄 정도로 총애하는 것 같던데 말이다.
“그리고 이 육신은….”
뭐라고 설명하지? 소설 속에 나온 칠링링의 어투나 부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는 알 수 있었지만, 이런 변명을 만들어 내는 건 어려웠다. 에라이! 모르겠다! 그냥 애드리브로 때워야지.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허약해 빠졌으나 그나마 자연의 사랑을 받는 몸이라 그냥저냥 넘어갈 뿐이다.”
-오오오!! 그렇습니까? 왕께서 그렇게 고평가를 할 만한 육신이라니. 부럽습니다!
그로밋은 내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정말로 부러운 듯 눈가의 귀화(鬼火)가 요동쳤다.
황금 월계수 관 때문에 내 마력은 물론, 내 몸에 붙어 있는 정령들도 못 읽어낼 텐데, 한 점의 의심도 없었다.
정령술에 재능이 있어서 대충 그럴듯하게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자연의 사랑을 받는 게 드루이드에게 그렇게 큰 의미인 건가?
“크게 부러워할 정도는 아니다. 그보다 어서 고의 다른 신하들도 깨우러 가자꾸나. 아직 왕묘의 중심에는 고의 옛 육체가 잠들어 있으니,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내 말에 그로밋은 자신을 가장 먼저 죽음에서 깨워줬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소신이 앞장서겠나이다. 소신이 이곳을 설계하여 지름길을 잘 아나이다.
충실한 왕의 신하인 그로밋은 기쁜 마음에 바닥에 널브러진 보물 더미에서 자신의 마법 지팡이를 꺼내 들고 지름길인 비밀 통로로 우리를 안내했다.
* * *
“이제 어떻게 할 거지?”
로툴러스의 물음에 생각에 잠겨 있던 아멜리는 잠시 눈을 감으며 미간을 좁혔다.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였지만 어느 것이든 적잖은 손해를 각오해야 했다.
다시 되돌아가는 시간적 손해냐, 아니면 사람을 두고 가는 인적 손해냐.
당연하게도 구역과 구역 사이에 설치된 보안 마법을 뚫고 지나가는 강행돌파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염두에 두긴 했으나 34명 전원이 움직이는 선택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용병왕님은 어떻게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멜리의 물음에 로툴러스는 일행들을 한번 훑고 대답했다.
“네 개인을 생각한다면 뒤로 물러나서 허가증과 식량을 구해 오는 게 좋다.”
“집단은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지. 단, 그럴 경우 시간제한을 두고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야한다.”
식량이 극단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앞으로 나아간다는 선택지는 남겨진 이들을 굶겨죽이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모든 것이 가짜인 세상에서 짐승을 사냥해도 배속에 집어넣어 소화시키기도 전에 사라질 뿐이었다.
그나마 가짜라도 잠깐의 허기나 달래면 다행일 터였다.
별자리 미궁은 심부로 나아갈수록 시공간 왜곡이 심해졌다.
심부에서 1년의 시간을 보내고 왔지만 초입에선 한 달 남짓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을 경우도 충분히 가능했다.
반대로 심부에서 하루가 초입에서의 한 달일 가능성도 있었다.
“감이 좋지 않아. 개인적인 예감에 불과하지만 나아가지 않는다면 임무를 실패할 것 같다.”
전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길러진 육감은 그들을 뒤통수 친 도둑놈이 무슨 목적이 있었다고 속삭였다.
“구조 신호에 대한 대답은 있나요?”
아멜리의 물음에 마도구를 잡고 열심히 마력파를 쏘아 보내던 사제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유적 내부는 외부와 단절된 공간이었지만 내부끼리라면 신호를 보내는 것 자체는 가능했다.
시계를 대체한 마도구인 천체시계(天體視計)의 원리는 시간축이 아닌 새롭게 정립한 5차원 축을 측정하여 내부의 공통적인 시간 흐름을 기록하는 마도구였다.
기록할 수 있다는 건 반대로 기록을 방류할 수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천체시계는 구조 신호 마도구이기도 한 셈이었다.
“이상하네요. 작은곰자리의 유물 관리 청사에서는 24시간 천체시계를 확인할 텐데 아직까지 반응이 없다니.”
탐험가의 말에 로툴러스와 고고학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몰랐지만 유안의 지시를 받은 아바스엘이 몰래 살짝 고장 냈기 때문이었다.
“별수 없군요, 철수를….”
“앗! 수신 양호! 여기는 바다-1! 여기는 바다-1! 수신 감도 3! 수신 감도 3!”
에밀리가 결단을 내리기 직전 기적처럼 유물 관리 청사에 구조 신호가 닿았다.
시공간이 왜곡된 미궁에서 운이 좋게 작은곰자리 구역의 시간이 빠르게 흘렀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정기 점검을 거치다 고장이 발견된 결과였다.
구조 신호가 닿은 것을 확인한 아멜리는 자신이 내린 결단을 번복했다.
“저희는 심부로 나아가겠습니다. 저와 로툴러스 님이라면 세 명 정도는 더 보호할 수 있겠죠?”
허가증 하나에 등록할 수 있는 인원은 총 20명, 그러나 아멜리는 한 명이라도 더 데려가고자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로툴러스는 씨익 웃었다.
“네 명도 가능하다, 성녀.”
“믿음직스럽네요.”
아멜리는 뒤로 돌아가기보다는 앞으로 나아가기를 선택했다.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