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5화. 별자리를 거니는 히치하이커 (11)
나와 프레시아, 제이드, 소피아를 분신으로 바꿔치기하는 동안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심지어 검성(劍聖)의 스승이자 초인으로 이름 높은 성기사 데일호르그도 이상한 위화감에 미간을 좁히며 두리번거릴 뿐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나도 나름 정령술에 능숙해진 모양이다.
나는 만족하며 인형의 조종권을 아바스엘에게 넘겼고 아바스엘은 인형을 조종했다.
게오르의 의발을 전수받은 나나 실루아처럼 능숙하게 다루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움직이는 건 가능했다.
다만 자연스럽게는 조종 못 하는지 인형들이 행군하는 군인들처럼 발을 맞추기 시작했다.
음,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지는 못하겠군.
일직선 통로를 지나 두 갈래로 갈라지는 내려가는 계단이 나오자 나는 아바스엘에게 지시를 내렸다.
-왼쪽으로 가길 유도해 줘.
고개를 끄덕인 아바스엘은 아이젤 탐험단의 부단장에게 말을 걸었고 나는 프레시아, 제이드, 소피아를 데리고 오른쪽 길로 내려갔다.
그 순간 데일호르그가 이상함을 느끼고 기감을 펼치려는 걸 야드가 눈치 빠르게 말리는 게 보였다.
“눈치 빠른 영감님이구만.”
계단을 다 내려온 나는 투명화를 풀었다.
어차피 언데드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투명화해 봤자 마력만 낭비였다.
“그래도 우리가 일행들과 떨어지기 전까지는 모르셨던 걸 보면 대단한데? 아저씨는 초인에 신성력까지 출중하기로 유명하거든.”
소피아의 감탄에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 정령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럴 거야. 익숙해지면 느끼기 쉬운 게 정령의 힘이거든.”
내 말에 프레시아와 제이드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유안이나 느끼기 쉽지 저흰 전혀 아닙니다.”
두 사람의 부정에 나는 놀랐다.
“어? 진짜?”
이렇게 느끼기 쉬운 힘을 모르겠다고? 그냥 주변에 마구잡이로 있다 없다 하던데?
내가 당황하자 제이드가 어이없다는 듯이 날 바라봤다.
“정령의 힘이 느끼기 쉬웠으면 정령술사가 그렇게 적을 리 없지 않습니까.”
“아, 그렇게 말하니 그런 것 같기도.”
생각해 보니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공감은 못 하겠지만.
“그래서 이렇게 몰래 빠져나온 걸 보면 보물을 먼저 선점하려는 거지?”
소피아의 물음에 나는 씨익 웃었다.
“당연하지. 나비가 비밀 방을 전부 파악해 놨으니 왼쪽 길로 간 사람들이 어그로를 끄는 사이 빠르게 털 거야.”
언데드는 신성력과 생명력에 끌리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성을 가지고 있어도 신성력과 접촉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고 하는데, 이성이 없다면 그야말로 불나방과 같은 게 언데드였다.
마침 저쪽은 유능한 성기사와 성수까지 사용하는 반면, 이쪽은 신성력을 감추는 성물로 힘을 가릴 수 있었다.
“아이젤 탐험단에게 성수를 준 이유가 그거 때문이었어?”
소피아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왜 아까운 성수를 그냥 주겠어?”
성수는 기본적으로 신성력이 누수하지 않도록 마법 처리된 병에 담겨 언데드가 잘 꼬이지 않았다.
하지만 성수의 밀봉을 한번 풀고, 무기에 바르거나 환부에 바르면 설탕물에 꼬이는 꿀벌처럼 언데드가 잔뜩 꼬이게 될 거다.
일부러 상급 성수의 밀봉을 한 번 풀고 줬으니 기대해도 좋았다.
내 대답에 소피아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푸하하하핫! 정말 못됐다니까!”
“그래서 별로야?”
“아니, 더더욱 마음에 들었어.”
내가 의외라는 듯이 바라보자 소피아는 유쾌하면서도 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게 볼 필요는 없어. 그들에게 시련만 주고 너만의 이득을 취했다면 나도 이렇게까지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하지만 너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줬을 뿐더러 시련을 이겨내는 데에 필요한 도움까지 줬잖아. 이곳에서의 경험은 그들에게도 크나큰 자산이 될 거야.”
소피아의 눈은 짙은 신성력으로 빛났다.
도움이라니, 어떻게 알았지? 이게 바로 초직감인 건가.
나는 왕묘에 들어오기 전에 아바스엘에게 정말 위험한 구간과 회피 방법을 일러줬다.
아바스엘이 있다면 저쪽이 고생은 할지언정 사망자까지 나오진 않을 터였다. 아마도.
“쳇, 놀리는 맛이 없구만.”
그나저나 저렇게 신성력이 짙게 서렸는데도 전혀 그런 느낌이 나질 않는 걸 보니 소피아가 끼고 있는 장갑이 얼마나 강력한 성물인지 체감되었다.
기도할 때는 일부러 은은하게 흘렸던 걸 보면 몸 밖으로 내뿜는 건 조절 가능한 건가?
내 투덜거림에 소피아는 으스대듯 가슴을 내밀었다.
“후후후, 이 누님을 놀리려면 멀었어.”
“뭐래? 난 1월생이고 넌 4월생이잖아. 굳이 따지자면 내가 오빠지.”
나와 소피아는 동갑이었다. 영혼의 연령을 따지면 당연히 연상이었고.
“흥흥, 쫌생이. 더 늙어서 좋겠다.”
소피아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래서, 어떻게 움직일 거야? 나 이런 거 동경했어! 두근두근한 모험! 엘도라도 모험기 같은 거!”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흥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삶은 모험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녀는 보통은 옛이야기처럼 영웅이나 용사의 모험에 함께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당연하게도 위험하기 때문이다.
교황이 세속 신앙의 상징이라면 성녀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상징이었으니 혹시라도 깨질 섬세한 유리그릇처럼 다뤄지기 마련이었다.
물론 반드시 그런 건 아니고, 역사를 뒤져보면 건국 시조와 함께 모험했던 대지의 성녀 달리아나처럼 도망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아퀼라의 일기에 따르면 달리아나는 교황이 진행하는 공개 미사 중에 교황의 가발을 벗겨버리는 장난을 쳐서 근신했다가 탈주했다고 했던가?
천진난만하게 눈을 반짝이며 묻는 말에 나는 앞장서서 걸으며 대답했다.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앞서 설명하자면, 이 드루이드 왕의 왕묘는 신화시대에서도 명성 높은 ‘칠링링’ 왕의 묘야.”
“…칠링링?!”
소피아는 놀라서 날 바라봤다.
드루이드 왕, 칠링링. 고대의 강력한 정복 군주이자 당시 대지의 여신의 사도였던 자였다.
그런 만큼 이곳에는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물건들이 예장(禮葬)되어 있었으니 소피아에게는 도움이 될 만한 물건들이 가득했다.
원래는 나중에 차기 성자 꼬맹이를 동료로 꼬실 때 사용할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소피아에게 쥐여주는 게 좋겠지.
“참고로 왕묘 밖에 서 있던 열세 개의 석상은 왕의 직속 전사들을 함께 기리기 위해 세워둔 것들이지. 우선 열세 명이 잠든 곳을 들러서 왕이 잠든 묘실로 들어갈 열쇠를 얻을 거야.”
당연히 전사들의 부장품도 함께 가져갈 생각이었다.
“아, 저 벽돌은 밟지 마. 밟으면 저기서 화살이 튀어나올 거야.”
나비가 탐색한 대로, 함정을 피해 미로 같은 복도를 거침없이 지나가는 동안 칩입자를 맞이하기 위해 나왔어야 할 언데드들은 한 마리도 나오지 않았다.
은하의 힘으로 허공에 떠 다니는 가짜 정령들에 간섭해 반대편 길을 살펴보니 저곳은 한창 함정과 언데드와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완전 바퀴벌레 떼가 따로 없구만.
언데드가 너무 많이 몰려서 전투로 부서지는 언데드보다 다른 뼈다귀에 밀리고 엎어져 밟혀 으스러지는 뼈다귀가 더 많아 보일 지경이었다.
덕분에 나야 편해졌지만 말이다.
“이쯤인가.”
으드드-!
벽돌을 누르자 벽면이 흔들리더니 이내 무너져 내려 비밀 문을 드러냈다.
“와아! 이런 문이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아무리 견고하게 만들어 봤자 고대 기술로는 공기 틈 하나 없이 막는 건 불가능하거든.”
-미야~!
내 말에 동조하듯 나비가 고개를 치켜들며 기분 좋게 울었다.
나는 나비의 턱을 손가락으로 간질이며 소피아에게 고갯짓했다.
“이 문에 대고 짧고 굵게, 언데드가 끌리지 않도록 신성력을 불어넣어.”
내 지시에 소피아는 장갑을 끼지 않은 손으로 문을 짚고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문이 간단히 열렸다.
“어? 이게 다야?”
대지의 여신의 사도가 잠들어 있는 왕묘인 만큼 소피아의 신성력은 그야말로 마스터키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없어도 문을 열 방법은 준비해 뒀지만 쉽고 간단한 방법이 있는데 쓰지 않는 건 멍청한 일이지 않은가.
“정석은 아니지만 정석대로 열었으면 방을 지키는 미라가 깨어나서 전투를 벌였어야 했을걸?”
방 벽면에는 수인(獸人)의 형상을 한 황금관이 줄지어 서 있었다.
“황금인 거 같은데 비싸지 않을까?”
“저 관은 유적이 만들어낸 가짜야. 물론 이곳이 만들어지며 시공간 왜곡에 휘말려 들어온 부장품들도 있으니, 그건 챙겨 가자고.”
묘실 중앙에는 칠링링 왕을 따르던 성기사의 미라가 담겨 있는 관이 있었고 관 옆에는 보물 상자가 가득했다.
“여기 있는 보물을 전부 챙깁니까?”
제이드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무 무거운 데다 대부분 가짜거든.”
“그럼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하긴, 우리에겐 소피아가 있잖아. 소피아한테 끌리는 것만 가져갈 거야.”
내 말에 소피아는 자신 없는 듯 양 손을 들어 보였다.
“가짜를 골라도 난 몰라.”
“걱정하지 마. 고르다 보면 느낄 수 있을 거야.”
소피아의 후임인 차기 성자는 잘만 찾아냈다.
그러니 소피아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거다.
특히 그녀는 차기 성자도 지니지 못한 초직감까지 가지고 있지 않은가.
내 말에 소피아는 보물 상자를 하나씩 뒤집어 까고 고대 금화와 화려한 보물들을 뒤적였다.
“음, 이 반지 하고 이 팔찌도 괜찮은 것 같고. 오! 이 보석 예쁘다! 그런데 안 끌리네. 이 황금 월계수 관도 좋고.”
나라고 소피아가 고르는 보물들을 모두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여기서 얻은 보물들은 몇몇 개 외에는 그저 ‘얻었다.’라는 말로만 넘어갔을 뿐, 딱히 재등장하지 않는다.
아마 대부분 나중에 꼬맹이 성자가 대지의 여신의 힘을 신계에서 지상에 끌어내는 데 재물로 사용했던가?
그래도 개중 소설에서 언급되고 유용하게 사용된 보물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그로밋의 황금 월계수 관’.
이 묘실의 주인인 드루이드 왕의 지혜 주머니이자 칠링링의 눈이라 불린 현자, 그로밋 아우쿤스웨이.
그는 죽기 전 자신의 모든 지식을 담은 월계수 관을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고 전해진다.
그 기록이 사실인 듯, 저 관을 쓰면 드루이드의 마법을 배울 수 있었다.
말하자면 신화시대의 마도서인 셈이었다.
그리고 저 황금 월계수 관은 마도서외에도 한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다 골랐어?”
“으음~ 다 고른 것 같은데?”
소피아의 손에 들린 유물은 총 열여섯 개.
반지 다섯 개, 월계수 관 하나, 짧은 마법 지팡이 세 개, 팔찌 두 개, 마법이 담긴 보석 구슬 네 개, 스크롤 죽간(竹刊) 하나.
소설보다 세 개나 많은데?
뭐, 많으면 좋은 거지.
꼬맹이 성자와 초직감 성녀를 비교하자면 감각에 있어선 후자가 더 믿음직했다.
“수고했어.”
나는 돌돌 말린 죽간과 황금 월계수 관을 들고 나머지는 프레시아가 매고 있는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땅에 널브러진 보물 중 강한 마력을 품고 있는 보석을 주웠다.
“이 보석이나 보물들도 당장 써먹긴 좋거든.”
나는 황금 월계수 관을 쓰고 보석에 마력을 불어넣어 보석의 마력을 활성화했다.
눈앞에 황금 월계수 관에 기록된 그로밋의 마법들이 떠올랐지만 의식적으로 치우며 외쳤다.
“일어나라, 나의 눈이여!”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마력을 컨트롤해 그로밋의 미라가 담겨 있는 황금관에 불어넣었다.
“이 땅에 다시금 왕이 강림하였으니! 일어나라! 나의 눈이여!”
그러자 황금관이 활짝 열리며 지독한 사기(死氣)와 살기(殺氣)가 뿜어져 나왔다.
-누가 감히 나의 왕을 참칭하는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