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3화. 별자리를 거니는 히치하이커 (9)
아이젤 탐험단의 단원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됐다.
한껏 풀어져 있던 그들은 탐험단의 주력으로 인정받는 이들답게 순식간에 자세를 잡으며 갑자기 등장한 나와 내 일행들을 경계했다.
이런 유적지에서 함정이나 괴물보다 무서운 게 같은 사람이라는 걸 모르기에는 저들은 너무나 유능하고 경험이 많았다.
“크흠! 누구신가?”
짧은 갈색 머리에 주근깨가 돋보이는 여자 옆에 앉아 있는 이름 모를 머리 희끗한 미역 머리 중년 남성이 날 보며 물었다.
저 남자가 아이젤 탐험단 휘하 탐사대의 대장인가?
“저는 대지 교단의 2번 탐사대를 이끌고 있는 ‘이안’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나는 아이젤 탐험단의 부단장인 델레브헴이라고 하네. 이 탐사대의 대장을 맡고 있지.”
내가 대지 교단의 허가증을 내밀자 미역 머리 중년도 아이젤 탐험단의 허가증을 꺼내 보이며 자기소개를 했다.
대지 교단 소속이라는 말에 부단장과 탐험단원들은 살짝 긴장을 풀었다.
“실례했네. 별자리 미궁이 다른 유적과 달리 다른 탐사단이나 발굴단을 경계할 필요가 적다고는 하지만, 헛짓을 하는 놈들도 있어서 말이지.”
그 헛짓을 하는 놈들이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갔다.
우리의 양아치, 어스름 상회겠지.
아니면 어스름 상회에게 빌린 허가증으로 별자리 미궁에 들어온 놈들이거나.
“이해합니다. 폐쇄성이 짙고 보복이 들어올 위험이 있어 위험한 짓은 하지 않지만, 날파리처럼 앵앵거릴 때가 종종 있긴 하니까요.”
인적 드문 유적에서 뒤통수를 후려치며 아예 묻어버리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별자리 미궁에 사람을 집어넣을 수 있는 집단이 어디 보통 집단인가?
조금이라도 잘못 걸리면 목숨이 위험한 수준으로 끝나지 않으니 유적에 들어온 이들은 결코 선을 넘지 않았다.
다만, 그렇다고 귀찮게 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몰래 뒤따르며 안전해진 길을 이용하는 얌체 짓이나 접근한 후, 노력해서 얻은 탐사 정보를 빼내는 경우가 꽤 있었다.
이런 유적에서 정보는 곧 돈이었으니까.
“이해해 줘서 고맙군. 그런데….”
델레브헴은 내 뒤에 부상병으로 위장해 서 있는 인형들을 보며 말끝을 흐렸다.
한눈에 봐도 20명이 넘으면서 40명에는 한참 못 미쳤으니 말을 아끼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유적은, 특히 신화가 짙게 서린 유적은 위험하고, 언제나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죠.”
내 말에 아이젤 탐험단의 단원들은 숙연해졌다.
“이런. 너무 저만 말했군요. 이분은 바다 교단 소속 2번 탐사대를 이끄는 엘 씨입니다.”
내가 아바스엘을 내세우며 소개하자 델레브헴은 당황해서 나와 아바스엘을 번갈아 바라봤다.
“설마….”
두 교단의 1번 탐사대가 전멸한 줄 알았는지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나는 손을 내저으며 그의 추측을 부정했다.
“아, 아닙니다. 저희 탐사단과 바다 교단의 탐사단은 각자 사정이 있어서 나뉘어 움직였습니다. 1번 탐사대는… 무사할 겁니다.”
내가 살짝 동공을 흔들며 자신 없게 미소 짓자 델레브헴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날 위로하려 했다.
“분명 무사할 걸세!”
“감사합니다….”
나는 힘없이 살짝 말끝을 흐리다가 애써 기운 차리는 척하며 미소 지었다.
이것 참, 나이깨나 먹은 아저씨가 이렇게 순진해서야 쓰나.
“그래도 풍요로운 대지께서 보우하셨는지, 불행 중 다행히도 서로 몸을 의지할 수 있는 바다 교단의 형제분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다만, 만날 수 있었던 이유가 저희 탐사대와 같은 구역에 있었기 때문이죠. 다만, 바다 교단의 형제분들도 저희와 같은 처지였다는 게 불행이었지만요.”
“그렇군….”
“원래라면 철수해야 옳겠지만, 저희 탐사대와 바다 교단의 탐사대가 만나 힘을 합치게 된 것도 모두 신의 뜻이라 생각합니다.”
내 말에 델레브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신들은 다음 구역으로 넘어갈 생각인가? 초입이라면 모를까, 심부는 위험하지 않겠나?”
“그저 임무를 다할 뿐입니다. 저희가 예기치 못한 일로 동료를 잃고 살짝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실력은 자신합니다.”
왕관 구역이 심부로 향하는 길목으로 여겨지긴 했지만, 초입이니, 심부니 하는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정해놓은 경계였다.
지금 우리가 있는 왕관 구역도 80년 전만 해도 심부에 속한 구역이었다.
앞으로 십여 년 뒤면 왕관 구역도 초입의 끝자락쯤으로 여겨지겠지.
내가 경건한 표정으로 성호를 긋자 델레브헴은 살짝 갈등했다.
그때 갈색 머리의 주근깨 여자가 끼어들었다.
“저기요! 저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하셨죠? 어떻게 들어가나요?”
델레브헴은 갑자기 끼어든 그녀를 혼내려 하다가 자기도 궁금해졌는지 날 바라봤다.
“그러고 보면 들어갈 방법을 알고 있다고 했었지. 정말인가?”
아이젤 탐험단의 단원들도 귀를 쫑긋 세우며 내게 관심을 보였다.
“예, 맞습니다. 최근에 이 왕묘와 관련된 기록을 발견했거든요.”
“기록! 어느 구역에서 발견했나?”
“아, 미궁 내부에서 발견한 게 아니라 밖에서 발견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미궁은 실제 했던 것들을 구현하는 거지 않습니까.”
내 말에 델레브헴은 생각지도 못했는지 흥분했다.
“신화시대 초중기의 시대일 텐데 기록이 밖에서 발견되었단 말인가! 문을 열 방법을 해석했다는 건 해독이 가능할 정도로 기록이 멀쩡하다는 거겠지? 하, 한번 볼 수 있겠나?”
“진정하시죠. 그렇게 오래된 기록을 가지고 다닐 리 없지 않습니까.”
“앗, 미안하네. 내가 실수했군. 궁금한 게 있으면 못 참는지라…. 직업병 같은 거라 이해해 주게.”
그의 사과에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기록은 제 지인이 속한 곳의 소유라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보여드리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아….”
“당연히 기밀에 가까운 정보라 어느 곳이 소유하고 있는지도 말씀드릴 수 없고요.”
“그, 그렇겠지….”
델레브헴은 실망하면서도 이해했다.
탐험을 생업으로 삼는 사람인 만큼 정보의 중요성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나는 시무룩해하는 탐험단의 단원들을 보며 슬쩍 말했다.
“사실 왕묘를 여는 정보도 알려드릴 순 없지만,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내 말에 다시 기대감에 찬 눈으로 날 바라봤다.
“하지만 델레브헴 씨가 허락할지 모르겠군요.”
“무엇을 말인가? 일단! 일단 들어보고 판단하겠네.”
정말로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검증도 하지 않았지만 내가 말한 조건만 맞으면 당장이라도 수락할 기세였다.
“아이젤 탐험단이 어느 구역을 목표로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중간에 겹치는 길이라도 함께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마침 저희 탐사단도 저 내부가 궁금한 차라서 한번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딱히 저 왕묘의 내용물이 궁금하지는 않았다. 이미 알고 있거든.
일행이 되면 자연스럽게 정보도 얻을 수 있을 거란 내 제안에 델레브헴은 잠시 멈칫했다.
“호위가 되어달라는 뜻인가?”
한 조직의 높은 사람답게 눈치가 빠르다.
그의 물음에 나는 긍정했다.
“마냥 호위를 받지는 않을 겁니다만… 그렇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겠나?”
내가 편히 이야기를 나누라며 제스처를 취하자 그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그의 동료들과 잠시 귓속말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결심한 듯 다시 내게와 제안을 받아들였다.
“자네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네.”
“감사합니다. 그래도 후회는 안 하실 겁니다. 제가 꽤 아는 게 많거든요.”
그러니 잘해보자고, 운전기사 양반.
혹시 대리 기사 삯을 넉넉히 쳐줄지 누가 알겠어?
* * *
“대단하군요. 크게 배웠습니다.”
제이드는 내 말발에 감탄하며 아이젤 탐험단을 설득한 방법을 되새겼다.
“우선 관심을 끌고, 경계를 누그러트린 다음 동정을 산다. 사실상 여기서 반쯤 넘어온 거 아닙니까?”
“그럴걸? 말했잖아, 단장의 이름값 덕분에 혜택을 톡톡히 봐서 명성을 중시 여긴다고.”
명성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부단장이란 사람의 표정을 보니 아이젤처럼 사람이 좋아서 그냥 도와줬을 것 같긴 했다.
물론 호인이라고 해도 한 조직의 관리자인 이상 두 교단에 빚을 지워두겠다는 속셈도 있을 터였다.
우리가 정말로 교단 소속이었다면 이건 꽤나 큰 빚이었다.
교단 소속이었다면 말이지.
원래 빚을 내줄 때는 빚쟁이가 제대로 갚을 놈인지를 확인해야 하는 법이다.
신용 불량자에게 돈 빌려주는 은행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쯧쯧, 그러게 잘 확인했어야지.
“그리고 슬쩍 환장할 만한 걸 미끼로 내걸면 그게 누구든 걸려들기 마련이거든.”
물고기를 낚든, 사람을 낚든 그 과정은 똑같다.
미끼를 뿌리고 동요를 일으킨 다음, 단번에 낚아채는 거다.
중요한 건 미끼가 무엇이냐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고 욕망하는지를 알아야 제대로 낚을 수 있었다.
나와 제이드의 대화에 소피아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아까는 정말로 신실한 신도 같았어. 어디 연극 배우였어?”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너도 이 정도는 가능하잖아?”
바다 교단 대성당 앞에서 여전히 날 노려보고 있는 저 늙은 성기사를 숨겨두고 뻔뻔스레 말을 걸던 걸 보면 충분했다.
“어머머? 난 신앙심 높은 성직자라고?”
능글맞게 웃는 걸 보아하니 천부적인 낚시꾼의 자질이 보였다.
“예, 예, 아무렴 그럽죠. 슬슬 준비가 끝난 모양이네.”
아바스엘이 내가 일러준 대로 왕관자리 구역 중앙에 위치한 왕묘의 문을 열 준비를 끝낸 듯 보였다.
왕묘의 문을 여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압도적인 화력으로 정문을 박살내는 것. 당연히 내부의 것들도 함께 다 박살 난다는 부작용이 있지만 어쨌든 열 순 있다.
두 번째는 지금 시점에서 아직 지도에도 실리지 않은 미답(未踏) 구역에 있는 열쇠를 가지고 와서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
내가 알기로는 몇 년 뒤 위즐 백작가에서 발견하게 되고, 아이젤 탐험단이 왕묘의 열쇠임을 알아냈을 거다.
세 번째는 정해진 절차를 따라 왕을 위한 제사를 지내는 것.
제사라고 했지만 돼지 머리를 잘라 절 몇 번 하는 건 아니었다.
고대의 마법 의식의 한 방법으로 필요한 것들은 내 지시대로 아바스엘이 여기까지 오면서 구해왔다.
왕묘 앞에 놓인 제단에 초기 신화시대 고대어로 축문(祝文)을 쓰고, 그 위로 작은곰자리 구역에서 가져온 어린 흡혈목(吸血木)을 얹었다.
“흡혈목이면 드루이드 중 하나인 생명 계파에서 주로 사용하는 주물(呪物) 아닙니까?”
제이드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왕묘는 과거 강성했던 드루이드 왕국을 다스리던 왕의 묘지였다.
“르브-아비-소뇽-리트윕….”
아바스엘이 땅의 기운이 담긴 마력 결정을 제단 앞에 쌓고 다섯 가지 풀떼기를 얹은 다음 전혀 알아먹을 수 없는 고대어 주문을 외우는 사이, 아이젤 탐험단의 부단장은 열심히 과정을 받아 적었다.
“…드루이히드라!”
드드드드-!
아바스엘의 주문이 끝나는 동시에 왕묘를 둘러싼 석상들의 눈이 빛나며 방문자를 환영하듯이 각자 들고 있는 여러 무기를 치켜 올렸다.
그러고는 굳건히 닫혀 있던 왕묘의 문이 활짝 열렸다.
“자! 모두 들어갑시다!”
내 말에 아이젤 탐험단의 선행 수색조가 조심스럽게 왕묘로 발을 들였고, 뒤이어 본대 앞 열이 왕묘로 들어갔다.
“저것들 챙겨.”
“알겠습니다.”
나는 제단 위의 흡혈목과 드루이드의 마력까지 얹어진 마력 결정을 가리켰고 길버트가 재빨리 가방에 쓸어 담았다.
나와 내 일행들도 으스스한 기운을 풍기는 왕묘로 발을 옮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