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별자리를 거니는 히치하이커 (6)
습지로 이루어진 위험한 도마뱀자리를 지나 별자리 미궁에서도 나름 안전 구역으로 분류되는 궁수자리에 도달한 우리는 행군 중 잠시 짐을 내려놓고 식사를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구역은 풀 한 포기 없는 돌산으로 이루어져 있어 내 부족한 체력으로는 너무 힘들었다.
“몬스터는 사라지는데 진흙은 안 사라지네요?”
프레시아는 신발 밑창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며 신기한 듯 물었고, 나는 행군에 지쳐 푹신한 군장에 몸을 기대며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거, 안 사라지는 게 아니라 늦게 사라지는 거야.”
유적 내부 환경은 기본적으로 마력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해당 구역을 벗어나면 자연스럽게 소멸했다.
다만 몬스터처럼 생명체가 구현된 경우라면 결정의 힘과 생명 활동을 기반 삼아 구역을 벗어나도 소멸하진 않았다.
그래서 미궁에서 구할 수 있는 약초 등은 잎이나 꽃을 따는 게 아니라 뿌리째 뽑아야 했다.
마법 재료가 될 만한 것들은 뿌리만 살아 있다면 어지간해서 죽지 않았다.
물론 뿌리가 없거나 토막 나도 죽지 않는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면 정성을 안 들여도 채취할 수 있었다.
아니면 죽여서 결정을 가져와도 좋았다.
그대로 채취하는 것보다는 효과가 약하지만, 결정에도 비슷한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 내부 물건이 구역을 벗어날 때 사라진다면, 유물들을 어떻게 유적 밖으로 반출할 수 있는 겁니까?”
제이드의 물음에 숨을 고른 나는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모든 물건이 유적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니까. 유적의 힘으로 구현된 물건은 유적 밖에 가지고 나가면 서서히 소멸하지만, 아닌 물건은 밖에 가져가도 소멸하지 않거든.”
“아하, 그렇습니까? 그럼 그런 물건은 어떻게 구분하죠?”
“가지고 나가서 안 사라지면 운이 좋은 거고, 사라지면 재수가 없던 거고. 복불복이지 뭐.”
그래도 단번에 가루가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유적 밖으로 가져나가도 몇 번은 사용할 수 있다.
예전에 유적 깊숙한 곳에서 전설의 엘릭서가 발굴된 적이 있었다.
유적의 힘으로 구현된 물건이라 서서히 소멸해 갔지만, 소멸하기 전 죽어가던 환자가 복용해 살아난 사례가 있다.
참고로 그 유적산 엘릭서에는 지금도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유적의 힘으로 만들어진 물건은 몬스터처럼 리젠 되기 때문이다.
“아, 아예 구분이 안 되는 건 아니고, 구역을 벗어난 뒤 특정 시간이 지나도 리젠 되지 않으면 유물이라는 걸 알 수 있어.”
“오, 리젠 시기는요?”
“그건 나도 몰루?”
리젠 되는 시기는 모두 다 제각각이었다.
그래도 알려진 게 있다면 몬스터는 리젠이 빠르게 된다는 점이다.
“3시 방향! 몬스터 출몰!”
때마침 우리가 있는 곳으로 하피 무리가 날아왔다.
궁수자리가 안전 구역으로 여겨진다고는 했지만, 이 유적에서 정말로 다리 뻗고 잘 정도로 안전한 곳은 손에 꼽았다.
이 구역이 안전 구역으로 분류된 이유는 몬스터가 거의 없다는 것과 그나마 있는 몬스터도 그리 강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왠지 미안해지는군요.”
제이드는 저 앞에서 열심히 유적이 만들어 낸 괴물들과 싸우는 성기사들과 전투 사제들을 보며 느긋하게 비스킷을 먹었다.
“뭐 어때? 표정에 여유가 있어 보이는데.”
나도 육포를 뜯으며 느긋하게 구경했다.
성기사들은 방패로 신성력 결계를 자아내어 일행들을 보호하고, 전투 사제는 원거리 신성 마법을 날려 하피를 격추했다.
기동력이 문제라 그렇지, 공격 하나하나는 그리 강하지 않았다.
내 말에 제이드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날 바라봤다.
“예?”
아, 미안하다는 게 싸우고 잡일까지 해주는 저놈들이 아니라 뒤따라오고 있을 친구들을 말하는 거였냐?
하기야 제이드가 이놈들을 고깝게 볼 리가 없었다.
바다 교단이고 나발이고 역대 겨울나무의 현자들을 더럽게 추운 바스타유 산맥에 처박히게 만들고, 스승을 죽이려던 아르카나였으니까 당연했다.
아마 저 성기사와 사제들 중 아르카나의 존재조차 모르는 놈은 한 놈도 없을 거다.
나는 제이드의 속내를 눈치챘지만 그래도 운전대를 잡고 있는 버스 기사와 트러블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그래, 제이. 네가 말대로 우리도 돕긴 해야겠지!”
일부러 다 들리도록 큰 소리로 말하며 제이드에게 눈짓했다.
내 눈짓을 본 제이드는 순간 이해 못 한 듯 눈을 두어 번 껌벅이더니, 내 말의 의미를 눈치챘는지 실소를 흘리다가 이내 표정을 가다듬고 마법 지팡이를 들었다.
“물론입니다! 도련님! 갑시다, 갱어!”
역시 말하지 않아도 잘한다니까.
제이드는 도플갱어형과 함께 성기사들의 뒤에 서서 보조했다.
제이드가 차분히 마탄을 날리고, 새벽별 교단의 11사도 도노반의 활로 화살을 쏘아댔다.
11사도 도노반의 마력혈도와 6사도 어기스트림의 마력회로를 추출해 삽입한 덕분에 내 도플갱어형 유안 프로토타입은 전사로서도, 마법사로서도 활동이 가능했다.
“고맙습니다! 형제님들!”
성기사와 사제들은 제이드와 도플갱어형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며 공격에 가속을 붙였다.
좋아, 잘한다. 그렇게 친해져서 방심하게 만들어야 찰지게 치기 좋게 뒤통수를 열어주지.
* * *
미궁 초입인 방위 마법 설치 구역을 벗어나 심부(深部)로 향하는 중간 지역인 왕관자리 구역에서 검선 나유타는 잠시 멈춰 섰다.
“아이씨, 이년은 어디로 간 거야?”
검마 아나스타샤를 쫓아 유적에 들어온 건 좋았는데, 유적 깊숙이 들어갈수록 사방에 가득 메워진 유적의 마력 탓에 후각이 마비된 사냥개처럼 어디로 갔는지 구별이 되질 않았다.
“쓰읍, 거리는 많이 좁힌 것 같은데 왜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지? 이상하네.”
고민하던 나유타는 머리를 벅벅 긁더니 다음 구역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어차피 가만히 서 있어봤자 검마와의 거리만 벌어지리라.
그렇게 검선은 문에 바다뱀자리 형태로 결정을 꽂아 왕관자리 구역에서 바다뱀자리 구역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떠난 지 수십 분이 지난 뒤 그 자리로 검마 아나스타샤가 멈춰 섰다.
“음?”
익숙한 마력의 잔향에 검선이 이곳까지 쫓아왔다는 걸 눈치챈 아나스타샤는 미간을 좁히고 잠시 고민하다가 바다뱀자리가 아닌 독수리자리 구역으로 넘어갔다.
자신의 뒤를 쫓아다니는 검선이 귀찮은 그녀였다.
* * *
아멜리는 바다 교단의 탐사대가 사용하던 지도 대신 유안이 준 어스름 상회에서 제작한 유적 내부 지도 사본을 살피며 미간을 좁혔다.
어스름 상회의 지도는 바다 교단의 것보다 정교하고 최신 정보를 담고 있었다.
바다 교단의 탐사대가 유적에서 나온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유적 내부가 변했는지 지도와 차이가 있었다.
유물을 목적으로 탐사대를 보내는 집단과 유적 내부의 구조 파악을 목적으로 탐사대를 보내는 집단의 차이였다.
어스름 상회에게 유물은 밀수꾼들에게 얻으면 그만인 부가적인 상품에 불과했다.
정보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후우, 쉽지 않겠는데?”
구역 끝의 문을 열고 보니 원래 향하려던 별자리 구역이 아니라 당황한 그녀에게 유안이 슬쩍 지도를 찔러줬다.
그 덕분에 재빨리 정신을 수습하고 경로 계산을 다시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몇 개의 구역을 넘어 몰려드는 유적의 괴물들을 몰아낸 탐사대는 휴식을 위해 주변을 정리해 베이스캠프로 만들어 놓고 휴식을 취했다.
탐사대원들이 쉰다고 탐사대를 이끄는 아멜리도 쉴 수는 없었다.
“이 지도, 꽤 비싸겠는데요.”
아멜리가 값을 치르겠다고 하자 유안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별것 아닙니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호위도 해주신 것도 모자라 저희 몫도 챙겨 주셨는걸요.”
유안을 지키는 호위의 가방에는 유적에서만 구할 수 있는 마력 결정과 발굴한 유물, 그리고 고고학 자료가 가득 담겨 있었다.
아멜리로서는 허가증을 가지고 있는 유안이 나중에 빠지지 못하게 하려는 공작의 일환이라 미안하면서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 저는 제 친구들과 놀고 있을 테니 천천히 이야기 나누시지요.”
유안은 자연스럽게 뒤로 빠지며 유적지 곳곳에 위치한 신화시대의 잔재를 기록하고 있는 제이드에게로 향했다.
눈치 좋게 빠져주니 아멜리는 로툴러스와 탐험가, 고고학자와 머리를 맞대고 계획을 다시 짰다.
“아직 방위 마법이 설치된 초입을 벗어나지도 않았는데 지도가 이렇게 다르다면 목적지인 심부 쪽은 저희가 파악하고 있는 것과 완전히 달라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탐사대의 탐험가 르밍의 말에 다른 탐험가 파실과 고고학자 에곤쉴레도 긍정했다.
“어차피 유적 심부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탐사의 대전제는 바뀌지 않았어요.”
“맞습니다. 보다 정확한 지도가 있으니 경로를 다시 짜면 그만입니다.”
유적을 탐사할 때는 보통 두 가지로 나뉘었다. 목적지를 설정하고 그에 맞는 경로에 물자를 준비하거나, 또는 목적지를 두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탐사했다.
아멜리가 이끄는 탐사대는 전자로 수레바퀴의 예지로 유적 심부에 위치한 백조자리 구역에 있다는 성물(聖物)을 가져오는 것이 목표였다.
“이제 다음 구역이면 방위 마법을 설치해 둔 구역도 마지막이다. 본격적으로 위험해지겠어.”
유적 내부의 위치가 계속 바뀌면서 방위 마법이 설치된 위치도 계속 변했지만 유적 초입 구역으로 분류되는 곳은 변화도, 위험도 적었다.
하지만 이제 더 안으로 들어갈수록 변동 폭도, 위험도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터였다.
“경로는 이곳과 이곳을 지나 이곳으로 가는 게 좋을까요?”
아멜리가 지도를 짚으며 묻자 로툴러스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구역은 사막 지대가 형성되어 있어서 바다 교단과는 상성이 안 좋다.”
탐사대의 탐험가도 고고학자도 모두 일류였지만 역시 유적 경험자인 로툴러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구역과 구역은 항상 위치가 바뀌었지만, 별자리 구역은 어지간해선 변하지 않았기에 경험자가 더욱 중요했다.
“사막이면 힘들긴 하겠네요. 그럼 이곳에서 왕관자리 구역을 통해 유적 심부로 넘어가는 게 안전할지도 모르겠어요.”
“이 지도대로라면 그렇게 움직이는 게 안전할 것 같다. 왕관자리 구역에서 독수리자리 구역이 더 빠를 것 같긴 하지만 바다뱀자리가 환경 상성 상 더 유리할 테니 그쪽으로 넘어가야겠지?”
“그건 그렇죠. 문제는 심부에서 어떻게 백조자리를 찾아 넘어가느냐네요.”
어스름 상회의 지도도 심부의 지도는 대략적으로 그려져 있거나 아예 표시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그건 걱정하지 마라. 광대 놈이 천체나침반(天體羅針盤)을 놓고 갔으니까.”
로툴러스가 주머니에서 꺼낸 천체나침반은 오롯이 유적 탐사를 위해 만들어진 마도구로, 자침(磁針) 끝에 목적지 구역에서 구한 마력 결정을 박아 넣으면 그 목적지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전 또 신성력으로 점을 치며 몇 달간 유적을 돌아다닐 줄 알았는데 그거 다행이네요.”
천체나침반은 제작 난도도 높고 단가도 비싸서 실질적으로 운용되지 않았다.
때문에 대부분의 탐사대는 점성술을 이용해 길을 찾곤 했다.
별자리 미궁이란 이름답게 유적 안에선 점성술의 효과가 극대화되었다.
“하하, 아무리 그래도 성녀님을 이런 유적지에 몇 달간이나 박아놓을 순 없지.”
“전 나름 각오하고 온 건데 말이죠. 그럼 이제 이안 씨를 설득해 볼까요.”
아멜리가 주변을 둘러보며 유안을 찾았다.
지금까지 공들여 그의 의사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지금부터는 자신의 의사를 존중받을 차례였다.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둘러봐도 일행들 사이에서 유안이 보이지 않았다.
“이안 씨 어디 갔죠?!”
아멜리가 유안을 찾자 휴식을 취하며 기도를 올리던 성기사들과 사제들은 눈을 껌벅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어라? 어디 가셨지? 저기서 신화시대 잔재를 기록하고 있었는데?”
한 성기사의 말에 아멜리의 뇌리에 불길한 직감이 번뜩였다.
그녀의 초직감을 지닌 절친한 친구는 도둑을 조심하라 하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