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별자리를 거니는 히치하이커 (5)
나는 가장 안전한 탐사대 중심부에 서서 유적 입구를 지나며 생각했다.
내 호위 중 셋이 인형이란 걸 안 들켜서 다행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초인인 로툴러스라면 알아차릴지도 모를 거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눈치 못 채고 넘어갔다.
만약 알아차렸으면 아멜리에게 알렸을 거고, 아멜리는 인형 몫만큼 성기사들을 추가하려 했을 거다.
실루아처럼 마법 생명체로서 완성된 존재라면 모를까, 내가 조종하는 인형은 방위 마법에 걸리지 않았으니까 허가증에 굳이 등록할 필요가 없었다.
뭐, 인형인 걸 안 들켰으니 다행이지.
“신기하군요. 안 그렇습니까? 도련님?”
제이드는 수첩에 무언가를 필기하며 내게 장난스럽게 도련님이라 불렀다.
명목상 내 호위 마법사니 당연한 호칭이었지만 이름을 부르다 도련님이라 부르니 왠지 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 이름을 부르다 실수로 내 본명을 부르는 일이 벌어지는 것보단 나았지만.
“그러네.”
나는 대충 맞장구를 치며 주변을 둘러봤다.
바하나드 중심부에 위치한 유적, 별자리의 미궁에 들어서자 여러 상형문자가 그려져 있는 긴 복도가 나타났다.
흡사 이집트 유적지 같은 분위기가 나긴 했지만 초입만 그렇고, 내부로 들어갈수록 환경이 바뀌게 될 거다.
“뭐라고 적혀 있는 걸까요?”
프레시아의 물음에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아마 경고 문구 같은 거겠지.”
이런 유적의 경우 입구에 있는 문자는 보통 둘 중 하나였다.
유적을 만든 제작자의 의도, 아니면 위험하니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 어느 쪽이든 침입자에게 하는 경고일 가능성이 높았다.
내 말에 수첩에 무언가를 끄적이던 제이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무래도 도련님 말처럼 경고인 것 같습니다. 보아하니 신화 중기의 문자인 테헤르-차탄의 문자인 것 같은데 저 아래를 보는 눈 모양은 ‘내려 보다’, ‘관조하다’, ‘꿰뚫어 보다’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뒤에 오는 위를 받치는 손 모양과 육각형은….”
제이드의 상형문자 풀이에 근처에 있던 고고학자가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테헤르-차탄 문자를 아시는 분은 드문데 젊은 분이 알고 있다니 놀랍군요. 아, 저는 이번 탐사단의 고고학자로 참여하게 된 존 요크셔라고 합니다.”
“제이입니다. 이안 도련님의 호위 마법사입니다.”
제이드의 지식에 흥미를 보인 아르카나의 고고학자와 탐험가, 마법사들이 하나둘씩 말을 걸어왔다.
아직 입구에서 가까워 유적의 함정이 없다는 사실을 다들 알았기에 아직 표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던 탐사단의 가장 앞에서 이끄는 로툴러스가 마법 랜턴을 높이 들며 말했다.
“슬슬 북극점에서 벗어난다. 지금부터는 긴장하도록.”
별자리 미궁은 주기적으로 내부 구조를 바꾼다.
하지만 절대 바뀌지 않는 곳이 있으니, 그곳이 바로 입구 인근이다.
별자리 미궁이란 이명(異名)에 걸맞게 입구 인근을 북극점이라 칭했다.
이제부턴 안전 지역을 벗어나게 된다는 말이었다.
기나긴 통로를 지나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과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외부로 드러난 유적의 모습은 넓고 커다란 단층 건물이었다.
그런데 건물의 초입부터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는 걸로 이 유적의 공간이 얼마나 크게 왜곡되어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여기서부턴 칠성좌(七星座)와 오성좌(五星座)로 길이 나뉘게 됩니다. 이안 씨는 어느 쪽이 나을 것 같나요?”
탐사대의 대장인 아멜리는 싱긋 웃으며 내 의견을 물었다.
딱히 날 배려한다기보다는 내가 지닌 허가증을 가지고 유적 깊숙이 들어갈 예정이라 나중에 어르고 달래기 위한 밑 작업인 듯했다.
지금은 내 의견을 존중하는 척하며 따라주다가 나중에 내가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 지금까지 네 의견대로 움직였으니, 이제부턴 자기 의견대로 움직이자고 강요하기 위함이겠지.
속이 뻔히 보인다, 망할 종교쟁이야.
모처럼 버스 기사 양반이 날 존중해 주는 척을 해준다면 나야 그 선심을 알뜰살뜰하게 이용해 주는 게 예의다.
“저희뿐이었다면 안전한 길을 골랐겠지만, 탐사대의 위용을 보아하니 짧은 길도 그리 위험해 보이지는 않네요.”
작은곰자리는 길지만 안전하고 카시오페아 자리는 짧지만 위험했다.
“좋은 선택이에요. 특히 바다의 힘을 하사받은 저희 교단과 상성도 좋지요. 아래로 내려가죠.”
아멜리의 지시에 선두의 로툴러스와 성기사들은 망설임 없이 갈림길에서 계단을 내려갔다.
십여 분을 내려가자 유적 건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해저 동굴 길과 바로 옆에 어디서 흘러 들어왔는지 모를 짠 내 풍기는 바닷물이 파도쳤다.
큰곰자리 길로 갔다면 넓은 숲이 나왔으리라.
뒤따라올 내 동료들은 당연히 대지 교단의 성녀가 있는 만큼 큰곰자리 길로 가라고 지시해 놨다.
거기 숨겨진 보석이 대지의 신성력을 담기 좋아서 챙겨놓으라 표시해 뒀다.
“초입부터 귀찮게 됐군. 성기사들은 전투 준비!”
로툴러스의 외침에 성기사들은 묵묵히 검을 뽑아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닷물 속에서 웬 비린내 나는 흉측한 물갈퀴 달린 손이 튀어나와 땅을 짚더니 못생긴 대가리를 들이밀며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쏨뱅이처럼 생긴 게 회 쳐서 초장에 찍어 먹으면 딱 꿀맛이겠구만.
-키에에엑!
-키에엑!
성기사들은 리버스 인어공주 쏨뱅이들이 땅 위로 올라오기 전에 바닥이 뾰족한 카이트 실드로 대가리를 내리찍었다.
그러고는 그것들을 걷어차 다시 고향의 품으로 돌려보냈다.
바이바이! 쏨뱅이!
그러나 사람이 그리운 쏨뱅이들은 바닷속에서 월드워Z의 좀비 떼처럼 우르르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빠르게 뚫고 지나간다! 모두 달려!”
선두에서는 로툴러스와 성기사 두 명이 화려한 검기를 내뿜으며 몰려드는 쏨뱅이 떼를 회 치고 뚫었다.
그러면 후열의 성기사들은 토막 나 나뒹구는 쏨뱅이를 방패로 밀치며 뒷사람들이 달리기 쉽게 공간을 만들어 냈다.
-키에에엑!
-키엑!
로툴러스라는 훌륭한 요리사에 의해 쏨뱅이 무한 리필 집이 차려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리 넓지 않은 길목이 쏨뱅이 사체에 가로막히거나 하진 않았다.
토막 난 사체 대부분이 성기사들의 방패에 밀려 바닷속으로 되돌아갔고, 땅에 남은 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린 덕분이다.
이 유적에 등장하는 몬스터는 말하자면 기록 속 과거의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공간이 뒤틀리면서 신화시대에 있었던 존재가 실체화되는 거였다.
즉, 쏨뱅이들에게 아무리 초장 발라도 시간이 지나면 게임 속 몹처럼 리스폰 구역에서 리젠 된다.
당연히 마법적인 현상인 만큼 그냥 리젠 되는 건 아니었고.
“람아.”
-삑!
내 부름에 람이 옷 틈에서 빠져나와 바닷속으로 들어갔다.
마력을 머금은 몬스터에게 동력원이 되는 마석이 있듯, 저 쏨뱅이들에게도 유적의 마력이 담긴 결정이 있었다.
그 결정은 다행히도 토막 난 쏨뱅이처럼 가루가 되어 사라지진 않았다.
그저 역할 정도로 몰려드는 괴물들 탓에 줍기가 더럽게 힘들 뿐이다.
바닷속으로 들어간 람은 떨어진 결정들을 모아 하나로 융합하고 압축한 다음 입에 물고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잘했어.”
-삑삑!
나는 주먹만 한 쏨뱅이 결정을 주머니에 넣으며 의기양양하게 으스대는 람이의 턱을 간질였다.
사방에서 풍기는 비린내와 정신없이 달린 탓에 숨이 턱턱 차올랐지만 짧은 길답게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는 입구가 보였다.
입구는 고풍스러운 조각이 되어 있는 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선두의 로툴러스는 언제 챙겼는지 모를 쏨뱅이 결정 다섯 개를 문 중앙의 원판에 ‘W’모양으로 꽂았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큼지막한 공동이 나타났다. 탐사대가 그 안으로 쏙하고 들어가자 우리의 리버스 인어공주들이 따라 들어오려 했다.
피슈웅- 콰과과과-!!
그러나 궁정과 마탑의 마법사들이 떡칠해 놓은 방위 마법이 발동하며 쏨뱅이들을 구워버렸다.
방위 마법이 없었다면 개떼처럼 몰려드는 괴물들을 밀어내고 문을 닫은 다음 남은 놈들을 처리해야 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도 아니면 아예 이런 빈 공간이 없어서 휴식이 불가능하거나.
“와오, 허가증이 없으면 저렇게 되는구만.”
명백히 과잉 공격이었다. 바삭바삭하다 못해 오버 쿡이 되어 탄내가 콧속을 찔렀다.
아껴야 잘사는데, 마법사들은 아낄 줄 모르는 프렌즈구나.
그래도 솔직히 비린내보다는 탄내가 낫긴 하지.
마법진을 설치한 마법사들의 심정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어느 별자리로 갈까?”
로툴러스의 물음에 아멜리는 싱긋 웃으며 이번에도 내게 물었다.
“세 곳 중 어디로 갈까요?”
우리가 지나온 문에 달린 저 원판을 어느 각도로 돌리느냐에 따라서 연결되는 지역이 변했다.
저 문과 연결된 장소는 세 곳이었다.
어스름 상회의 최신 지도에 따르면 도마뱀자리, 세페우스자리, 용자리였다.
소설에서는 사냥개, 큰곰, 목동이었는데 시기가 다르다 보니 위치도 달랐다.
“도마뱀으로 가죠. 용은 위험하고, 세페우스는 함정이잖아요.”
세페우스자리로 가봤자 그 길을 뚫고 지나가면 열리는 별자리는 도마뱀과 용이었다.
그래서 대부분 탐사대는 세페우스자리로는 가지 않았다.
물론 작은곰자리로 간 내 동료들은 세페우스자리로 향할 거다.
잘 가지 않는 곳에는 항상 숨겨진 것들이 있기 마련이었으니까.
“좋은 선택이에요. 사실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으면 말리려 했거든요.”
아멜리는 내게 원판을 돌릴 것을 권했고, 나는 거리낌 없이 원판을 돌려 도마뱀자리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 * *
아바스엘은 지도책이라고 해도 좋을 지도를 살피며 계단 위로 향했다. 그러자 넓게 트인 하늘에 숲이 나왔다.
“어? 유적 밖으로 나온 건가요?”
길버트가 놀라며 묻자 아바스엘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이곳도 유적의 일부분이다. 신화가 깃든 유적은 건축물의 형태를 해도 공간이 왜곡되어 이런 환경을 자아내지. 물론 이 정도로 심한 공간 왜곡이 있는 유적은 굉장히 드물지만 말이야.”
아바스엘이 저주를 풀기 위해 방문했던 마터호른 산의 잊혀진 신전도 지하로 내려갔음에도 탁 트인 들판이 나왔다.
이 별자리 미궁도 같은 원리로 돌아갔는데 그 규모가 보다 거대했다.
“주군께서 이곳을 지나면서 여기서만 구할 수 있는 약초와 재료가 있다고 했으니 최대한 캐내면서 가자.”
아바스엘은 그렇게 말하며 슬쩍 소피아를 바라봤다.
대지의 여신의 총애를 받는 성녀이자 극히 드문 초직감의 소유자인 만큼 희귀한 약초를 찾는 데 그녀만 한 사람이 없었다.
“크흠!”
그 시선을 알아챈 데일호르그는 불편한 듯 헛기침을 했지만 소피아는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나서서 약초를 찾아서 캐기 시작했다.
“아, 아가씨.”
데일호르그는 실루아와 길버트와 함께 약초를 캐는 소피아를 보며 진땀을 뺐다.
누가 성녀에게 이런 일을 시켜 봤겠는가.
만인의 존중을 받아온 그녀의 행동이 당황스러울 뿐이었지만, 정작 소피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만족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총본산 대지 교단의 교황청의 상징물로 인형처럼 앉아 있는 것에 비하면 즐거운 일이었다.
“저기가 왕실 유물 관리 청사(廳舍)군.”
숲 중앙에는 유적 출입 허가증을 보관하고 유적에서 나온 유물들을 감정 및 관리하는 관청이 있었다.
계속해서 내부를 바꾸는 유적지였지만 입구 통로와 붙어 있기에 불변성을 지니고 있다.
덧붙여 작은곰자리는 지역 전체가 안전 구역이라는 이점 덕에 아예 건물을 짓고 관리들이 상주했다.
“주군께서 구하라고 하신 마법 재료가 저기 있어서 잠깐 저기 들렀다 올 테니 잠깐 여기 있도록.”
야드는 주머니에서 왕실 기사패와 유안이 제작한 왕자의 도장이 찍힌 명령서를 들고 청사로 향했다.
관리의 일은 단순히 유물을 관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작은곰자리에서만 나는 희귀 재료를 유적 밖으로 수급하는 일도 하고 있었다.
당연히 상주하는 만큼 독점적으로 수급하고 있는 재료들도 있었으니, 유안은 명령서를 들이밀고 합법적으로 강탈하라 지시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