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엑스트라 왕자는 세계정복을 시작한다-178화 (178/214)

제178화. 별자리를 거니는 히치하이커 (4)

나는 묵직한 짐이 담긴 가방을 메고 대지 교단의 유적 출입 허가증을 챙겼다.

공간이 비틀려 있는 유적 내부에선 공간계 마법의 사용이 어려워 가방을 멜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내가 지닌 아공간 마도구의 제작자를 생각하면 별문제는 없을 것 같았지만 혹시 모르니 사용은 하지 않기로 했다.

아공간에서 물건을 꺼내다가 이차원의 미아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때문에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탄창도 마차에 두고, 마법이 걸리지 않은 여분의 탄창만 전투 조끼 주머니에 가득 채웠다.

전역하고 더 이상 이딴 쓰레기 같은 조끼 따윈 입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물론 전생의 전투 조끼라기보다는 탐험용 장비라고 파는 거라 더 두껍고, 방어 마법도 새겨져 있는 고급품이었다.

문제는 더 두꺼운 만큼 쉽게 땀 차고 더 갑갑하다는 거였지만 말이다.

“제가 가방을 들까요?”

프레시아의 배려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도 가방을 멨잖아.”

가방이 묵직하다고 해도 나나 프레시아가 맨 가방은 그리 크지 않았다.

내 유리 몸뚱이가 무거운 군장을 버틸 수 있을 리 만무하고 프레시아는 무슨 일이 있을 때 민첩하게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자, 다들 주목.”

내 말에 방 안에 모인 여덟 명이 일제히 날 바라봤다.

“조금 있으면 유적에 들어갈 테니 마지막 점검을 할게. 우린 두 개 조로 나뉘어서 움직인다.”

1조는 나, 프레시아, 제이드.

2조는 길버트, 아바스엘, 실루아, 야드, 소피아, 데일호르그.

허가증이 두 개니 나뉘어 움직이기로 했다.

프레시아는 이미 아멜리와 로툴러스와 만났으니 고정이었고, 제이드, 길버트, 아바스엘 중 나와 함께 갈 사람을 고민하다가 결국 제이드로 골랐다.

길버트를 데려가면 로툴러스를 보고 배울 게 많아 보였지만 아무래도 마법적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 제외했다.

제이드와 아바스엘 중 그래도 유적이나 던전 경험이 많은 사람이 2조를 이끌어 줘야 한다고 판단해서 결국 아바스엘이 2조를 이끌기로 했다.

10년간 부티크에 갇혀 지냈다고는 하지만 최연소 슈프림 메이지란 위업은 책상머리에서만 가능한 성과가 아니었다.

“나는 대장님과 함께 움직이고 싶은데.”

소피아는 어느새 나와 일행들에게 편하게 대했다.

그녀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안 돼. 괜히 바다 교단과 얼굴 붉힐 일 있어?”

소피아가 바다 교단의 성녀인 아멜리와 소꿉친구라고는 해도 바다 교단의 성기사와 사제들은 그녀를 불편해할 거다.

아멜리만으로도 충분히 불편한데, 타 교단의 성녀라니.

그들 입장에선 우리 사단의 사단장이 훈시하는데 타 사단의 사단장이 놀러 왔다며 부대를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사단장끼리 불알친구라 눈치 보지 않고 할 말 못 할 말을 가리지 않는다.

분위기가 어떠할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성녀님, 이번만큼은 저자의 말에 동의합니다. 자제하시지요.”

소피아를 보호하기 위해 바하나드까지 따라와 유적까지 끌려가게 된 데일호르그도 내 말에 동의했다.

“쳇, 얌전히 있을 자신 있는데.”

그렇게 말하는 소피아의 눈에는 짓궂은 장난기가 서려 있었다.

저거 분명 나랑 같이 가면 정신 나간 사고 칠 관상이다.

재미있겠다. 그냥 데려갈까?

아니, 그럼 내 계획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할 것 같으니 아쉽지만 이번에는 참기로 하자.

“실루아.”

“네! 준비 끝났어요!”

실루아는 간단한 손짓으로 인형을 움직였다.

실루아의 인형은 짐꾼 겸 전투원으로 미리 소환했다.

공간계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건 소환 또한 막히는 셈이다.

인형이 곧 전투력인 실루아에게는 여러모로 불리한 유적이었지만, 이 기회에 다른 마법에도 익숙해지는 게 좋았다.

나도 인형 세 체를 조종해 짐을 짊어지게 시켰다.

“음, 이놈은 보면 볼수록 기분 나쁘다니까.”

나는 제 몸집의 다섯 배는 큰 군장을 멘 나와 똑같이 생긴 인형을 바라봤다.

내 악평에 실루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왜요! 잘생겼는데!”

실루아의 항의에 프레시아도 거들었다.

“맞습니다. 저도 하나 가지고 싶은데요.”

이 인형은 실루아가 날 위해 만들어 준 네임드 전투 인형 ‘도플갱어형(形) 유안 프로토타입’이었다.

제작에는 나도 참여했기 때문에 이 인형의 성능은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내가 손을 조금 더 봐서 메인 제작자인 실루아보다 내가 더 잘 알 거다.

하지만 나랑 너무 똑같이 생겨서 기분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프레시아는 인형을 가져도 마법을 모르니 못 사용할걸. 그런데 가지고 싶다는 게 너랑 똑같이 생긴 인형이지? 나처럼 생긴 인형을 가지고 싶다는 건 아니지?”

내 물음에 프레시아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순진무구한 소녀처럼 싱긋 웃었다.

왠지 찝찝했지만 제이드라면 모를까, 프레시아라면 이상한 의도는 없겠지. …아마도.

“뭐, 나랑 똑같이 생겼으면 유용한 건 맞으니까.”

사기 치거나 알리바이를 만드는 데 이만한 인형도 없긴 하지.

하지만 지금은 이 얼굴이어선 문제가 있었다. 나는 잠시 인형의 얼굴을 만져 중년의 각진 얼굴로 바꾸었다.

“아앗!”

갑자기 들려오는 탄성에 나는 프레시아를 돌아봤지만 프레시아는 왜 그러냐는 듯이 미소 지어 보였다.

음, 착각인가? 밖에서 들려온 소리를 잘못 들은 모양이다.

나는 시범적으로 인형들을 움직여 봤다.

도플갱어형 외에는 게오르가 남긴 일반 인형이었지만 어지간한 인형술사의 네임드보다 뛰어났다.

잘만 조종하면 바다 교단의 성기사보다 훨씬 강하다.

잘만 조종하면.

그래도 고작 세 체 조작하는 건데 괜찮겠지.

“나와 프레시아, 제이드는 바다 교단에 가면 바로 들어갈 거야. 아바스엘, 내가 챙겨준 지도와 경로는 잘 숙지했지?”

“물론입니다.”

“좋아. 그럼 우리 뒤로 두 시간은 늦게 움직이고, 내가 정한 시간에 합류 포인트에서 다시 만나자고.”

아바스엘에게는 유적 초입 구간에 아직 숨겨져 있을 유적의 회수를 맡겼다.

지금보다 한참 뒤의 일인 소설 속에서도 있던 물건이니 아마 지금도 있을 거다.

바다 교단과 함께 움직이면 내가 챙길 수 없으니 숨겨진 위치와 수색 방법을 알려줬다.

“제이드 공과 프레시아 경이라면 걱정 없지만 그래도 모르니 몸조심하십쇼, 주군.”

“하하하, 걱정하지 마. 함께 움직이는 인원이면 다시 만날 때까지 다치고 싶어도 못 다칠 테니까.”

날 태워줄 버스 안에 사제만 몇 명인데.

어지간해서 즉사만 아니면 살아날 수 있다.

나는 소피아를 흘끔 바라봤다.

“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지낼 것 같지만. 노파심에 말하자면 최대한 아바스엘의 지시를 따르고 다 함께 친하게 지내.”

“오호호호! 걱정도 팔자셔. 이미 우린 친구인걸, 그치?”

소피아는 웃으며 실루아에게 동의를 구하자 실루아도 따라 웃으며 서로 손뼉을 마주 쳤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벌써 일행들 사이에 녹아들었다.

저렇게 친화력 좋은 사람은 길버트 말고 처음 본다.

역시 전문 종교쟁이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만.

“너만 잘 지내지 말고 저 영감님의 협조도 좀 구해.”

내가 소피아 뒤에 장승처럼 꼿꼿이 서 있는 늙은 성기사를 가리키자 소피아도 머쓱해했다.

“아, 그건 걱정할 만하네.”

“크흠! 괜한 분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데일호르그의 눈빛을 보아하니 내게 너만 없으면 문제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거참, 사위에게 딸 빼앗긴 장인도 아니고 너무 딱딱하시네. 좀 웃읍시다.”

“뭐라!”

내 농담에 정곡이 찔린 듯 늙은 성기사의 안광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확실히 느닷없이 신탁의 약속이라면서 소피아가 내 여행에 따라나서게 되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특히 다른 사제도 아니고 정말로 손녀처럼 여기며 키운 소피아니 더더욱 못마땅하겠지.

그런데 어쩌라고?

“워워! 진정하세요, 아저씨.”

소피아는 말리면서도 말 된다며 키득거렸다.

“그럼 유적 안에서 보자고들.”

나는 프레시아와 제이드를 데리고 약속 장소인 유적 입구로 향했다.

* * *

유적 입구 앞에 선 아멜리는 완벽하게 갖춰진 유적 탐사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수레바퀴의 예언 때문에 급하게 준비한 것치곤 잘 준비한 것 같죠?”

원래대로 계획대로라면 이 유적에 들어가는 것은 그녀가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 시점도 아니었다.

예정된 계획에는 보다 여유가 넘쳤다.

하지만 최근 아르카나 10, 수레바퀴가 계속된 운명의 흔들림 속에서 아르카나가 노리는 유물이 사라질 것을 예지해 냈다.

아르카나 18, 달은 연쇄적인 운명의 비틀림의 영향으로 생긴 나비 효과라 봤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광대가 고생했지. 그 짧은 시간에 성기사와 사제들을 제외한 인원들을 모으고 물자와 장비를 마련했으니까.”

로툴러스는 피곤함에 절은 얼굴로 흐느적거리며 물자만 넘겨주고 떠난 자반을 칭찬했다.

전문 장비가 포함되어 있지만 물자를 모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아무리 같은 이름 아래 모인 조직이라도 단기간에 파벌과 내부 알력을 뛰어넘어 목표에 맞는 인재를 파악하고 협조를 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건 그렇죠. 느긋하게 쉬라고 했는데도 달이 시킨 일이 남았다며 바로 서부 전선 쪽으로 가더라고요.”

“서부 전선?”

“예, 듣기로는 마녀가 어쩌고 숲이 저쩌고 하는 것 같던데요.”

아멜리의 말에 로툴러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여자 앞에선 입이 가벼워지는 놈이군.”

“호호호, 그래도 핵심적인 건 말하지 않아서 잘 몰라요.”

아무리 여자 앞에서 수다쟁이가 되는 자반이라도 결코 선은 넘지 않았다.

“뭐, 솔직히 저희 정도 위치면 알아도 크게 상관없는 거 아니에요?”

아멜리와 로툴러스 둘 다 사회적으로나 권세적으로나 명망 높은 데다 아르카나에서도 숫자를 받은 대간부였다.

“오히려 모르는 게 더 나을 때도 있는 법이지. 손님들이 도착했군.”

로툴러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아멜리는 대성당으로 다가오는 여섯 명을 확인했다.

어제 손님으로서 방문했을 때처럼 변장한 유안이었다.

“어서 오세요, 이안 씨. 지난밤에 잘 주무셨나요?”

“다행히 자애로운 바다께서 보우하셨는지 숙면했습니다. 제 호위들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오른쪽에서부터 롯산, 제이, 갱어, 아이, 프렛입니다. 프렛은 어제 보셨죠?”

유안은 제이드와 프레시아, 그리고 인형들을 사람인 척 소개했다. 제이드는 제이, 프레시아는 프렛이었다.

“하, 함께하게 돼서 영광입니다.”

2미터가 넘는 거구의 사내, 유안이 조종하는 인형 롯산이 호위의 대표자인 것처럼 인사하자 아멜리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별말씀을요. 아, 조금 있으면 유적에 들어갈 테니 허가증에 ‘등록’부터 해 주시겠어요?”

허가증 하나당 20명의 정원이 있는 건 단순한 행정적 제한이 아니었다.

허가증에 각자의 마력을 등록해야 유적 초입의 방위 마법이 발동하지 않았는데, 그 등록 정원이 20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죠.”

유안이 호위들과 함께 대지 교단의 허가증을 들고 성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자 아멜리는 로툴러스에게 슬쩍 물었다.

“어떤가요? 어제 말씀하신 대로 유사시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의 물음에 로툴러스는 날개 깃털로 부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그래, 도움이 될 것 같다. 호위 중 눈여겨볼 만한 사람은 셋 정도. 나머지 둘도 실력은 나쁘지 않은 것 같군.”

로툴러스의 시선은 제이드, 프레시아, 도플갱어형 유안 프로토타입에게 향했다. 개중 시선이 가는 건 역시 짙은 ‘갈색 머리’를 한 프레시아였다.

“그래요? 그거 다행이네요.”

싱긋 웃은 아멜리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자, 이제 유적에 들어가죠.”

바다 교단의 성녀 아멜리가 이끄는 탐사대는 곧장 유적에 발을 들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0